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31화 (131/151)

131화 적의 적은 아군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그러글을 둔 채로, 사람들은 우두커니 멈춰 섰다.

머리 위로 두 손을, 손이 없다면 손 비슷한 것을 치켜들고 ‘X’ 자를 만든 그러글들.

그러글이란 족속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상식이 통하지 않지만 저건 분명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고병갑은 판단해야 했다. 이대로 돌격해 놈들을 도륙해야 할지, 전투를 물러야 할지.

후자의 판단이 분명 더 이성적이었다. 7천의 병력으로 저 많은 머릿수와 부닥치는 건 반쯤은 자살행위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회군하는 것도 화장실 들어갔다 그냥 나온 것처럼 찝찝한 기분을 줄 것이 분명했다.

“미친… 저것들 뭐 하자는 거야?”

대열의 선두에 선 정선경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무기에 실린 카르마는 금방이라도 저쪽을 향해 발산될 것 같았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 역시 당장이라도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을 듯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지! 정지! 다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판단을 마친 고병갑이 재빨리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멋모르고 쏜 총알 한 발이 전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섣부른 행동 하나가 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어쩌겠다고?”

정선경이 다가와 물었다. 고병갑은 슬그머니 검을 내리며 대답했다.

“놈들도 전쟁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필살기 쓰려고 기 모으는 걸 수도 있지.”

정말로 그런 거라면 꼼짝없이 다 죽으리라.

하지만 고병갑은 이 순간 어떤 위협적인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한 그러글에게 향했다. 엉망진창으로 생겨 먹은 그러글 중에서 나름 미적인 기준을 지키고 있는 놈이었다.

새카만 인형(人形)에 거대한 날개를 달고 있다. 머리에는 한 쌍의 뿔이 고압적인 자태를 뽐냈다.

그놈 역시 ‘X’ 자를 만들고 있었으나 이윽고 스르륵 팔을 내렸다.

놈이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곤 이쪽과 50미터쯤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어째 대화를 하자는 것 같지?”

“저것들, 말이 통하는 것들이었어?”

“보통은 안 그렇지. 그런데 지금이 보통 상황은 아니잖아.”

“염병, 자기들 먹게 한 5천 명쯤 제물로 바치라고 그러면 어떡해?”

“그럼 뭐, 엿 되는 거지.”

고병갑은 쩝 입맛을 다시더니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 후 일단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몇몇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보내왔지만 괜찮을 거라며 안심시켰다.

“잠깐 갔다 오지요.”

그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글 무리와 가까워질수록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기척이 없는 귀신 같은 것들이지만 머릿수가 머릿수인지라 음산한 기운이 마구 풍겼다.

얼마 뒤 그는 선두로 나선 그러글과 마주 보게 되었다. 놈의 면상에는 이목구비라 부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나 1초 뒤, 놈의 얼굴이 찰흙 반죽처럼 울렁거리더니 눈과 입을 만들어 냈다. 하관이 쭉 찢어지며 큼직한 입을 만드는 광경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었다.

「꺄르륵!」

놈의 주둥이에서 소름 돋는 교성이 터져 나왔다. 고병갑은 몸의 털이란 털은 다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어딘가 모를 익숙함도 느꼈다.

‘뭐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반갑다, 특별한 인간아.」

그때 놈이 말을 걸었다. 고병갑은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정선경이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러글과 말이 통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인간?」

「너.」

그러글이 손가락을 뻗어 고병갑을 지목했다. 고병갑은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를 뻔했다.

「내가 왜 특별한 인간이지?」

「특별하니까. 꺄르륵!」

고병갑은 입을 닫고 얼마간 생각에 잠겼다.

슬쩍 시선을 옮겨 지평을 바라보았다. 해가 8할 이상 자취를 감추었다. 더 어두워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그는 대화를 서두르기로 했다.

「원하는 게 뭐냐?」

「마드무트.」

「마드무트?」

「마드무트의 몸뚱이. 그것을 원해.」

「…어째서지?」

「먹지 못했으니까! 꺄하하하!」

그는 어린아이를 상대한다는 듯한 감상을 받았다.

「네놈들은… 네놈들은 대체 정체가 뭐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맞아,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는 바람일까? 아니면 돌멩이일까? 어쩌면 흐르는 강물일 수도 있고 흩날리는 먼지일 수도 있지.」

「뭔…….」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내놔!」

놈의 얼굴이 갑자기 10배는 부풀어 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아가리가 분화구처럼 쩍 벌어졌다.

고병갑은 뒷걸음질 치며 검을 겨누었다.

「그것을 줄 수 없다면?」

「으으응, 그러면 안 돼. 무조건 구해 줘야 해.」

고병갑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의 그러글은 그러글이 아니었다.

그가 위쪽, 그러니까 하늘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너는 악마냐?」

「우리가 시간에 얽매이기 전에는 그렇게 불렸더랬지. 하지만 지금은, 그래. 너희 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이라고 할 수 있지! 대단하지? 꺄르륵!」

「신… 대단하군. 그런데 그렇게 대단하면 직접 가서 마드무트의 모가지를 따지 그래?」

「으으응. 안 돼, 안 돼.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몸으로는 할 수 없어.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특별한 인간아.」

그러글이 목을 죽 뺐다. 놈의 목은 고무처럼 늘어났고, 그러글의 대가리는 고병갑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커먼 면상에선 썩은 내가 풀풀 풍겼다. 고병갑은 인상을 구기며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놈이 말했다.

「우린 계속해서 너를 주시하고 있었단다.」

「나를?」

「응, 너 말고 저 계집애도.」

그러글이 다른 쪽에 시선을 두었다. 놈의 눈길을 따라가자 서시희가 있었다.

자신과 서시희. 둘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바로 아스빌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 계집애보다는 네가 더 끌려. 왜냐하면 너는 먼 옛날 우리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었던 사내와 비슷하니까! 꺄하하하!」

「랜드리올을 말하는 건가.」

「맞아, 마드무트에게 살의를 품던 남자였지! 이 안에 있었구나!」

놈이 고병갑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병갑은 다시 두 걸음 물러났다.

「좀 떨어져 줬으면 좋겠는데.」

「왜?」

「냄새가 심해.」

「히잉…….」

놈이 시무룩하며 대가리를 치웠다.

「아무튼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구해다 줘. 그래야 우리가 완벽해질 수 있어.」

「그럴 수 없다면?」

「그래야 한다니까!!」

놈이 버럭 고함쳤다. 그 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들판이 통째로 울릴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기겁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금방이라도 공격을 쏟아부을 듯했다.

고병갑은 그것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고병갑의 눈이 살기라 번뜩였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야, 이 염병할 새끼야. 마드무트가 무슨 저잣거리에 널브러진 김밥 꽁다리인 줄 알아? 구해 달라고 하면 구해다 주게?」

「…못해?」

「차라리 네가 직접 하지 그래? 천상계에서 마드무트를 몰아낸 것도 너희 악마 족속이잖아?」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악마가 원하는 것은 마드무트의 목.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으리라.

더구나 상대는 이미 한 번 마드무트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악마다. 사라온보다 더한 신의 천적이란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그러글은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는 할 수 없어,」

「왜 할 수 없다는 거지?」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 아무것도 아닌 허물들뿐이야.」

놈이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그러글 무리를 흘겨보았다. 고병갑은 떠보듯 물었다.

「천상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건가?」

「맞아.」

「왜지?」

「우리가 소멸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지금 불완전하거든. 그래서 마드무트의 몸뚱이가 필요해. 영원불멸의 육신이 필요하다고!」

「아까는 신이라며 으스대더니 이번에는 약한 척인가?」

「힝…….」

고병갑은 검을 회수했다. 그 뒤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너희가 멋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너희를 대신해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가져다줄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거로군. 그게 나고 말이야.」

「맞아! 꺄르륵! 넌 특별하니까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 줄 수 있어!」

「나 역시 마드무트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꺄하하하! 좋아! 좋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뭐!?」

그러글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 외침에는 살기마저 실려 있었다.

「마드무트는 강하다. 현재의 나로서는 대적할 수가 없어.」

고병갑이 침을 꿀꺽 삼켰다. 태연한 척하지만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도 그럴 게 이것은 도박이었다. 저놈들은 고병갑을 필요로 한다. 그건 고병갑이 마드무트의 수급을 가져다줄 거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기대감을 충족해 주지 못할 거라 판단되면 태도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너희가 도와준다면 마드무트를 잡아다 바칠 수도 있겠지.」

「도와줄게! 도와주려고 온 거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이거! 선물이야. 꺄르륵!」

놈이 뒤편에 늘어진 그러글을 가리켰다. 족히 십수 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그러글 군단이 보였다.

‘확실히 저것들이라면…….’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병력과 절대적인 무력.

육망교와 그들이 수족 부리듯 부리는 몬스터에게 대항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건룡을 잡기 위해선 놈을 상회하는 무력이 필요하다.

「저 그러글을 내게 주겠다는 건가?」

「더 줄 수도 있어. 대륙 곳곳에 흩어진 우리의 허물을 전부 이리로 모으고 있거든. 꺄르륵!」

「그런데 말이야, 내가 저것들을 어떻게 통제하지?」

고병갑은 별생각 없이 질문했다. 그런데 도리어 놈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 못해?」

「당연히 못하지. 내가 무슨 재주로 저 무지막지한 것들을 다룬단 말이야?」

「…….」

놈이 몇 초간 뜸을 들였다.

「잠깐만.」

그러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고병갑이 그렇게 느낀 이유는, 좀 전까지 대화하던 그러글의 이목구비가 감자처럼 뭉그러졌기 때문이다.

대략 2, 3분 시간이 지났다. 그러글의 면상에 다시금 눈과 입이 생겨났을 때 고병갑은 놈이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놈이 말했다.

「저것들을 다루는 힘을 주면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구해다 줄 수 있다는 거지?」

「시도는 해 볼 만하겠지.」

「그렇다면 우리 중 한 조각을 너에게 주겠어. 우리 중 하나가 무(無)로 소멸한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반드시 마드무트의 몸뚱이를 가지고 와야 해!」

「흥! 어차피 내가 아니면 네놈들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 거 아닌가?」

「끙… 우리를 시험하려 들지 마! 마드무트를 꼭 잡아 와야 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하지.」

‘어차피 내가 살려면 그래야 하니까.’

눈앞의 그러글이 한 점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주먹 크기만 한 구체가 되었다. 시커먼 아우라가 풍기는 구체.

고병갑은 앞의 대화 상대가 곧 소멸함을 직감했다. 그랬기에 서둘러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지. 혹시 몇 달 전에 죽었던 나를 되살린 게 너희냐?」

「맞아, 너는 특별하니까 마음대로 죽게 둘 수 없어. 꺄르륵!」

「…살려 줘서 고맙다는 말은 해 두지.」

구체가 고병갑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흡사 영혼과 동화하는 것처럼 몸속으로 흡수됐다.

‘힘이…….’

고병갑은 몸으로 차오르는 가공할 힘을 느꼈다. 그것은 카르마나 내력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손가락 끝을 타고 피어오르는 거뭇한 연기를 빤히 들여보았다.

‘이건…….’

<악마의 힘이로군.>

내면에서 불쑥 랜드리올이 튀어 올랐다. 고병갑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감각은 실로 오래간만이구나.>

‘이봐, 랜드리올. 이 힘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겠지. 세계의 섭리와 법칙을 역행하여 기이한 일들을 벌일 수 있을지어다. 주술과는 또 다른 형태로 말이야.>

‘그럼 나도 고대의 상점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건가?’

<고대의 상점은 짐의 일생일대의 역작이다. 네놈의 알량한 상상력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랜드리올은 바로 이어 말했다.

<그 힘을 남용하지 말아라. 유한한 것이며 충전되지도 않느니라. 꼭 필요할 때를 위해 기다려.>

‘그러도록 하지. …다시 잠들 건가?’

<그래, 노곤하구나.>

랜드리올은 이내 존재감을 감추었다.

고병갑은 들판을 가득 채운 그러글 무리를 바라보았다.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러글은 154,762마리였다.

그리고 이것의 20배는 되는 그러글이 발타드렌을 향해 사방 곳곳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러글들을 향해 작게 읊조렸다.

「모여라.」

그의 한마디에 십오만이 넘는 그러글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바위처럼 가만히 있던 그러글들이 갑자기 움직이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고병갑은 손을 들어 보이며 문제없음을 알렸다.

고병갑은 지체 않고 지구로 통하는 거대한 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러글들에게 본인의 개념을 전달해 보냈다.

「고블린과 일루미션이 아닌 인간을 제외하곤 모두 먹어 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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