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첫걸음
한 다발의 검기가 엄한 상가 건물을 때려 맞추었다. 이미 반쯤 무너진 건물은 폭력에 굴복하며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파편이 쏟아지며 굉음을 냈다.
고병갑과 여덟 고블린은 망나니처럼 날뛰었다.
「금방 모여드는군요.」
도르마가 흘끔 뒤를 쳐다보며 주의를 주었다. 고병갑은 칼질을 멈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깜짝 놀랐을 테지.」
「로드. 몇 놈 안 되는데 쓸어버리는 거 어때요?」
「아직이야.」
고병갑은 한창 뛰다가 획 몸을 돌렸다. 회전력을 더해 팔을 흩뿌리자 큼지막한 검기가 방출돼 인근 빌라 건물을 박살 냈다.
허리가 끊어진 건물이 무너졌다. 고병갑 일행을 추격하던 적 몇 명이 산채로 매장됐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해. 위로 가자.」
「예!」
그들은 건물을 계단 삼아 위로, 위로 올라갔다. 어느덧 꽤 불어난 추격자 무리는 서둘러 뒤를 쫓았다.
고병갑은 달리는 와중 틈틈이 주변 기척을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신들을 좇는 추격자들 외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처참하군.’
폐허가 된 서울 거리는 황량했다. 그나마 2주 전까지는 몬스터로 가득했다. 그때 비하면 요즘에는 몬스터조차 많이 줄었는데, 그건 절대 희소식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남하하고 있다는 거니까.’
북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아랫지방으로. 몬스터 군단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 놈들이 정말 군대라도 된 양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순전히 일루미션 때문이었다.
멍청한 무력과 지성을 갖춘 무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여 일루미션만은 어떻게 해서든 뿌리 뽑아야 했다.
「로드시여. 강한 기척입니다.」
「어. 나도 느꼈다.」
자잘한 추격자들 사이로 거대한 존재감이 끼어들었다.
「키리얀.」
「예!」
고병갑이 키리얀에게 눈빛을 보냈다. 키리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끌어냈다. 다음 순간. 추격자들의 발밑으로 전류 송곳이 치솟았다.
“끄아악!” “퀴에에엑!”
일선에서 일행을 쫓던 적들이 바싹 튀겨지며 자지러졌다. 허나 몇몇은 트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력을 높였다.
‘인간이 셋. 몬스터가 둘인가.’
고병갑은 두 마리의 몬스터를 눈여겨보았다. 흑갑을 걸친 유령 기사. 그건 이를테면 악몽이었다.
한 명의 유령 기사가 불길한 아우라를 내뿜었다. 놈이 새카만 장창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고병갑 일행의 발아래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쾅!
건물이 푹 하고 꺼졌다.
「땅으로 내려가!」
「예!」
고병갑의 지시에 고블린들은 서둘러 땅으로 내려갔다. 왕복 8차선의 도로에는 반파된 차량이 즐비했다.
고병갑 일행은 그곳에서 적들과 대치했다.
‘S급 전력이 다섯. 뒤로 떨거지들이 이백쯤인가.’
고병갑은 앞으로 검을 겨누며 일루미션 소속 헌터를 쏘아보았다. 놈들은 인간과 고블린이라는 괴상한 조합이 적잖이 의문인 모양이었다.
“넌 뭐냐?”
어느 남성이 물었다. 거대한 날이 부착된 톤파를 양손에 쥔 자였다.
“왜 우릴 공격하는 거냐?”
“승헌. 저놈 불신자야.”
“불신자라고?”
“저놈이 그놈인 것 같아. 이 일대서 신도들을 해치는 괴뢰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고블린을 끌고 다니지?”
또 다른 사내는 고병갑의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놈 손을 봐. 교단의 증표를 가지고 있어. 아마 우리 신도에게 빼앗은 거겠지. 몬스터를 다루는 방법도 아는 듯하고.”
“긴장해라.”
이번엔 검신이 지나칠 만큼 기다란 환도를 장비한 여성이 앞으로 나섰다.
“저놈이 소문의 그놈이라면 공간계 능력자일 거다. 달아날 틈을 주면 안 돼. 한 번에 끝낸다.”
“오케이.”
“쿠우우우!”
유령 기사 둘이 앞으로 나섰다. 갑옷의 틈새로 새카만 연기가 사납게 피어올랐다.
고병갑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콧방귀 꼈다. 자신과 고블린들의 유대는 이따위 반지가 만들어준 게 아니다.
‘떨거지들이 곧 도착하겠군.’
그가 저 뒤쪽을 흘끔 보며 읊조렸다.
「다들 영혼과 동화해라. 저놈들 먼저 처리하고 뒤따라오는 떨거지들을 정리하자.」
「예 로드!」
「알겠습니다!」
여덟 고블린이 일제히 영혼과 동화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풍기는 아우라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무, 무슨!?”
“미친! 저게 고블린이라고?”
일루미션 소속 헌터들의 안색이 파래졌다. 사방으로 용솟음치는 살기에 피부가 다 따끔할 지경이리라.
「죽여라.」
「케르륵!」
여덟 고블린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두 마리의 유령 기사는 즉시 맞대응했다. 헌터들도 눈을 부라리며 전투를 시작했다.
날붙이끼리 격돌하면 카랑카랑한 쇳소리가 귀를 후벼 팠다. 이따금 튀기는 불똥은 적막한 서울 거리를 수놓았다.
종종 짧고 둔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 적들의 것이었다.
‘우리를 고전케 하려면 유령 기사가 아니라 발록을 데리고 왔어야지. 아니면 머릿수라도 맞추던가.’
유령 기사가 장창을 찌르며 돌격한다. 투르카가 방패를 치켜들며 돌진을 막아선다. 유령 기사가 주춤하자 그 틈을 노리고 창식이 덤벼들었다. 놈은 즉시 몸을 뺐고 창을 회수하며 창식을 반으로 갈랐다.
허나 창식은 갈라져 죽는 대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연기는 눈 깜짝할 사이 유령 기사의 뒷덜미로 응집했고, 창식은 날 선 클로를 휘둘러 놈의 목을 떨쳐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에선 키리얀과 도란이 한 편을 이루어 한 헌터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도란은 춤을 추듯 우아한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공격 궤도는 전후좌우를 막론했다. 도란을 상대하는 헌터는 네 방향에서 칼날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감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키리얀이 전격을 쏘아 보냈다. 헌터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꾸역꾸역 버텨 내다가 한순간 키리얀 쪽으로 달려들었다. 원거리 공격수를 우선 제거할 심산인 것이다.
아쉽게도 그건 오판 중의 오판이었다. 일순 키리얀이 전류로 둘러싸였다. 전격 그 자체가 된 키리얀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사내의 복부를 후려쳤다.
“캬핡!”
왈칵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 사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도란은 그가 몸을 일으키기 전 목을 썰어버렸다.
전투의 형세는 그렇듯 이쪽이 우세하게 돌아갔다. 게다가 일행에게는 힐러 바몬드도 있었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상처가 늘어가는 적과 달리 아군은 언제나 쌩쌩했다.
“저기다!”
“몬스터를 먼저 보내!”
대로변 건너로 이백 가까운 병력이 나타났다. 괴팍한 생김새의 몬스터 떼거리가 우선해서 덤벼들었다.
전장이 난잡해지는 것은 좋지 않다.
「오르카! 도르마! 저것들이 접근하게 두지 마라!」
「예! 우워어어어!」
오르카가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동시에 녀석의 몸이 비대해졌다. 삽시간에 8m급 거인으로 변모한 오르카가 닥치는 대로 팔과 다리를 휘둘렀다. 그 거대하고 괴팍한 난동에 어지간한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도르마의 주술이야 두말하면 입 아픈 수준이다. 그는 그저 조용히 주술 영창을 읊었다. 그러자 적들이 딛고 선 땅이 암흑의 늪이 되어 적들을 빨아들였다. 급이 안 되는 것들은 손도 쓰지 못한 채 늪에 잡아먹혔다.
그나마 탈출한 녀석들은 오르카의 두 주먹에 머리가 으깨져 죽었다.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힌 적들은 등을 보이며 줄행랑쳤다. 겁에 질렸다는 건 나약하다는 것. 고블린들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달아나는 적을 잡아 쳐 죽였다.
“이… 이럴 순 없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고블린 따위에게…….”
광란에 휩싸여 환도를 휘두르던 여인은 온몸이 난자되어 널브러졌다. 고병갑은 그녀의 가슴팍을 단단히 밟고 목에 칼을 겨누었다.
“끄윽!”
“따위가 아니야.”
“뭐라고?”
“저들은 영웅이고 호걸이다. 사람 탈을 뒤집어썼을 뿐인 네놈들과는 근본부터가 달라.”
“대체 무슨…….”
“너희 같은 금수가 상대하기에 1,000년은 이르다는 말이다.”
칼날이 여인의 생명을 꺼트렸다. 이곳에서 허파가 제 작동하는 건 고병갑 일행뿐이었다.
‘아직인 건가.’
고병갑은 표적이 위치한 방향을 빤히 응시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펑!!!
엄청난 폭음과 함께 하늘로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몇 초 뒤엔 끓는 열기가 건물 사이사이로 뻗어 나왔다.
투르카가 얼른 방벽을 생성해 아군을 감쌌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다. 너희는 괜찮으냐?」
「예. 바몬드가 모두 치료해주었습니다.」
전투 중에 사소한 상처를 얻은 녀석도 있었으나 그마저도 바몬드의 치유술로 말끔해졌다.
고병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잘했다. 그래도 아직 동화를 해지하지…….」
-지직!
그가 말을 끝맺기 전에 허리춤의 무전기가 음성을 뱉었다. 고병갑은 얼른 그것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잠시 후. 무전기가 서시희의 목소리를 송출해주었다.
-여긴 침투조. 표적을 성공적으로 파괴했습니다. 추적을 따돌린 뒤 아스빌람으로 복귀하겠습니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고병갑은 무전기를 다시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말했다.
「다들 동화를 풀어라. 복귀하자.」
* * *
이번 작전은 대성했다. 한 사람의 인명피해 없이 일루미션의 본거지 한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영혼과 동화를 취했던 고블린들은 그 반동으로 반나절 간 앓아누워야 했다.
작전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연회를 벌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천리 행군에서 고작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고병갑과 헌터들은 같은 방식으로 일루미션의 근거지 몇 곳을 더 털었다. 하지만 놈들도 마냥 바보 천치는 아니었다.
다시금 서울로 일루미션 패거리와 몬스터가 집결한 것이다.
한 번은 놈들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받을 뻔했다. 고병갑과 헌터들은 당분간 숨죽이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판단했다.
고병갑은 지구의 혼란을 잠시 잊고, 아스빌람을 가꾸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12월도 열흘쯤 지나갈 때였다.
일부 고블린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의 굽은 등이 곧게 펴지고 추한 이목구비가 반듯해졌다. 전체적으로 ‘사라온’의 이미지와 흡사하게 변모한 것이다.
이를테면 0.7 사라온이라고나 할까?
그 현상은 아스빌람에서 오래 잔류했던 고블린에게만 나타났다. 새로 들어온 고블린들은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고병갑은 간만에 솜니움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솜니움으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고붕이가 달려나와 반기었다.
「로드시여!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어. 간만이다 고붕아. ……역시 너도 좀 변했구나.」
고붕이는 고병갑이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녀석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적였다.
「예. 솜니움의 고블린들은 전부 변했습니다.」
「흠.」
고병갑은 계몽의 씨앗을 심어놓은 장소로 향했다. 새싹이 올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어엿한 묘목이다.
‘역시나 이게 자라면서 고블린들이 옛 모습에 가까워지는가 보군.’
「앗! 로드시여 안녕하십니까.」
옆을 지나던 노멀 고블린이 불쑥 인사를 건넸다. 고병갑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쪼꼬미 녀석들도 더는 쪼꼬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체구는 홉 고블린만큼 커졌으며 말투며 행동거지도 의젓해졌다.
이건 분명히 좋은 신호지만, 마음 한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싹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고블린들의 엉뚱하고 멍청한 매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도 살아가려면 멍청한 것보단 똑똑한 게 나을 테니까.’
고병갑은 시원섭섭한 감정을 담배 연기에 담아 흘려보냈다.
「야, 고붕아.」
「예 로드시여. 말씀하십시오.」
「저 싹이 완전한 나무가 되면 너희도 랜드리올이나 다른 사라온들처럼 싹퉁바가지 없이 변하려나?」
「…….」
고붕이가 큰 눈을 끔뻑이며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얼마간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로드시여. 실제로 저와 동족들은 이제까지 오며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뭔데?」
「로드께서 저희의 로드라는 것 말입니다!」
「…….」
이번에는 고병갑이 눈을 껌뻑거렸다.
「로드께선 이제까지 저희를 잘 이끌어주시고 잡아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로드께서 저희 곁에 있으시는 한 저희가 엇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또 저희는 로드께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어느 먼 훗날 로드가 떠나가시더라도 저희는 로드의 유지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흐흐!」
고병갑이 피식 웃었다. 그가 고붕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새끼. 말 예쁘게 하네?」
「히히히.」
「나 떠나가거든 네가 로드 해라.」
「히히. 좋습니다!」
「이놈 이거 은근히 권력 욕심이 있단 말이야. 킥킥!」
고병갑은 더는 걱정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스빌람에서의 하루가 또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