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고병갑은 공간계 능력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도 자신만의 아공간-아스빌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가 보유한 능력은 여타 공간계 능력자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래도 꽤 훌륭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했다.
다만 서시희와 비교했을 때 초라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시희는 공간 계열 능력자 중 단연코 최강이었다.
자신만의 아공간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공간을 직접 조작하여 공격이나 방어를 할 수도 있다. 또한 포탈이라 불리는 고차원 통로를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조심히 갔다 와.”
“그래요. 두 분 모두 무사히 돌아오셔야 해요.”
고병갑과 서시희가 헌터들의 배웅을 받았다.
한편에는 고블린들도 있다. 고병갑은 부하들과 한마디씩 인사를 나눈 뒤 도르마에게 말했다.
「도르마,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임시 로드다. 아스빌람을 잘 관리하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모쪼록 로드께 폐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늦어도 내일 저녁 전까지는 복귀할 예정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십시오.」
「로드, 다녀오세요!」
두 사람은 아스빌람을 나섰다.
이제 저녁때가 막 지났을 뿐인데도 서울은 칠흑 같았다. 인간의 손길을 받지 못한 문명이란 이렇듯 암울한 것이었다.
“포탈을 뚫어 놓은 곳까지 이동해야 해요.”
“어디라고 했지?”
“그렇게 멀지 않아요. 하남 인근의 야산이에요.”
“…열나게 뛰어가면 2시간쯤 걸리겠군.”
“날아가면 금방이죠.”
서시희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잠시 후 그녀는 거대한 드래곤으로 완벽히 변태했다.
‘볼 때마다 털이 쭈뼛 서는구먼.’
기다란 목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고병갑은 그것을 밟으며 등에 올라탔다. 서시희는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포탈이 훼손됐으면 어쩌지?”
“그럼 어쩔 수 없는 거죠.”
“다시 뚫을 수는 없는 건가?”
“무슨 게임처럼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지금부터 말을 하지 않을 거예요. 병갑 씨도 기척을 최대한 감추도록 하세요.”
“알겠어.”
서시희는 구름 위까지 상승했다. 눈이라도 쏟을 듯 우중충하던 하늘이 깨끗한 까만색이 되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방향을 가늠하다가 이내 비행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남까지는 금방이었다.
두 사람은 적막이 감도는 야산에 착륙했다. 그 뒤로 대략 15분 정도 거닐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했어요. 다행히 포탈이 훼손되지 않았네요.”
“여기라고?”
고병갑은 눈을 크게 뜨고 사위를 훑었다. 아까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야산이었다.
서시희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올렸다. 그러자 두 그루의 나무가 빛의 선으로 이어지며 전혀 다른 공간을 비추었다.
“넘어가도록 해요.”
“그러지.”
그들이 포탈을 넘었다.
저녁이던 한국과 달리 이곳은 일출이 얼마 지나지 않은 아침이었다. 고병갑은 후덥지근한 공기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졌다.
“후아, 덥구먼. 그나저나 당신은 해외여행 갈 때 편하겠네. 돈도 안 들고 말이야.”
고병갑이 농담 삼아 던졌다. 서시희는 그런 우스개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주변을 살피는 데만 급급했다.
“잘 넘어온 것 같네요. 여긴 브라질 최남단, 우루과이와 국경을 맞댄 접경지예요. 우리는 날아서 아르헨티나까지 갈 거예요. 바로 가죠.”
“당신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뭘 했다고 쉬겠어요. 시간만 아까울 뿐이죠.”
그녀가 다시금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두 사람은 지상에서 관측하지 못하도록 까마득한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점으로 보일 높이다.
이어선 지루한 비행의 연속이었다. 고병갑은 지상을 관측해 보려 시도했으나, 저쪽에서 이쪽이 안 보이는데 이쪽에서 저쪽이 보일 리 만무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보였다. 땅에서 시작돼 하늘에 닿는 저 푸른 기둥만은.
‘역시…….’
고병갑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며칠 전, 서시희와 둘이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고건룡을 추격하던 당시를 상세히 들려주던 중이었다. 그때 흘러가는 말로 ‘푸른색 기둥’이 언급됐다.
푸른색 기둥. 그것은 고병갑도 목격한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 기둥이 솟은 장소에서 신성군과 전투를 벌였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푸른 기둥의 정체에 대한 쪽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의 역할은 또 무엇인지,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그때 도와준 이가 랜드리올이었다.
<마드무트가 이곳에 천상계를 구성하려 든다고 했나?>
불쑥 말을 걸어온 랜드리올. 고병갑은 그에게 이제까지 밝혀낸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랜드리올은 만 하루의 시간 동안 침묵했고,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그렇군. 이제야 꼬인 줄이 풀렸도다.>
그렇게 서두를 튼 랜드리올. 다음 내용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스빌람에 악마가 창궐한 이래 마드무트는 꽁지를 빼며 달아났다고 들었다. 놈은 지상의 아인을 모두 이끌고 차원을 넘었지. 의아하더구나. 왜 저 혼자 내빼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줄줄 단 것일까? 놈이 피조물에게 애정이 있어서? 흥!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그렇다면 정령들은 왜 내버려 두었지?>
<나는 이 문제로 줄곧 고민했다. 하나 마땅한 결론이 나오지 않더군. 그런데 천상계를 재구성한다는 말을 들으니 감이 잡히더구나.>
<무릇 세계에는 네 개의 층이 있다. 지하, 지상, 영, 그리고 천상. 그것들은 건물의 1층, 2층 같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하여 서로 다른 계층을 오가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지. 특히 마드무트처럼 신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면 소요되는 에너지가 곱절로 비대해진다.>
<왜 마드무트가 신성 전사 일곱을 잃은 뒤에야 지상으로 강림했겠는가? 놈은 자신의 힘이 유실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게야. 한마디로 겁쟁이라는 소리지.>
<한 세계의 층계를 오가는 데도 막대한 에너지가 유실된다. 하물며 차원을 넘나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드무트가 반쪽이 된다고 해도 영 못 믿을 일은 아닐지어다. 그러니 놈은 자신의 힘을 담아 둘 그릇이 필요했던 게야. 그 그릇이 바로 지상의 아인들이고! 그렇다면 정령을 제외한 이유도 설명된다. 정령은 기본적으로 영체이기에 그릇으론 적합지 않지.>
<…왜 네놈들에게서 마드무트의 기운이 느껴지는가 했더니 그런 까닭이던 게야. 네놈들은 마드무트의 힘을 ‘카르마’라고 부른다지?>
<어쨌든 마드무트의 최종 목적은 지구에 천상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듣자 하니 수십억 인간의 생명 에너지를 소모해 천상계를 만든다는 것 같더구나. 아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천상계를 만드는 것과 거기에 오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 장담컨대 현재의 마드무트는 절대 제힘으로 천상계에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딴 거추장스러운 일을 벌이는 거겠지.>
<괴물들이 밀집한 곳에 푸른 기둥이 생성되고, 푸른 기둥에서 신성군이 나온다고 했나? 당연히 그럴지어다. 애당초 그럴 목적으로 아인들을 끌고 왔을 테니까.>
<푸른 기둥은 사다리요, 신성 전사는 마드무트를 떠받쳐 천상으로 올려 줄 일꾼이로다. 그리고 너희가 몬스터라 부르는 아인은 신성군을 불러내기 위한 제물이고.>
<마드무트를 저지하려거든 신성 전사부터 잡아 족쳐야 하느니라.>
<명심해라. 남은 신성 전사를 여섯이다.>
랜드리올은 그 말을 남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병갑은 그를 깨우려 안간힘 썼지만 랜드리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랜드리올은 현재까지도 수면 중이었다.
요즘 들어 그가 잠드는 빈도와 시간이 부쩍 늘었다. 고병갑은 그게 은근히 신경 쓰였다.
뭐가 됐건 랜드리올의 추측은 아주 그럴듯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앞으로 신성 전사를 여섯이나 더 쓰러뜨려야 한다는 거지. 그것도 온전한 상태의 놈들을…….”
고병갑은 솔직히 그럴 수 있을지 의심됐다.
한 놈, 그것도 죽었다 되살아나느라 좀비나 다름없던 알샤론을 처치하는 데도 무지막지한 피해를 받지 않았던가.
이런 상황에서 온전한 신성 전사를 잡을 수 있을까?
‘…낙심하지 마. 내 부하들에겐 신을 죽이는 피가 흐른다.’
고병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을 굳혔다. 애송이처럼 발을 동동 굴러 봐야 짜증만 늘 뿐이니까.
그때 서시희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렸다.
<저기인 것 같아요.>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기둥 지척까지 다다랐다. 처음 브라질로 넘어왔을 때는 아침이었으나 어느덧 느지막한 오후가 돼 있었다.
고병갑은 몸을 일으켜 기둥을 바로 보았다.
‘더럽게 크구먼.’
말이 기둥이지… 어지간한 아파트 단지에 비견될 규모였다. 저것의 횡단면에서 축구를 해도 세 팀은 더 하리라.
<타격해 보겠어요. 꽉 붙잡으세요.>
“알겠어.”
서시희가 몸을 곧게 세웠다. 고병갑의 시선에서 보면 세상이 90도만큼 돌아간 듯했다.
그녀의 거대한 입으로 아득한 열기가 모여들었다. 이윽고 업화의 불꽃이 대기를 달구며 뻗어 나갔다.
콰쾅!
불꽃과 기둥이 충돌했다. 자욱한 연기와 함께 푸른 파편이 마구잡이로 튀겼다.
“실체가 있어!”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푸른 기둥은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타격으로 손상을 주는 것도 가능했다.
말인즉, 어쩌면 신성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그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고병갑과 서시희는 이것을 확인하러 먼 길을 나섰던 것이다.
“몸을 바르게 돌려줘. 내력이 통하는지도 알고 싶어.”
<알겠어요.>
서시희가 몸통을 다시 90도만큼 돌렸다. 곧게 선 고병갑은 검을 뽑아 들고 내력을 집중시켰다. 곧 어마어마한 힘이 칼날로 결집했다.
“하압!”
그가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날렵하게 날아가 푸른 기둥과 격돌했다.
콰장창!
“그렇지!”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검기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기둥은 온 사방으로 파편을 뿌려 댔다. 그 모습이 흡사 피를 뿜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래 봤자 500년 묵은 거목에 도끼질 한 번 한 꼴이다. 그래도 괜찮다. 500년 묵었건, 1,000년을 묵었건 같은 자리만 조지다 보면 결국 꺾이기 마련이니까.
“여기까지 온 김에 이 기둥을 박살… 음!? 야… 야야!!”
고병갑이 기겁하며 아래를 보았다. 무성한 구름에 가려 지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이 미친 듯이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무언가 오고 있다. 거대하고 꺼림칙한 무언가가!
“당장 도망쳐야 해! 뭔가가―!”
<나도 느꼈어요! 꽉 잡으세요!>
“끄으윽!”
서시희가 몸을 수직으로 세우더니 로켓처럼 솟아올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자욱한 구름을 걷으며 엄청난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보다도 다섯 배는 더 거대한 몸집의 소유자.
그렇다. 놈은 신성 전사였다.
‘이런 미친! 저렇게나 크다고?’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크기에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신성 전사는 날개도 뭣도 없었으나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며 고병갑과 서시희를 맹추격했다.
“쿠우오오오오!!”
신성 전사가 기합을 내질렀다. 놈이 활시위에 카르마 화살을 걸더니 이쪽을 향해 쏘아 보냈다.
한 발의 거대한 화살은 이내 수백, 수천, 수만 발로 분열하며 머리를 덮쳤다.
“크롸라라라!”
서시희는 세차게 꼬리를 휘둘러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궤도가 뒤틀린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고병갑은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신성 전사를 쏘아보았다. 놈이 활시위에 또 한발의 화살을 걸었다.
‘위험하다!’
우주를 떼 온 듯 시커먼 화살.
고병갑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그건 이를테면 죽음이었다.
“젠장할!”
고병갑이 퍼뜩 자세를 잡았다.
“흐아아아!!”
그가 온몸에 있는 내력을 모조리 끌어냈다. 황금빛 내력이 삽시간에 칼날로 모여들었다.
피슝!
바로 그 순간 시커먼 화살이 자신들을 노리고 쏘아졌다. 과장 하나도 없이 남산 타워가 날아오는 듯했다.
고병갑도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하압!”
만다라 기사단의 비술.
여덟 무예 중 네 번째 형식, 폭렬.
폭렬의 기운을 담은 검기가 화살과 맞닿았다. 두 투사체는 아득한 창공에서 억센 힘겨루기를 하였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쾅! 콰광쾅! 쾅!
“끄윽!”
“크롸라라라!”
세상을 희게 물들일 만큼 어마어마한 폭발이 발생했다.
서시희는 폭발에 의해 떠밀렸고, 신성 전사는 폭발에 휩쓸렸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간을 접어 비행하겠어요! 호흡이 불가능할 테니 숨을 참으세요!>
“아, 알겠―끅!”
그녀는 정말로 공간을 접으며 하늘을 질주했다. 그건 말하자면 축천법(縮天法)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5분여 만에 수천 킬로를 주파할 수 있었다. 그리고 5분 뒤, 웬 이름 모를 협곡에 대가리부터 처박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