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적의 적은 아군
“후우…….”
고병갑은 생수 반 통을 단번에 비워 냈다. 남은 반을 서시희에게 건넸는데, 그녀는 귀신처럼 고개를 축 늘이고 있다가 더듬더듬 받아 들었다.
“많이 힘든가 보지?”
“…….”
서시희의 머리통이 짧게 떨렸다. 고병갑은 몇 초의 딜레이를 겪은 후에야 그게 ‘끄덕임’의 의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까닥이는 것도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하기야, 그녀가 보여 준 위용은 신기에 가까웠다. 고작 5분 만에 세상의 전경을 변화시키다니.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도 서시희와 비교하면 굼벵이만 못할 것이다.
고병갑은 잠시 서시희를 내버려 두기로 하고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협곡이었다. 북한에서 봤던 협곡을 장난감 모형으로 변모시킬 만큼 광활한 협곡.
“제기랄, 여기가 대체 어디야?”
“…그랜드.”
“뭐? 방금 뭐라고 했어?”
서시희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이에요.”
“그랜드… 캐니언? 그러면 여기가 미국이란 말이야?”
“그렇겠죠. 그랜드 캐니언이 한국이나 루마니아에 있지는 않을 테니까.”
“참,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해외여행을 하는구먼.”
“끄응.”
서시희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병갑이 들리지 않게 혀를 차며 만류했다.
“그냥 앉아 있지 그래. 아무리 놈이라도 여기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생각보다 쉽게 포기했고,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놈이에요. 전생에서 봤던 것과 똑같네요.”
“신성 전사를 말하는 건가 보군.”
“신성 전사?”
“아, 당신한테 말을 안 했던가.”
고병갑은 신성 전사의 어원에 관해 짧게 들려주었다. 서시희는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아듣는 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병갑은 계속 말했다.
“마드무트를 저지하려면 신성 전사를 여섯이나 잡아내야 하는데… 좀전의 상황을 보면 엄두가 나질 않는군.”
서시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병갑은 그게 불만이어서 곧장 말했다.
“당신은 저번 생에서 저놈들과 싸웠을 거 아냐. 심지어 마드무트까지 잡아냈지. 놈들을 때려눕히는 기가 막힌 노하우 같은 거 없어?”
“물론 있죠.”
“있다고? 그게 뭔데?”
고병갑이 잔뜩 들떠서 물었다. 서시희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선 지구에서 가장 강한 헌터 4만 명을 꼽아 내세요. 그리고 그들에게 마약성 진통제와 각성제를 무한정 보급해 주며 싸우게 시키면 돼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놈들을 상대하는 일에 묘수 같은 건 없어요. 막대하고 절대적인 희생만이 있을 뿐이죠. 난 솔직히…….”
그녀가 머뭇거리다가 번뜩 말했다.
“놈과 재회하니 현실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에요. 당신이 모은 오합지졸의 병력을 가지고 저것들에 어찌 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병갑은 혓바닥에 감도는 쓴맛을 삼켰다. 여기다 대고 ‘고블린들은 신의 천적이다.’ 같은 폼 나는 말을 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다시 한번 고건룡을 기습해 보는 편이 나을지도.”
“일단 좀 쉬다 돌아가자고. 여기서 우는소리 늘어놓아 봤자 바뀌는 게 없으니까.”
“알겠어요.”
그랜드 캐니언에 밤이 내렸다. 기력을 회복한 서시희가 고병갑을 태우고 날아올랐다. 그들은 브라질로 돌아가는 대신 서시희가 미국에 뚫어 놓은 포탈로 향했다.
천만다행으로 포탈은 건재했다. 다만 하남과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포탈 너머는 강원도 삼척의 어느 민가였다.
포탈을 넘자마자 몬스터가 보였다. 놈들은 일루미션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고병갑에게 덤비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니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퀘에엑―끅!”
그래 봤자 하위 몬스터였기에 간단히 처리했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안도를 느껴야 할지 낙담을 느껴야 할지 고민했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 이젠 자잘한 하위 몬스터들까지 거리를 활보하는구나.’
그 많던 사람들이 정말로 다 죽은 것일까? 어쩌면 저 아랫지방으로 피난한 이들이 똘똘 뭉쳐 항전하고 있진 않을까?
서시희의 힘을 빌려 아랫지방에서 난민 구출 작전을 벌여 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병갑은 이내 마음을 접었다. 문제는 아스빌람의 수용력이었다.
현재 아스빌람은 1만 2천 명이 좀 넘는 주민을 감당하는 것도 벅찼다. 얼마 전까지도 기근 아닌 기근을 앓다가 겨우 안정을 찾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몇천 명을 더 들인다? 아스빌람은 틀림없이 파산할 것이다.
고병갑은 부디 사람들이 자력으로 버텨 주었으면 했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서울로 돌아갔고, 적당한 곳에서 아스빌람에 복귀했다.
그들이 돌아오길 목 빠지게 기다리던 이들은 두 사람이 팔다리 성하게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로드시여,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별일 없으셨나 보군요.」
「그래, 보는 대로 괜찮다. 아스빌람이야말로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냐?」
「그러글 떼가 한 차례 몰려왔습니다만, 인간들과 힘을 합쳐 격퇴했습니다. 부상자가 좀 있긴 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부상자가 나왔다고? 그러글한테?」
도르마는 송구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예,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강력한 것들이었습니다.」
「염병, 바깥은 몬스터가 지랄이고 여긴 그러글이 지랄이네. 그래도 죽은 사람이 없다니 다행이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고병갑은 회의를 소집했다.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였고, 고병갑은 밝혀낸 정보를 그들에게 알렸다.
그 후 여섯 신성 전사를 어떻게 잡아낼 것인지에 대한 대책 토론이 이어졌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명쾌한 해답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일루미션 작당도 어찌 못하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에 있는 괴물 놈들을 우째 잡습니꺼?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지예.”
한창훈의 말대로였다. 제집 앞마당에 붙은 불을 끄는 것도 벅찬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 * *
일루미션 소탕 작업은 계속됐다. 놈들은 살인귀처럼 사람을 잡아내더니 정말로 귀신이 돼 버린 듯했다. 고병갑 일행이 지구로 넘어오면 5분도 지나지 않아 벌떼처럼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날이 갈수록 전투가 치열해졌고, 부상자와 사망자도 속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제까지 밝혀낸 열두 근거지 중 여덟 장소나 파괴했다.
서시희와 23명의 S급 헌터의 공이 컸다.
「모두 피해라!」
「예!」
고병갑의 지시에 고블린들이 부리나케 흩어졌다. 곧 굉음과 함께 성북구의 모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 아래에 있던 사람과 몬스터는 잔해에 깔려 으스러졌다. 고병갑 일행은 신속하게 자리를 이탈한 뒤 아스빌람으로 피신했다.
그들을 뒤쫓던 일루미션은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스빌람으로 복귀한 인원은 즉시 인원 파악에 나섰다.
A급 이하 헌터 120여 명을 대동했는데, 이번 작전으로만 17명이 죽었다. 중상자도 수두룩했다.
“니미럴!”
한편에선 정선경이 애꿎은 땅에 분풀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간 것이 무척이나 분한 모양이었다.
“이 쌍것들. 점점 더 독해지네요.”
“하기야 그네들도 오지게 죽었으니 독기가 오를 대로 올랐겠죠.”
“이제까지 죽은 사람을 다 합하면 일흔 명도 더 넘어요. 이렇게 계속 가다간 얼마 안 가서 S급 미만은 씨가 마를 거예요.”
“그렇다고 저희끼리 하기엔 일이 벅차니……. 그래도 이제 세 군데뿐 안 남았잖아요.”
다른 쪽에선 헌터들이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둥! 둥! 둥!
서쪽 성벽에서 우렁찬 북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향했다. 눈에는 물음표를 두 개쯤 띄우고 있었다.
「이런!」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여덟 고블린이 즉시 뒤따랐다.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북을 울릴 일이 없다. 그리고 아스빌람에서 위급 상황이라 하면 열에 아홉은 그러글이 원인이다.
고병갑은 한달음에 성벽에 오르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위쪽에서 대답했다.
「그러글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수, 숫자가… 대단히 많습니다!」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고병갑은 마침내 성벽의 옥상에 다다랐고, 지그재그로 솟은 요철 너머를 응시했다.
그가 경악했다.
지평선으로 시꺼먼 줄이 있었다. 단어 그대로 시꺼먼 줄이었다.
고병갑은 혹시 지평선 부근에만 밤이 내린 건 아닐까, 라며 행복 회로를 돌렸다. 하나 그것은 실시간으로 가까워지고 있었고, 헛것이 아니라면 그러글이 맞았다.
수천도 우습다. 수만도 우습다. 가늠하는 행위 자체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러글이 발타드렌으로 몰려드는 일은 빈번히 있었다. 하지만 놈들은 평균적으로 나약했고, 기껏해야 백수십 마리의 규모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고병갑은 차라리 같은 규모의 해일이 몰려오는 편이 낫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가 넋을 잃고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들의 우두머리인 쿤타가 저 끝에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오셨구려!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셨겠지?」
「젠장, 저게 다 몇 마리입니까.」
「빌어 처먹을 정도로 많다는 말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소. 어쩔 거요? 저 진군 속도라면 한두 시간 안에 발타드렌에 닿을 텐데!」
고병갑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한발 늦게 성벽에 도달한 헌터들은 저 먼 광경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들의 서로 다른 탄식이 귀를 어지럽혔다. 고병갑은 짜증이 치밀어 버럭 소리칠 뻔하다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생각하고 짜증 내는 시간도 아깝다.
그가 크게 외쳤다.
「부상자 치료를 서둘러라! 전투가 가능한 인원을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전부 집결시켜! 발타드렌에 있는 모든 병력을 집결하라는 말이다! 하피를 솜니움으로 보내라! 최소 인원만 남기고 모두 발타드렌으로 집결하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병갑은 이번에 인간들을 향해 말했다.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비각성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십시오! 그들에게 전투가 있을 거라고 알리세요!”
고병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협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추방할 거라고도 알리십시오.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아, 알겠어요! 일단 그렇게 전해 볼게요!”
“야, 병갑아 너…….”
“괜찮으니까 누나도 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줘. 급해.”
“어, 응. 알겠어.”
인간들을 보낸 후, 그가 성주 쿤타를 보았다.
「쿤타.」
「알고 있소! 모든 정령을 불러 모으겠소. 육시랄! 저 잡것들은 왜 자꾸 몰려오는 건지!」
모두에게 지시를 내린 후 고병갑은 눈에 불을 켜고 저쪽을 쏘아보았다.
왜 항상 거지 같은 한 번에 밀어닥치는 것일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글은 나약해. 여기엔 서시희도 있고 SS급 전력도 많다. 저따위 덩어리들에게 당하지 않아.’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발타드렌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해졌다. 인간, 고블린, 정령을 막론하고 모두가 안색이 새파래져서 전투를 준비했다.
우려와 달리 인간들은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당 그래야 했다. 이제까지 먹여 주고 재워 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무기고를 개방했음에도 무기가 턱없이 모자랐다. 몇몇은 삽이나 괭이 같은 농기구를 쥐고 광장으로 밀집했다.
그렇게 모은 병력은 총 7천여 명이었다. 7천 중 태반은 하위 각성자급의 전력이었다.
비전투 인원들까지 달라붙어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들은 물을 끓이고 돌멩이 따위를 주워 모았다. 농성을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러글은 1킬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빛의 정령들이 발광체를 만들어 전장을 밝혔다.
그러글은 정말 질릴 정도로 많았다. 등줄기를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놈들의 생김새였다.
개중에는 어마어마할 만큼 덩치가 큰 것들도 있었다. 지난번 정령들과 합심해 해치운 ‘티탄’에게도 충분히 비견됐다.
꾸역꾸역 긁어모은 7천여 병력이 들판으로 나섰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이들은 후위에 물러섰고, 전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징글징글하게 많군요.」
「너희는 영혼과 동화해라.」
「예!」
고병갑이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전원!! 전투 준비!!」
그가 내력을 잔뜩 발산하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평야를 몇 번이나 울렸다.
고블린들과 인간들은 기합을 지르며 무기를 뽑았다.
이곳의 상황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 같았다.
“당신이 활약해 줘야 해. 부탁할게.”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고병갑은 지척에 선 서시희에게 말했다.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할게요.”
“고마워.”
고병갑은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악을 담아 외쳤다.
「전원 돌격!!」
「으아아아!!」
「하아아!!」
7천여 명의 병력이 들판을 가로질렀다. 대군이 발을 구르자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떨렸다.
고병갑은 가장 선두에서 달리며 다짐했다. 저 그러글 중 3할은 자신이 베어 버리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1분 뒤, 고병갑은 생각을 싹 고쳐먹어야 했다.
「어?」
“저… 저 무슨?”
「저게 뭐 하는 거냐?」
“이게 뭔…….”
돌격하던 대군이 뜀박질을 멈추었다. 그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십수만쯤 되는 그러글이 일제히 손을 올려 ‘X’ 자를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