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32화 (132/151)

132화 전세 역전

노르웨이의 어느 이름 없는 섬. 인적은커녕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곳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무인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실상은 육망교의 비밀 아지트다.

지하에 구성된 어마어마한 설비 중엔 당연히 의료 시설도 있었다. 그곳에서 몇 날 며칠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끄아아악!”

의식을 잃은 고건룡이 끊어질 듯 신음을 토했다. 이윽고 멀쩡하던 그의 몸이 설익은 수박마냥 으스러졌다.

의료인들이 기겁하며 달려들어 그에게 약물을 투여했다. 힐러들은 육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진땀을 쏟았다.

유리 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에나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의료실 안으로 박차고 들어갔다.

“제기랄! 이런 땡보 새끼들을 봤나! 왜 못 고치는 거야? 여기에 처바른 돈이 얼만데 왜 자꾸 저러는 거냐고!”

“아, 아리에나. 함부로 들어오시면……!”

“이거 놔!”

“아익쿠!”

아리에나가 팔을 뿌리자 그녀를 막아서던 의사가 속수무책으로 날아갔다. 의사는 병상 위로 쓰러졌고, 얼떨결에 짓눌린 고건룡의 다리는 낙엽마냥 바스러졌다.

의료인들의 안색이 새파래지는 순간이었다. 아리에나도 당황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

“이 똘추 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당장 꺼지지 못해!”

그때 의료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이자 SS급 힐러인 란즈링이었다.

그녀는 아리에나를 거칠게 밀치며 고건룡에게 뛰어갔다. 그러곤 붕괴하는 다리에다 힐을 쬐었다. 가루 단위로 흩어지던 다리가 제 모양을 찾아갔다.

아리에나는 밀쳐진 것이 몹시도 불만인 듯했지만 차마 성질을 부리지 못했다.

그녀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란즈링!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대주교를 못 고치는 거냐고? 네 치유술은 세계 제일이잖아?”

“썅! 너 아직도 안 갔냐?”

“말해 달라니까!”

“몰라! 모른다고, 제기랄! 나도 이런 건 처음 본단 말이야!”

란즈링은 짜증이 차오른 얼굴로 되물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고. 너는 대주교가 그 여자와 싸울 때 함께 있었잖아. 대체 무슨 일을 당했던 거야?”

“모, 몰라. 나는 기절해 있어서…….”

“자랑이다, 이 똘추 같은 계집애!”

“윽! 그래도 내가 아니었다면 대주교는 벌써 죽었을 거라고!”

“듣기 싫으니까 썩 꺼져!”

란즈링은 다시 고건룡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거의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육체가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자꾸 흩어지려 하는 거야? 이건 마치 보이지 않는 뭔가가 억지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잖아.’

고체는 기본적으로 뭉쳐 있으려 한다. 하지만 현재 고건룡의 육체는 흡사 기체 같았다. 조금만 방심해도 제멋대로 흩어지는 기체.

“아… 아리에…….”

그때였다. 의식 불명이던 고건룡의 입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리에나가 번뜩 고개를 돌리며 그리로 뛰어갔다.

“대주교! 정신이 들어?”

“사… 사람……. 한국…….”

“어? 뭐라고 한 거야? 못 알아듣겠어. 다시 말해 봐!”

고건룡은 초점을 맞추려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입에선 마른기침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한참이나 고통스러워하다가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뱉어 냈다.

“한국으로 사람을 보내라. 곧… 계시의 날이다. 방주를 비워야 해.”

“누굴 보내는데?”

“네가 알아서…….”

고건룡이 다시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든 것이다. 고비를 넘겼는지 붕괴하던 몸이 잠잠해졌다.

아리에나는 대주교의 유지를 따르려 최후의 일원들을 소집했다.

* * *

일루미션 수뇌부는 최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심판의 날’ 이후 한반도에 있는 모든 불신자를 처단하는 것.

그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줄로만 알았다. 아니, 초창기만 하더라도 일은 순탄했다.

솔직히 말하면 딱히 손쓸 일도 없었다. 숨만 쉬어도 몬스터들이 알아서 불신자들을 처단해 주었으니까.

그들은 가만히 뒷짐 지고 서서 살육의 장을 구경하기만 하면 됐다.

피난민이 대거 이탈한 서울을 정리하고, 물고기를 몰 듯 남부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서울 인근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소수의 생존자가 농성을 벌이는 것쯤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그들은 평범한 생존자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귀신처럼 신출귀몰했다. 무슨 홍길동이라도 되는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신도들을 죽여 댔다. 적의 세력은 갈수록 커졌고, 교단의 피해는 나날이 쌓였다.

결국 남부에 밀어 넣은 병력 일부를 서울로 회군시켰다. 이 이상 피해를 감수할 수 없었기에 잠복하여 일망타진을 노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본 적도 없는 괴물들이 서울 거리로 쏟아졌다.

그건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구워어어어어!!”

웬만한 빌딩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생명체가 수족을 허우적거린다. 저 시커먼 것에게는 사소한 몸짓일지 몰라도 당하는 입장에선 재앙이었다.

놈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입안에 쑤셔 넣고 보았다. 보라, 지금도 가로수를 뽑아다 으적으적 씹지 않는가?

“꺄아악!”

“으악! 제발 살려 줘!”

“퀴에에엑!”

더욱 난감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저 시커먼 괴물 앞에만 서면 몬스터가 통제되지 않았다.

몬스터들은 겁에 질려 달음박질쳤고, 고기 방패가 사라진 일루미션은 눈에 띄게 무력해졌다.

“대체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싸워! 저 괴물을 죽이라고, 이 똥개 새끼들아!”

“캬아아학!”

“이것들이 얻다 대고 더러운 이빨을…….”

“캬학!”

“이런 썅!”

“께겡!”

심지어 통제에서 벗어나는 몬스터까지 속출했다.

‘말도 안 돼. 반지가 제 기능을 못한다니!’

교단이 나누어 준 반지에는 아리에나 바바디의 정신 지배가 서려 있다. 몬스터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한데 정신계 초능력 최고 권위자의 정신 지배가 먹혀들지 않는다니…….

‘저 괴물에 대한 공포가 주교님의 통제력을 초월했단 말인가?’

일루미션의 간부 중 한 명인 도지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저 괴물들은 대체 뭐길래 몬스터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걸까.

“망할! 막상 붙으면 당해 내지 못할 적도 아닌데!”

그가 신경질적으로 창을 다잡았다. 몬스터들이 말을 안 들으니 직접 나설 수밖에.

그 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던 그의 시선에 한 몬스터가 걸렸다.

“저건 또 뭐야?”

그건 고블린이었다. 그러나 여느 고블린과는 생김새가 사뭇 달랐다. 이목구비는 반듯했고, 신체는 건장하다.

놈은 가로등 위에 서서 이쪽을 내려보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혼란을 겪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우라가 보통이 아니야. 고블린 계통 중에 저런 것도 있었나? 최소 S급은 되겠는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블린 중 가장 강한 개체는 킹 고블린이다.

킹 고블린은 대략 A, B급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저 고블린은 킹 고블린보다도 곱절은 강한 기운을 내풍겼다.

‘몬스터 웨이브 이후 신종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도지승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반지의 힘을 끌어냈다. 그가 저 먼 곳에 있는 고블린을 불러들였다.

전장을 넓게 훑어보던 고블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훌쩍 도약하여 한달음에 다가왔다.

“좋아! 이 녀석은 말을 듣는군! 하여간 몬스터건 인간이건 약해 빠진 것들은 쓸모가 없다니까!”

도지승이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고블린은 무표정히 말했다.

「위에서 군림하는 인간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알아서 불러 주는구나.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말을 하는 것 보니 지능이 높은 놈인가 보군. 미안하지만 난 네놈들이 지껄여대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도지승이 창을 뻗어 거구의 그러글을 가리켰다. 동시에 반지를 통해 개념을 주입했다.

“가서 저 괴물을 죽여! 네 몸이 갈가리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죽이란 말이야!”

「한 치 앞도 모르니 이리 어리석을 수가.」

도르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도지승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가 위협적으로 창을 들이밀며 재차 일갈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얼른 저 괴물을 죽이래도!”

「투르카, 강한 인간이다. 기회를 잡아다오. 내가 마무리를 짓지.」

<알았다.>

도르마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도지승은 그 사소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모든 신경이 ‘왜 이 고블린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까?’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초 뒤, 도르마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삽시간에 거구가 튀어 올랐다. S급 헌터 도지승은 맹수 같은 반사 신경으로 반응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끄학!”

투르카의 육중한 주먹이 도지승의 척추를 강타했다. 카르마 베리어가 어느 정도 피해를 흡수해 주었음에도 그의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도르마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을 뻗었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도지승의 얼굴을 붙잡았다.

다음 순간, 도지승은 일곱 개의 구멍에서 새카만 송곳이 치솟는 경험을 해야 했다.

도르마는 도지승의 목을 잘라 자신의 그림자 안에 숨겼다.

「로드께 돌아가자.」

「알았다.」

두 고블린은 유유히 전장을 이탈했다.

* * *

고병갑 일행은 더는 게릴라전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수십만 그러글을 바탕으로 전면전을 벌였다. 결과는 아군 측의 대승이었다.

이실직고하면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중이다.

그건 전적으로 뜻밖의 행운 덕분이었다.

‘몬스터들이 그러글에게 쪽도 못 쓸 줄이야.’

대다수의 몬스터는 그러글과 마주치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꼬랑지를 말며 도망치기 급급했다는 말이다.

고병갑은 그 까닭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었다.

‘과거 악마에게 각인됐던 공포가 되살아난 것이겠지.’

먼 과거, 몬스터들은 악마에게 일방적으로 잡아먹혔다. 그 무자비한 포식은 무려 300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비록 그러글이 온전한 악마는 아니지만 유전자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강아지들이 호랑이의 대소변 냄새만 맡아도 경기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맥락일 터.

물론 다음과 같은 의문도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왜 고블린들은 그러글을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

고병갑은 친애하는 부하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고,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었다.

-로드께서 곁에 있으신데 세상 무엇이 저희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로드와 함께라면 천 길 낭떠러지도 웃으며 뛰어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나 로드 맹신자들다운 답변이었다. 그리고 고병갑은 그러한 대답이 썩 만족스러웠다.

“흐윽! 지승이 형, 어째서 그딴 사이비 종교에 들어간 거야! 시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딴 짓에 동조한 거냐고!”

들판의 한구석에서 호찬명 헌터가 울부짖었다. 그의 손엔 한 수급(首級)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도르마와 투르카가 잡아 온 일루미션의 간부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한국에 S급 헌터라 봐야 450명이 전부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육망교 신자였다니. 지금껏 그 사실을 숨긴 채 평범한 척 살아온 건가? 소름이 돋는구먼.’

며칠 전, 고병갑 일행은 피아를 구분하기 위해 S급 헌터의 명단을 작성했다.

일루미션으로 이적이 확실한 S급 헌터는 245명.

소속이 불분명한 S급 헌터는 117명.

확실히 포섭할 수 있는 자는 88명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연이은 참사 속에서 살아 있을지 미지수였고.

‘이제껏 잡아들인 S급 헌터가 17명이니까… 아직 한참이나 더 남았군.’

가야 할 길은 여전히 까마득했다. 하나 그 길은 더는 전처럼 암전에 있지 않았다.

전선의 상황은 이제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루미션의 최대 무기였던 ‘물량’이 이제 이쪽의 무기가 되었으니.

고병갑은 아무도 모르게 지구로 넘어갔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어느 빌딩에 올라 아래를 내려본다.

그렇지 않아도 캄캄한 밤이 그러글 때문에 더욱 까맣게 느껴졌다.

고병갑은 정신을 집중하며 56만이 넘는 그러글들에게 개념을 전송했다.

‘남쪽으로 내려가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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