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전세 역전
겨울이 추운 것이야 당연한 이치다마는, 올겨울은 유달리 시렸다. 각성자는 추위와 더위에 내성이 있어 괜찮았지만 비각성자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들을 달래 주는 건 작은 모닥불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두꺼운 겉옷을 걸친 채 모닥불 주위로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쬐었다. 21세기 문명국의 현주소는 그러했다.
희극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비극적이기도 한 광경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정이 좀 나아진 것이다. 적어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살인귀는 더 이상 없잖은가.
“고마 서울은 이제 탈환했다고 봐도 되겠네예.”
고병갑은 잠깐 한창훈을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원위치시켰다. 생존자들이 서울 거리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생존자들은 폐허가 된 서울을 복원하려 애썼다. 메마른 바다에 바가지로 물을 채워 놓는 꼴이긴 했으나 자포자기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쨌든 먼 훗날을 기약하려면 누군가는 맨땅에 대가리를 박아야 하는 법이니까.
한동안은 생존자 탐색에 총력을 기울였다. 며칠간 서울 곳곳을 쥐잡듯 뒤져낸 결과 200여 명의 난민을 추가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공포와 굶주림에 지쳐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래도 목숨은 부지하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
고병갑은 난민들을 통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엔 희소식도 더러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나 했더니, 모두 남쪽으로 피난을 간 거였어.’
사태 초기만 하더라도 2천만 서울, 경기 시민이 모조리 죽임당한 줄 알았다. 다행히 그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직후 북쪽 전선이 붕괴했다는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부리나케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니 아마 한반도 남단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서둘러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두리 양식마냥 살육당하기 전 조치해야 할 터다.
‘그러글이 많이 죽었군.’
악마에게 힘을 부여받은 이후 고병갑은 그러글을 수족처럼 느낄 수 있게 됐다.
앞서 남하시킨 56만의 그러글 중 절반 이상이 죽었다. 지금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죽고 있다. 다만 그는 어떤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은 느끼지 않았다.
야속한 말이긴 하나 그래 봤자 그러글이 아니던가? 그러글은 아직도 차고 넘쳤다.
서울을 떠나기 전, 사람들은 마지막 정비를 가졌다. 그러는 와중 고병갑을 필두로 한 몇몇은 전파 기지국을 찾았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 보지요.”
고병갑이 거둔 생존자 중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이번에 고병갑과 동행한 사람들 역시 그런 부류였다. 그들은 기지국 내 비상 발전 장치를 가동한 뒤 능숙하게 통신 장비를 조작했다.
“통신이 닿겠습니까?”
고병갑이 애써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태 하나가 부러진 안경을 위태롭게 걸쳐 쓴 40대 중년이 희망적인 어조로 답했다.
“글쎄요, 닿으라고 기도해야지요.”
세 명의 전문가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문외한인 고병갑은 잠자코 구경만 했다. 어떻게 한 다리 끼어들려고 해도 민폐만 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고병갑이 움직일 때는 그들이 뭔가 무거운 것을 가져 달라고 할 때뿐이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덧없이 시간이 흘렀다.
처음의 긴박함은 어디 갔는지 슬슬 지루함이 몰려오려던 차, 한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내리쳤다.
고병갑은 번뜩 고개를 치켜들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뭐가 잘 안되는 겁니까?”
“젠장…….”
사내는 주저리주저리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말이 길었으나 결국 요지는 ‘정체불명의 간섭으로 인해 외부와 통신이 불가하다.’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두 남자도 비슷한 심경인지 처연한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여기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없으니.”
“흠…….”
고병갑은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혹시 메시지를 남겨 놓는 것도 안 됩니까?”
“예?”
“간단한 문자 같은 것 말입니다. 저쪽이 읽을지 말지는 모르지만 일단 남겨 놓기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어… 그런 거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수신지는 어디로 하면 되겠습니까?”
“전 세계로 해 주십시오.”
“전 세계요? 그럼 담을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용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용은.”
고병갑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마저 말했다.
“푸른 기둥을 파괴하라, 로 해 주십시오.”
* * *
고병갑 일행은 서울을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지역 한 군데 한 군데를 모두 수색하며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인력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여 그들은 격전지 위주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차피 일루미션만 모조리 잡아내면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 될 테니까.
그러글을 통해 일루미션 일당의 위치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도심 몇 곳을 거점으로 잡고 몬스터를 보내 사람들을 사냥하는 것 같아요. 자기들은 몬스터 뒤에 숨어 가급적 움직이지 않고요.”
정찰을 나섰다가 복귀한 서시희는 그렇게 보고했다.
“그렇겠죠. 자기네도 머릿수가 무한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 그 거점만 골라 파괴하면 간단하겠네요?”
“간단? 말은 참 쉽죠. 거점이 한두 군데도 아닐 텐데.”
회의실에 모인 헌터들은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일루미션을 소탕할 수 있을지 토의했다.
고병갑은 이쯤에서 결단을 내리자고 마음먹었다.
“병력을 둘로 나누도록 합시다.”
“따로 움직이자는 말입니까?”
“네, 저는 부하들과 함께 강원도를 통과하여 경상도 쪽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저기 서시희 씨와 함께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쪽으로 진행하세요.”
“글쎄요, 전력을 분산하면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커질 텐데요.”
심승섭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고병갑은 덤덤히 대답했다.
“아니요.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는 아스빌람이라는, 언제든지 접선할 수 있는 안전지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혹 위급 상황이 닥치더라도 빠르게 지원할 수 있겠지요.”
“흠…….”
“또한 저는 그러글을 이용해서 일루미션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서시희, 당신도 놈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것쯤 어렵지 않겠지.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해요. 다만 이곳을 끼고 있더라도 연락할 수단이 마뜩잖은 건 여전해요.”
“일정 주기마다 아스빌람에 방문해 전령을 남기면 돼. 많이 위급할 경우에는 일단 아스빌람으로 피신한 뒤 힘을 합치면 되고. 또 그러글이 곁에 있다면 당신들의 안위를 대강은 파악할 수 있을 거야.”
서시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헌터들 또한 암묵적인 동의를 보냈다.
“그럼 지금부터는 개별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고병갑과 고블린들, 서시희와 헌터들은 경기도 여주를 기점으로 찢어졌다.
그는 아스빌람에 있던 자동차 한 대를 지구로 옮겨 그것을 타고 이동했다. 그의 첫 번째 행선지는 강원도 홍천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일루미션 작당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풍비박산 나지 않았더라면 고작 몇 시간 안에도 도달할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몬스터가 서울 광장의 비둘기만큼이나 흔한 현시점에서는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즐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도로의 상황도 개판이었다.
그는 도보와 운전을 병행하며 부지런히 홍천으로 향했다.
「로드, 그런데 있잖아요.」
반파된 대교를 우회하던 중이었다. 고병갑과 나란히 달리던 도란이 말을 걸었다.
「음? 왜 그래, 도란.」
「그 일루미션이라는 패거리를 다 잡아 죽인다 쳐도 인간들이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이야 그게?」
도란은 잠시 고개를 돌려 주변 경관을 살폈다. 건물 잔해와 몬스터의 시체가 뒤죽박죽 뒤섞인 이곳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중간부가 폭삭 주저앉은 고가 다리는 인류의 척추가 끊어진 것을 묘사하는 듯했다.
「저것들 좀 보세요. 다 망가졌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다시 예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요.」
도란의 지적대로였다.
사실 이 재앙을 극복해 낸다 쳐도 그 이후가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수도 있을 터다.
정치, 군사, 경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체계가 유명무실해졌다. 도시 인프라는 말하면 속 쓰릴 지경이고, 사람도 무지막지하게 죽어 나갔다.
이번 일을 계기로 문명 수준이 100년쯤 후퇴한다고 해도 결코 우스개가 아닐 터다.
다만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지금은 당장 코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기에도 벅찰 지경이니까.
「글쎄, 네 말처럼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
「뭐, 인간들 사정이야 제 알 바는 아니지만요.」
「도란! 말을 조심해라. 이곳은 로드의 고향이시다.」
키리얀이 도란을 째려보며 일갈했다. 도란은 그제야 자기 로드가 인간이란 사실을 자각한 모양이었다.
「아! 죄, 죄송해요. 로드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됐다. 사실인데, 뭐. 이 일을 벌인 것도 인간들인데 누굴 탓하겠어.」
고병갑은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산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또 모르지. 인간 로드 같은 게 나타나서 인류를 구원해 줄지.」
「로드께서 저희를 구원해 주신 것처럼 말입니까?」
「그래. 서두르자, 곧 해가 지겠어.」
「예!」
고병갑과 그의 부하들은 부지런히 다리를 놀렸다.
* * *
어느덧 12월 말엽.
고병갑과 그의 부하들은 홍천과 강릉을 지나 영월을 끝으로 강원도 내 일루미션은 모두 소탕했다.
고병갑이 그것을 해내는 동안 서시희 일행은 충청도 네 개 도시에 자리 잡은 일루미션의 거점을 파괴했다.
그러글이 아군으로 돌아서고, 몬스터들이 일루미션을 등지니 이보다 쉬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해 나가던 사이, 고병갑은 자신의 심경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음을 자각했다.
바로 일루미션 소속 헌터들을 죽임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부분이다.
이게 좋은 신호인지 그릇된 신호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뭐가 됐건, 눈앞의 적들이 그러글에게 산 채로 씹어 먹혀도 별 감흥이 없었다.
「구태여 로드께서 나설 필요가 없겠습니다.」
「어, 그러글만으로 정리가 되네.」
몬스터를 부리지 못하는 일루미션은 무력했다.
그들은 기척도 없이 나타난 수천 마리의 그러글에게 잔혹하게 잡아먹혔다.
“으악! 사, 살려 줘!”
그때 혼란을 피해 한 남자가 도망쳐 왔다. 그는 고병갑과 고블린들을 발견하고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오, 흐헝헝!”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 고병갑은 싸늘한 눈으로 그의 목을 주시했다.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목에다 육각형 문신을 큼직하게도 새겨 놓았다.
고병갑은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고통 없이 보내 줘라.」
「제가 하겠습니다.」
“어? 어어… 끅!”
키리얀이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미간을 찔렀다. 그러자마자 남자는 바싹 구워지며 무너져 내렸다. 아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오늘은 이쯤 하고 슬슬 돌아… 음!?’
그때 별안간 고병갑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건 다른 고블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드시여! 뭔가 오고 있습니다!」
「어, 나도 느꼈다.」
「강한 기운입니다. 숫자도 상당하고요!」
그의 이마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기척만으로도 엄청난 것들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어. 명확히 우리를 노리는 거야.’
「어쩌시겠습니까? 일단 몸을 피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르마가 다급한 음성으로 권했다. 하지만 고병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해볼 만하다. 오히려 적의 중추를 끊을 기회야.」
그가 눈을 감고 이 근방에 포진한 그러글에게 개념을 주입했다.
‘내게 모여라.’
총 16,132마리의 그러글이 명령에 따라 고병갑 주위로 모여들었다.
「전투태세를 갖춰라. 영혼과 동화해.」
「예!」
여덟 고블린이 일제히 영혼과 동화했다. 그들이 매섭게 한 방향을 쏘아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이쪽을 향해 돌격해 오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몬스터 대군을 거느린 어떤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