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뜻밖의 재회
「끌어라!」
고병갑이 선창했다.
「당겨!」
「허이야!」
“으자자자!”
수십의 고블린, 거기에 더해 힘깨나 쓴다는 헌터들은 각자 쥔 밧줄을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주둥이 끝부터 꼬리 끝까지 15미터도 더 넘을 거대 생명체가 질질 끌려왔다. 바닥의 쓸린 자국을 따라 붉고 긴 선이 생겼다. 환부에서 쏟아진 피다.
「그러글이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왔어!」
「접근하게 두지 마라!」
쿤타가 정령들을 지휘했다. 불의 정령들이 일제히 화염을 쏟아 냈다. 이윽고 거대한 불의 장벽이 나타나 놈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사이 드래곤은 성 내로 옮겨졌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에야 한차례 소란이 가셨다.
고병갑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드래곤의 상태를 재차 살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것은 만신창이였다. 성질 나쁜 개가 마구 물어뜯어 놓은 인형 같았다.
고병갑은 서둘러 힐러를 불러 모아 드래곤을 치료하게 했다. 그들은 얼떨결에 협조하긴 했지만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이… 이게 대체 뭔데 이캅니까? 몬스터 아니라예?”
“서시희 씨입니다.”
“뭐라꼬예!?”
“일단 치료에 집중해 주십시오. 죽게 둬선 안 됩니다.”
“아, 알겠십니더.”
크레이터처럼 파인 육신이 차츰 회복됐다. 고병갑은 노심초사한 마음에 경단과 포션도 한 소쿠리나 들고 와서 때려 먹였다.
갖은 정성을 쏟았지만 서시희는 깨어나지 않았다. 고병갑은 일단 그녀를 양지바른 곳까지 끌고 갔고, 주변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그로써 달밤의 소란이 일단락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이튿날 느지막한 오후였다. 드래곤이 거대한 몸을 꿈틀거리자 주변을 지나던 고블린들이 단체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일부는 화들짝 놀란 와중에도 자신의 로드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고병갑은 서둘러 그녀를 옮겨 뒀던 장소로 향했다. 멀리서 봐도 저쪽 상황은 좋지 않았다.
드래곤, 그 거대한 생물체는 비늘을 잔뜩 세우며 고블린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고블린들은 감히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어이!”
끔찍한 사달이 나기 전, 서둘러 드래곤의 이목을 끌었다.
서시희가 고개를 획 돌려 고병갑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매서운 기세가 한층 누그러진 기분이었다.
고병갑은 드래곤과 마주 보고 섰다. 당최 무슨 말로 서두를 터야 좋을까? 그는 잠시 뜸을 들여야 했다.
“당신이지? 당신 맞지?”
“크르르…….”
으르렁거리는 것도 잠시, 끔찍할 만큼 거대한 도마뱀은 이내 인간 여성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구경꾼 여럿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서시희는 고병갑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는 당황스러운 것이었고,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실패했어요.”
고병갑은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는…….”
“이봐, 우선 진정해.”
“인류는 이제 멸망할 거예요.”
고병갑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내뱉은 말이 판사의 입에서 나온 사형 판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심란한 마음을 감추며 허공에다 말했다.
「도르마, 거기 있냐.」
「부르셨습니까.」
도르마가 검은 안개를 걷어 내며 걸어 나왔다.
「사람들을 불러. 당장 회의를 소집해라.」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고병갑은 서시희를 데리고 일단 식당으로 향했다. 에아에게 부탁해 간단하게 식사를 차렸다. 하지만 서시희는 의욕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먹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먹어. 당신이 피를 얼마나 쏟았는지 알기나 해?”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거예요. 이젠 막을 수 없어요.”
“어휴, 알았으니까 먹기나 하라고.”
그가 감자 한 덩이를 억지로 손에 쥐여 주었다. 감자는 서시희 손에서 처참히 으깨졌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고병갑은 문득 그녀의 곁이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당신이 데리고 다니던 아이들은…….”
“죽었어요.”
그녀가 흐느꼈다. 그런데 고병갑은 그녀에게서 슬픔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웠다. 슬픔보다는 오히려 공허함에 가까웠다.
“고건룡이 죽였나?”
“베타와 오메가는 놈에게 죽임당했어요. 알파는 나를 데리고 탈출하려다가 리미트를 해지한 반동으로 죽었죠. 결국 그 아이들은 나로 인해 개죽음당한 거예요.”
“거 참, 유감이군.”
“그 조그만 것들은 다 죽었는데 나는 이번에도 혼자 살아남았어요. 살아남아서 추하고 더럽게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나는… 나는 도대체…….”
고병갑은 짧게 혀를 찬 뒤에 고개를 들었다. 에아가 큰 눈을 껌뻑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아, 이거 다시 치워 줘.」
「네? 하지만 저 여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걸요.」
「됐어,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들 입에도 안 댈 테니까.」
「그나저나 좀 달래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울고 있어요.」
고병갑이 서시희를 흘끔 흘겨보았다. 그러곤 씁쓸한 어투로 말했다.
「달랜다고 될 게 아니야.」
서시희는 끝내 감자 한 알도 먹지 않았다. 고병갑은 그녀를 데리고 회의장을 찾았다. 도르마의 부름을 받은 인원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서시희가 장내로 들어서자 헌터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까마득한 선배를 맞이한 새내기처럼 안절부절못하였다. 명색이 S급 헌터가 허둥대며 의자를 빼 주는 모습은 아련하기까지 했다.
물론 정령 쿤타나 고블린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들에겐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진짜 서시희야.”
회의는 누군가의 소곤거림으로 시작됐다.
서시희는 물미역인 양 축 늘어져 의욕이 없었다. 그래도 질문에는 착실히 답변해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만연히 들려주었다. 장대한 서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고건룡과 맞붙었고, 끝내 패배했다. 더 붙일 사족도 없었다.
“고건룡의 능력이 대체 뭡니까?”
서시희가 입을 다물자 호찬명 헌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서시희는 동태 비슷한 눈으로 그쪽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놈은 이렇다 할 능력이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고건룡은 초능력자도, 어떤 특수 계통 능력자도 아니에요.”
사람들이 멍해졌다.
그러고 보면 고건룡에 관한 정보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를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해 주는 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세계 최강의 남자’라는 수식어뿐이었다.
하여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강력한 정신 지배 계통일 거라는 둥, 공간계를 넘어 시공간계 조작이 가능할 거라는 둥.
헌터들이 의아함을 넘어 실망까지 느끼고 있을 무렵, 서시희는 담담히 덧붙였다.
“문제는 그의 카르마예요. 놈이 방출하는 카르마는 아주 농밀하죠. 그리고 무한해요.”
“무한? 방금 무한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고건룡이 단신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다고 하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예요. 게다가 그의 카르마는 무척이나 농밀해서, 작정하고 방어하면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죠.”
“그, 그럼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이번엔 신예지 헌터가 물었다. 서시희는 측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심한 틈을 노려 기습하는 것만이 고건룡을 타도할 유일한 방법이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수법에 두 번이나 걸려들진 않겠죠. 이젠 나도 이렇다 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네요.”
회의실로 우울한 침묵이 돌았다. 서시희는 느릿느릿하게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여기 모여서 뭘 하는 거죠?”
“빨리도 물어보는구먼.”
고병갑은 서시희에게 지금껏 있었던 일은 간추려 말해 주었다.
대한민국을 뒤덮은 몬스터 웨이브, 일루미션의 인간 사냥, 그 틈새에서 꾸역꾸역 생존자를 모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시희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떠한 감정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비관적인 어조로 읊조렸다.
“관두세요. 이젠 의미가 없어요. 당신들은 모를 거예요. 저기 바다 건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고병갑은 그녀의 태도가 영 못마땅했다. 다들 살자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데 거기다 대고 관두라니.
밥상에 재 뿌리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가 사뭇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당신은 왜 이곳에 찾아온 거지? 그때 당신의 제안을 거절한 나를 원망하러 온 건가? 아니면 고작 때려치우라는 말을 하려고 그 먼 길을 날아온 거야?”
“그건…….”
“당신도 미련이 남았으니까 넝마가 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을 거 아냐?”
서시희는 뭔가를 말하려 입을 어물거리다가 이내 관두었다. 그녀 스스로도 생각 정리가 안 된 것이다.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이 아니걸랑 우리에게 협력하는 게 어때? 우린 당신의 힘이 절실히 필요해.”
“의미가 없다니까요. 설령 한반도에 있는 일루미션과 몬스터를 전부 몰아낸다 쳐도 바다 건너에선…….”
“젠장,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야. 아니면 두 손 놓고 구경이나 하자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
“…….”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신이라면 마지막까지 발악해야지. 그래야 먼저 갈 애들 볼 면목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서시희가 입술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건너편에서 정선경이 말했다.
“시희 씨, 우리 편에서 싸워 줘요. 우리도 SS급 하나쯤 있어 줘야 그 잡것들이랑 싸울 때 위신이 서죠.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맞십니더. 서시희 씨가 함께해 주시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든든하지예.”
“그래요. 끝낼 때 끝내더라도 싸우다 끝내자고요!”
나머지 헌터들도 정선경의 말에 동조했다.
서시희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어요. 당신들을 돕도록 할게요.”
“당신, 잘 결정한 거야.”
서시희의 합류 소식에 헌터들은 모두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SS급 전력이 아니던가. 그녀는 돈 주고도 못 모셔 오는 고급 인력이다.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그녀를 환대해 주었다. 박수 소리가 만연한 가운데 고병갑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자, 이제 다시 제게 집중해 주십시오.”
‘됐어, 이제 조건이 충족됐다.’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또 한 명 생겼다. 이제 작전을 미룰 필요가 없어졌다.
고병갑은 들뜬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일루미션과 전쟁을 준비해 봅시다.”
* * *
기척 감지와 은폐에 능한 암살계 헌터들을 필두로 며칠간 첩보 활동이 이어졌다.
그들의 임무는 일루미션의 근거지를 찾아내는 것. 그들은 밤낮없이 뛰어다니며 앞으로 공략해야 할 열두 지점을 찾아냈다.
‘아무리 그네가 인두겁을 뒤집어쓴 도깨비 같아도 본질은 사람이다. 구심점을 잃어 와해하면 보잘것없는 개인에 불과해.’
하여 첫 번째 표적으로 점찍은 곳은 동대문에 위치한 디자인플라자였다.
“그럼 건투를 빌지요.”
“조심하십시오.”
“병갑아, 몸조심해라.”
“싸우는 건 누나네인데 왜 내 걱정을 해? 걱정하지 말고 이따 보자고.”
유인조가 적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침투조가 목표물을 파괴한다는, 아주 고전적인 작전.
고병갑은 유인조에 자원했다. 그것도 단신으로 말이다. 23명의 S급 헌터는 모두 서시희에게 붙었다.
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해서 그랬을까? 아니, 그에겐 S급 헌터 못지않은 충성스러운 부하가 있었다.
「얘들아 가자.」
「예!」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역시 너희랑 일할 때 제일 편하단 말이지.」
「저희도 로드랑 함께 있을 때 제일 좋습니다!」
여덟 고블린이 고병갑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그들 모두 고대 영령의 영혼을 취한 장수들이었다.
고병갑 일행은 철저히 은엄폐하며 표적으로 접근했다. 얼마 뒤 표적과 1~2킬로 정도 거리를 남겨 두고 은신했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으며 시계를 보았다. 12시 27분. 작전 수행까지 3분 정도 남았다.
고병갑은 그사이 작전 내용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다들 명심해. 우리의 임무는 적을 섬멸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적을 유인하는 거야.」
「예,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아, 최대한 소란을 떨어야 해. 잠자던 동네 개새끼까지 깜짝 놀라서 뛰어올 정도로.」
「로드! 그건 내가 자신 있어요!」
도란이 의욕적으로 대답했다. 고병갑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마침내 시계가 12시 30분을 가리켰다. 고병갑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자, 난장 한번 까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