134화 전세 역전
어렴풋이 어둠이 내린 읍내 거리. 허물어진 건물 사이로 몬스터들이 대가리를 내민다.
‘와이번인가? 이빨 한번 살벌하군.’
몬스터의 과반을 차지한 것은 와이번이었다. 위험도 A급의 강력한 몬스터. 보통은 구경할 일도 잘 없는 희귀 몬스터지만 지금은 300마리 넘게 포진해 있다.
그 뒤로는 B급의 대형 몬스터들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일부러 덩치 큰 놈들만 골라 온 모양이다.
그러나 가장 큰 기운을 내뿜는 존재는 의외로 선두에 선 인간 여인이었다. 잿빛 머리카락에 가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남미계 미녀.
덩치는 몬스터의 반의반도 안 되는 주제에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SS급이군.’
서시희와 비슷한 수준의 위압감. 저런 기운을 가진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는다.
‘지금부터는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도 심사숙고해야겠군.’
고병갑은 지척에 있는 그러글을 앞으로 나서게 했다. 일루미션의 근거지 하나를 제거하느라 숫자가 많이 줄었다. 그래도 자질구레한 것까지 합치면 천은 넘을 성싶었다.
‘괜찮아, 몬스터는 그러글을 보면 달아나…….’
“크르르!”
“…달아나지 않는다고?”
이변이 일어났다. 본래 몬스터는 그러글만 봤다 하면 꽁지를 빼고 도망가기 일쑤다. 한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놈들은 시뻘건 안광을 번뜩이며 투지를 불태웠다.
계획이 어긋났음을 직감할 무렵, 마주 선 여인이 입을 열었다.
“이 시커먼 떨거지들을 부리는 게 너였구나? 난 이런 게 있다는 말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것들은 대체 뭐지? 아니, 넌 당최 뭐 하는 놈이야?”
독특한 억양의 영어였다.
고병갑은 살아생전 자신의 영어 실력이 평균이나마 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인이 하는 말을 속속들이 알아먹을 수 있었다.
‘에아의 권능 덕분인가.’
과거 로드의 권능을 빼앗겼을 때 그는 고블린들과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난감하던 차 에아의 도움으로 언어의 장벽을 허물 수 있었는데, 그 이후로 온갖 언어에 능통해지게 됐다.
고병갑은 여인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변의 기운을 감지했다.
‘몬스터는 이게 전부인가. 시간을 끌어야 해.’
그가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입술 사이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글쎄, 내 신상은 그렇게 따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남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자기소개부터 하는 게 기본 아닌가?”
“허어? 이게 날 상대로 농담 따먹기를 하려고 들어?”
여인이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본인 뒤로 서 있는 몬스터를 가리키며 으스댔다.
“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 다 알아. 긴장한 게 다 느껴지거든?”
“졸따구 자랑을 하고픈 건가? 미안하지만 졸병이라면 나도 넉넉하게 가지고 있어서 말이야.”
“그 새카만 떨거지들? 별거 아니던데?”
한순간, 와이번 한 마리가 아가리에서 카르마 덩어리를 뿜어냈다. 샛노란 카르마 덩어리는 맞은편에 있던 그러글 대여섯 마리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고블린들이 당장 반격할 듯 굴었다. 고병갑은 얼른 손을 뻗으며 그들을 제지했다.
「기다려라.」
「…예.」
여인은 눈을 매섭게 뜨며 고블린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몇 초 후, 그녀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너.”
“뭐냐?”
“너 어떻게 저 고블린들을 컨트롤하는 거야? 너 정신계 능력자 아니잖아.”
“내가 정신계 능력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허? 이게 굼벵이 앞에서 주름잡으려고 하네. 감히 세계 제일의 마인드 컨트롤러 앞에서 거들먹거려?”
실상은 이렇게 된 것이었다.
여인은 본인의 정신 지배 능력으로 고블린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블린들은 명령을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지배가 먹히지 않는다고? 저것들이 나랑 동급일 리는 없을 테고… 그럼 내 지배의 고리보다 강력한 결속이 존재한다는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마인드 컨트롤러는 없다.
그러니 저 새카만 괴물만 보면 내빼는 몬스터들까지 억지로 붙잡고 있지 않은가?
그때 고병갑이 비아냥대는 어조로 물었다.
“보아하니 넌 육망교에서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는 작자인가 보군. 정신계 능력자라면, 그래. 네가 아리에나라는 계집인가? 최후의 일원? 그거였지, 아마.”
“…그것까지 알고 있어? 알겠다, 너 서시희 그년과 한통속이구나. 그 미친 할망구 어디 있어?”
“고건룡이 어디 있는지 먼저 불면 알려 주지.”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흥! 필요 없어. 너를 내 노예로 만들어서 다 불게 시키면 그만이니까.”
아리에나가 사나운 기세로 카르마를 방출했다. 그녀는 카르마에 본인의 의식을 조금 집어넣어 고병갑에게 침투를 시도했다.
‘제까짓 게 으스대 봤자 내 혼을 직접 떼어 넣으면 버텨 낼 재간이 있겠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몰라도 이놈을 노예로 만들면 저 고블린들까지 저절로 따라오겠지.’
그녀는 삽시간에 고병갑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고병갑은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카르마를 뿜어낸 뒤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차피 시간을 끌어야 하는 입장이기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리에나는 고병갑의 깊숙한 곳으로 점점 더 파고들었다.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이제 이곳에 자신의 얼을 심어 두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면 고병갑은 자아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될 터다.
‘됐어, 이제 빠져나가면…….’
<이런 발칙한 계집애를 보았나.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딴 더러운 것을 투기하려고?>
‘무, 무슨!?’
아리에나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물론 고병갑의 내면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직후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거구의 사내였다.
‘한 몸에 영혼이 두 개라고? …아니! 세 개다!’
그녀가 다시 한번 몸을 돌렸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건 밖의 괴물과 생김새가 흡사했다. 하지만 뿜어내는 기운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몸뚱이 하나에 세 개의 혼이 공존할 수 있는 거지? 그 대주교조차도 두 개뿐인데!’
아리에나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카만 무언가가 간드러진 교성을 뱉어 냈다.
<꺄르륵! 마드무트의 기운이다! 싱싱해!>
<이봐, 악마. 저 계집은 내가 점찍었다. 유희 거리라니, 오래간만에 깨어난 보람이 있군.>
<싫어! 저 넋은 내가 먹을 거란 말이야!>
<처먹든 말든 그건 네 맘대로 해라. 대신 내가 손 뗄 때까지 건들지 마.>
<알았어. 난 혼만 먹으면 돼, 꺄하하!>
“너, 너희는 대체 뭐야?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아리에나가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랜드리올이 제 몸만큼이나 거대한 검을 소환하며 대답했다.
<흥, 네까짓 년이 짐의 정체를 알아서 무얼 하겠단 말이냐? 무엄함이 도를 넘는구나.>
“뭐, 뭐가 어째?”
<네년이 풀풀 풍겨 대는 역겨운 냄새와 악연이 깊다는 것은 알아 둬라.>
“제길! ―꺄악!”
<무지몽매한 계집애로고. 짐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성싶었더냐?>
혼을 챙겨 달아나려던 아리에나는 앞을 막아서는 랜드리올에게 된통 얻어맞았다.
그녀는 절망했다. 이곳에서 달아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거구의 사내가 내뿜는 존재감은 실로 대단했다. 떼 온 혼 조각으로 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 설령 100%였다 쳐도 존재감으로서 압도할 수 있었을까? 확실할 수 없었다.
“시… 싫어! 나를 내보내 줘!”
아리에나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호소했다. 들려온 대답은 역시나 냉랭했다.
<기가 차는군. 비집고 들어올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보내 달라니. 참으로 뻔뻔하도다. 달아나고 싶거든 짐을 쓰러뜨리면 될 일이다. 뭐, 저 새카만 것이 너를 내버려 두리라곤 생각되진 않지만 말이야.>
“으아아아!!”
<이제야 대적할 마음이 생겼나? 좋다!>
아리에나가 발악하며 덤벼들었다. 하지만 랜드리올은 가뿐하게 받아치며 그녀를 농락했다. 유희, 그야말로 유희였다.
랜드리올의 검이 그녀를 마구 헤집었다. 물론 실제로 상처 입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고통만큼은 분명한 진짜였다.
발악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넝마가 된 아리에나가 바닥에 엎어졌다. 랜드리올은 흥이 식었는지 콧방귀를 끼었다.
<벌써 끝이냐? 근성이 없는 종자로고.>
“끄… 끄으…….”
<끝났어? 그럼 나 저거 먹어도 돼?>
<멋대로 해라, 악마.>
<꺄르륵! 좋아!>
바로 이어서 새카만 존재가 덮쳐 왔다. 놈은 아리에나가 신줏단지 모시듯 끌어안은 혼을 덥석 채갔다. 이윽고 쩍 벌린 입으로 그것을 가져갔다.
“싫어! 제발 그러지 마!”
그녀가 기겁하며 말렸다.
아쉽게도 악마는 동정을 몰랐다.
<잘 먹겠습니다!>
“끼야아아아악!!”
“끼야아아악! 으아아악!”
“뭐야? 갑자기.”
「엥? 로드, 저 여자 미쳤나 봐요.」
고병갑과 고블린들은 황당한 눈빛으로 아리에나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대략 10초 정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 게 아닌가?
“으아아악! 으헝헝헝!”
아리에나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땅에 이마를 찧어 댔다. 울음 섞인 신음은 짐승의 것 같았다.
고병갑으로선 산 채로 혼을 씹어 먹히는 고통을 알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됐다.’
뭐가 됐건 적의 패닉은 곧 기회다.
그가 부하들에게 소곤거렸다.
「모두 내게 붙어라. 저년의 목부터 따야 한다. 그러면 몬스터들은 자연히 무력해질 거야.」
「알겠습니다.」
「존명.」
“죽여!! 저 새끼들 다 죽이라고!!”
아리에나가 불쑥 고함쳤다. 그녀의 눈은 실핏줄이 죄다 터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분노를 이어받기라도 했는지 몬스터들은 광포한 괴성을 뱉으며 돌격했다.
400가량 되는 상위 몬스터는 분명 위협적이다. 하지만 고병갑은 이미 그에 대한 대처를 완료한 상태였다.
‘막아라.’
그가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자 온 사방에서 그러글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그러글을 모두 끌어모은 것이다. 그 물량이 범람하는 강물 같았다.
아리에나가 기겁했다.
“어… 언제!?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 멍청한 년아, 그러글은 기척이 없어요.”
수천에 달하는 그러글이 몬스터를 전담했다. 그 틈새를 가르며 고병갑과 여덟 부하가 질주했다.
아리에나는 황급히 반응했으나 아직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 탓에 그녀의 움직임은 엉망진창이었다.
날붙이와 주술, 순수한 힘이 아리에나에게 쏟아졌다. 흡사 폭격을 퍼붓는 듯했다.
도르마의 주술이 그녀를 옥죄고, 도란을 비롯한 근접 전사들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가까스로 거리를 벌려 봐도 검기와 전격이 날아들 뿐이다.
회심을 담은 공격은 두 덩치에 의해 간단히 막혔으며 티끌만큼의 피해를 줘 봤자 바몬드의 치유술에 의해 무의미해졌다.
아리에나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뭐야? 너 싸움 더럽게 못하네?”
“으아아아! 입 닥쳐!!”
사실 아리에나는 몸으로 때울 일이 없었다. 웬만한 적은 정신 지배를 이용해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전투 방식은 정신 지배를 통한 자결 명령, 혹은 정신 지배를 통한 병졸화(兵卒化)였다.
그런 의미에서 고병갑과 고블린들은 그녀의 완벽한 천적이었다.
기껏 데리고 온 몬스터 군단도 그러글에 둘러싸여 의미가 없어졌고.
아리에나의 몸이 점점 더 걸레짝이 되어 갔다. 그녀의 몸 어디든 붉게 물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끝내겠습니다.」
아군이 만들어 준 틈을 노리고 투르카가 침투했다. 그의 팔이 벼락같이 움직이며 아리에나의 목을 쥐었다. 아니. 손이 솥뚜껑만 하니 얼굴을 통째로 쥐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붙잡힌 아리에나는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녀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투르카의 손아귀가 그녀의 머리통을 터뜨릴 듯 짓눌렀다.
「투르카, 멈춰라.」
그녀의 머리가 정말로 펑! 하고 터지기 전, 고병갑이 투르카를 말렸다.
「예? …아, 알겠습니다.」
투르카가 오므렸던 손을 폈다. 아리에나는 젖은 수건처럼 철퍼덕 떨어져 내렸다.
눈은 까뒤집혔고, 호흡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미약하다. SS급의 육신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었으리라.
고병갑은 그녀를 내려보며 말했다.
「도르마, 이 여자를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킬 수 있겠냐?」
「흠, 일단 한번 해 보겠습니다.」
도르마가 아리에나의 머리맡으로 다가가더니 어두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 새카만 기운은 아리에나의 입으로 꾸역꾸역 밀려 들어갔다.
“꾸… 꾸억! 꾸어억……!”
아리에나가 괴로운 듯 신음을 토했다. 팔다리는 바들바들 떨렸다.
의식은 짧게 끝났다. 도르마가 손을 털며 일어났다.
「정신을 묶었습니다. 이 여자의 정신력이 보통을 뛰어넘는지라 가능할까 싶었는데, 심신이 쇠약해진 상태라 먹혀든 것 같습니다.」
「그래? 날뛸 가능성은 없겠지?」
「예, 제가 다시 주술을 풀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시체나 다름없을 겁니다.」
「좋아, 잘했다.」
“캬, 캬하학!”
“키에에엑!”
도르마가 아리에나의 정신을 묶은 순간. 아직 살아 있는 몬스터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놈들의 눈에 서려 있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직 공포만이 그득하게 남아 있었다.
고병갑은 그러글에게 명령했다.
‘쫓아라, 그리고 죽여라.’
“우어어어!”
그러글들이 잽싸게 그 뒤를 쫓았다. 달아나는 것 중 절반은 잡아낼 터다.
「다들 고생 많았다. 아스빌람으로 돌아가자.」
「옙! 로드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로드! 로드! 그런데 이 여자는 왜 안 죽이시는 거예요?」
「죽일 거야.」
「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정보는 뽑아내고 죽여야지.」
「아하!」
고병갑은 아리에나를 어깨에 걸친 채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