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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26화 (126/151)

126화 뜻밖의 재회

매서운 바람이 동토를 다시 얼렸다. 사람들은 시린 손을 겨드랑이에 끼우며 미약한 온기에 매달렸다.

아직 11월 그믐인지라 낮이면 포근했다. 그런데 요 며칠 하늘에 구름이 무성하더니 오늘은 꼭 잿가루 같은 빛깔을 띠었다. 그래서 한낮인 데도 눅눅한 추위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눈이 올 모양인가 본데.”

고병갑은 하늘을 올려 보며 인상 썼다.

무릇 군필 남성이라면 눈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 만무하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제하더라도 이런 때에 내리는 눈은 같은 무게의 휴지 조각보다 쓸모가 없다.

“눈 내리면 빙수 해 먹어야지. 아니다, 설수라고 해야 하려나?”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그런 발상 안 해.”

“아스빌람엔 주전부리가 너무 부족하단 말이야. 아, 달달한 거 먹고 싶다. 파르페 같은 거 있잖아.”

정선경은 고병갑의 딴죽은 가뿐히 무시하며 희망 사항을 줄줄 읊었다. 고병갑은 작게 한숨 쉬며 물었다.

“그래서 몇 놈인데.”

“글쎄다. 셋쯤이려나. 몬스터까지 합치면 열댓 정도 되겠네.”

고병갑도 그녀와 비슷하게 유추하고 있었다. 그가 무너진 식자재 마트의 입구를 지키고 선 사내에게 담담히 말했다.

“안쪽 사람들한테 준비하라고 전하세요.”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사내가 부리나케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얼마 뒤 건너편 대로변으로 사람과 몬스터로 이루어진 집단이 나타났다. 그들은 명확히 이쪽을 째려보고 있었다.

“저 새끼들은 포켓몬 트레이너야, 뭐야. 볼 때마다 기가 차네.”

정선경이 도끼를 고쳐 잡았다. 고병갑도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별안간 적들이 달려들었다. 유추했던 것과 얼추 비슷한 숫자였다. 사람 다섯, 그리고 몬스터 일곱.

고병갑과 정선경은 기꺼이 응수했다. 그들의 흉기가 가차 없이 적의 목을 베었다. 기량 차이가 압도적이었기에 일방적인 살육이 자행됐다.

적들은 뒤늦게 전력 차를 깨닫고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격돌한 순간 솟아날 구멍은 사라진 셈이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을진대 왜 어리석은 싸움을 시작한 걸까? 그건 두 사람이 일부러 기척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적을 섬멸한 후 고병갑은 어두컴컴한 마트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나오십시오. 이제 넘어가야 합니다.”

“아, 예예!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일꾼들이 카트에다 이런저런 물품을 싣고 모여들었다. 통조림 같은 식자재나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이었다.

고병갑은 즉시 아스빌람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일꾼들은 구해 온 물건을 가지고 저쪽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넘겨 보냈을 무렵, 한 방향을 응시하던 정선경이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거지 같은 것들. 하여간 벌떼처럼 몰려드네!”

그녀의 말대로 다량의 기척이 이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놈들은 아주 귀신 같아서 조금만 소란을 피워도 득달같이 몰려온다.

“누나, 우리도 넘어가자.”

“알았어.”

고병갑과 정선경도 문을 넘었다. 일루미션 패거리는 오늘도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을지어다.

* * *

고병갑은 발타드렌에서 가장 높은 성벽에 섰다. 거기에 있으면 아래로 펼쳐진 도시에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새삼 신기하네.’

막 솜니움에서 나와 발타드렌으로 새 터전을 잡았을 때 이곳은 황무지 속 폐하나 다름없었다.

죽은 땅을 개간해 농작물을 심고, 무너진 건물을 철거해 새 건물을 들였다. 정말이지 고블린들과 함께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이런 멋진 도시가 탄생했다. 덧붙여 지금 발타드렌에는 고블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정령도 있고 인간도 있었다.

고병갑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발타드렌 중심가, 그 옆으로 작은 분지가 보인다. 정령들이 사는 ‘인술라’이다.

인술라 옆으로 다시 넓게 성벽이 펼쳐져 있다. 저곳은 인간들이 거주하는 ‘폴리스’이다.

‘어느덧 인간만 9천 명이 넘었구나.’

육망교 놈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판의 날이 있고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고병갑은 지난 두 달간 헌터들과 합심해 보이는 대로 생존자를 거두어들였다.

그 결과 아스빌람에 고블린보다 인간이 더 많아졌다. 현재 고블린의 숫자가 4천 명을 좀 넘기니 두 배도 더 넘는 수치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해도 손색이 없다만, 서울 시민이 천만이 넘는 걸 감안하면 극히 일부이기도 하다.

난민 구출은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고충이 생겼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단연 식량 사정이었다.

“아스빌람은 한 번도 식량난에 시달렸던 적이 없었는데… 어휴.”

인간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한 이래 아스빌람에 비축했던 식량을 모두 풀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지구를 오가며 식량을 공수해 왔다.

농경지를 기형적일 만큼 확장하고, 인간 구성원 중 80% 이상을 농사에 투입하니 그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사실 이마저도 성장의 묘약이 없었더라면 진즉 다 굶어 죽었으리라.

먹고사는 것 외에도 종(種) 간의 갈등, 비협조, 집단 공포와 광기도 고병갑을 힘들게 했다.

다만 그런 문제들은 식량난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선 랜드리올의 조언을 적극 수용했다.

‘혼란을 조성하는 종자가 있으면 관용 없이 내쫓았지.’

자신은 고블린 로드였다. 무조건 인간보다 고블린을 우선순위로 두었다. 공생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으면 피도 눈물도 없이 쫓아 버렸다.

그들은 뒤늦게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선처는 없었다.

이러한 공포 정치에도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랜드리올이 말했던 고병갑의 ‘매력’ 덕분이었다.

물론 이성적인 매력을 뜻하는 건 아니다.

고병갑은 고블린을 다룰 수 있었고, 넓은 영지와 농토를 다스릴 수 있었으며 난민들에게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영향력이 큰 이들과 두터운 친분을 이루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존을 위해 고병갑을 따랐다. 그게 이 작은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현재의 아스빌람은 끓는 주전자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몰라. 보다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할 테지.’

고병갑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담배를 태우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였다. 고병갑의 옆쪽으로 새카만 연기가 작게 소용돌이쳤다. 그 안에서 도르마가 걸어 나왔다.

「로드시여, 여기 계셨군요.」

「어, 도르마. 왜? 나 찾아다녔어?」

「예, 로드께서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시길래…….」

「아!」

고병갑이 이마를 짚으며 비명 질렀다. 그가 반사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야… 미안하다. 깜빡 잊었네.」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로드의 거취를 궁금해하더군요.」

「그래, 얼른 가자.」

「저와 함께 가시지요.」

고병갑은 도르마와 함께 검정 소용돌이에 몸을 실었다. 다음 순간, 그는 발타드렌 중심가의 위치한 의회로 순간이동 하였다.

회의장엔 기다란 테이블이 있었다. 이미 30여 명의 적임자가 착석한 상태였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고블린들은 일제히 일어나 고병갑을 맞이했다.

“야! 너 뭐 한다고 이제 오냐?”

“볼일이 좀 있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 오셨으니 됐지예. 어서 앉으이소.”

고병갑은 테이블에 끝에 앉았다.

인간 24명, 고블린 8명, 정령 1명. 이 범 종족적인 구성도 이제는 익숙했다.

테이블 끝쪽에 앉아 있던 정령 쿤타는 턱을 긁적이며 구시렁댔다.

「한데 나는 왜 자꾸 부르는 거요? 여기 두어 시간 앉아 있은들 달리 할 말도, 들을 말도 없구먼.」

「하하, 그래도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병갑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뭐… 그럼 미리 말해 두겠소. 성 내외 경비 임무는 정령들이 계속 도맡아 해도 괜찮을 것 같구려. 다들 불만도 없고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소.」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이제 난 망부석처럼 있으면 되겠군.」

쿤타가 등받이에 한껏 기댔다. 고병갑은 이번에 인간들을 향해 말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좀 어떻습니까?」

“똑같죠.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큰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른 모두가 그랬듯 차차 이곳 규칙에 익숙해질 테니까요.”

S급 헌터 서한웅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가 아스빌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도르마의 주술 덕분이었다.

언어가 달라도 의미는 통하게 하는 주술이다. 이로써 인간과 고블린 사이 의사소통의 벽이 허물어졌다.

「조금이라도 불순한 종자가 포착되면 누구라도 나서서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피바람이 몰아칠 테니까요.」

“알다마다요.”

「요 근래 분쟁 같은 건 없었지?」

고병갑이 도란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없었어요. 로드께서 괜히 인간들이 사는 곳에 어슬렁거리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애들 불만은 없고?」

「로드가 시켰는데 어느 바보가 불만을 가지겠어요?」

고병갑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이어서 난민들의 근황이나 요구 사항, 식량 사정 따위를 논했다.

그건 서두일 뿐이었다. 회의는 곧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일루미션의 집결지로 보이는 곳을 몇 군데 발견했어요. 그중 여의도에 있는 것이 규모가 가장 크더군요.”

헌터 신예지는 탐색 임무를 맡고 떠나 오늘에서야 복귀했다. 그녀는 자신이 파악한 사항들을 줄줄 말해 주었다.

“슬슬 이쪽에서도 반격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피해 다니기만 해서는 결국 놈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규모의 차이가 너무 커요. 몬스터까지 놈들의 지휘를 받으니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당해 낼 재간이 없잖아요?”

“늑장 부리다가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까지 놓칠 수도 있죠.”

여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여 일루미션을 소탕해야 한다는 강경파.

지금처럼 게릴라 전법을 펼치며 난민 수용을 우선해야 한다는 온건파.

온건파 중에서는 다시

‘그래도 일루미션을 제압하고 고향인 지구를 탈환해야 한다.’는 쪽과

‘그냥 여기서 눌러살면 되지 않느냐? 굳이 지구로의 귀환에 집착할 필요가 있나?’는 쪽으로 갈렸다.

논쟁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고병갑은 빗발치는 의견의 틈새에서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참고로 그의 입장은 강경파에 가까웠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일루미션을 이 이상 활개 치게 놔둬선 안 됐다. 하지만 온건파의 주장처럼 전면전을 벌이기엔 전력이 부족했다.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어도…….’

만약 고병갑과 같은 능력자가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침투조와 유인조로 나누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그런 작전을 벌였다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전멸한다.

이번 회의도 별다른 합일점 없이 흐지부지 끝날 성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고블린 병사 하나가 들어섰다.

「로, 로드시여!」

「무슨 일이야?」

병사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회의실에 있던 전원이 그리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고블린 병사는 몇 차례 숨을 고르더니 간신히 말했다.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괴,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괴물? 그러글을 말하는 거냐?」

「아닙니다. 어… 그… 말로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병갑아. 일단 가 보자!”

「그래.」

고병갑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회의에 참석했던 모두가 그를 따랐다.

그들은 고블린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괴물이 발견됐다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성 내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북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발타드렌의 남문이었다. 남문은 인간들의 거주지와 거리가 상당했으나 구경하러 나온 헌터들로 북적거렸다.

고병갑은 성벽의 요철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다만 밤이라 그런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때 빛의 정령 한 명이 발광체를 띄워 앞을 밝혔다. 발광체는 서서히 전진하며 의문의 덩어리를 비추었다.

마침내 덩어리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성벽에 오른 이들의 입에서 탄식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저, 저게 뭐야? 그러글이라는 것이 아닌데?”

“정말로 몬스터잖아!”

“그런데 만신창이인데요? 가만히 놔둬도 죽겠는데?”

「로드시여, 저건……?」

「위험해 보입니다. 공격합니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

고병갑은 앞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다 별안간 꽥 소리쳤다.

「모두 정지! 저건 적이 아닙니다! 다들 무기를 거둬!」

그가 그렇게 외친 뒤 성벽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 후 덩어리… 아니, 드래곤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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