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25화 (125/151)

125화 어느 한편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명소이다. 특히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저녁 식사를 마친 연인들이 팔짱을 낀 채 데이트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하지만 2026년 10월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아름다운 광장’이기도 한 ‘붉은 광장’은 그저 서늘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오싹한 괴성이 밤을 깨운다. 셀 엄두조차 나지 않는 몬스터 군락이 밤의 고요를 산산이 무너뜨렸다.

광포한 몬스터는 인류가 가꿔 온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묵사발로 만들었다. 붉은 광장에 피범벅인 시체가 시시각각 쌓여 갔다.

“Помоги мне(살려 줘)!”

“О, Боже(오, 주여)…….”

폭력의 파도가 죽음의 해일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목석처럼 무기력하게 쓸려 나갔다. 이 재앙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는 죽음일 듯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 이어 러시아에 벌어진 초대규모의 몬스터 웨이브.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영토에서 가장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26,000피트 고도에서 날고 있는 개인 항공기까지 지상의 비명이 들릴 리 만무했다.

“어휴, 드디어 세 개째네. 대주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난 거야?”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인 아리에나가 노곤한 얼굴로 물었다.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던 고건룡은 심드렁히 답했다.

“당분간은.”

“진짜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니깐. 고생은 나 혼자 다 하고 말이야.”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렇다고!”

고건룡이 시선을 돌려 아리에나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당분간은 일이 없을 테니 휴양이라도 떠나든지 해라. 그래, 체코가 참 괜찮더군.”

“…난 말이야. 대주교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을 하는 건지 가끔 분간이 안 가거든? 그래서 묻는 건데, 방금 한 말은 웃으라고 한 거지?”

“글쎄, 농으로 던진 말은 아니다만.”

“나 참. 이봐, 대주교. 전 세계적으로 난리도 아주 개난리가 났는데 휴양은 무슨 얼어 죽을 휴양이야.”

“그런가.”

고건룡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위스키를 홀짝였다. 아리에나가 끌끌 혀를 찼다.

“그러는 대주교는 앞으로 뭘 할 생각인데? 당신 말처럼 한동안은 달리 집결할 일이 없잖아.”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

“그러니까 뭐냐고, 그게.”

“한국으로 갈 거야.”

“한국? 아아, 당신 모국? 그러고 보니 그 반도를 방주로 삼는다고 했던가. 그것 때문에 가는 거야?”

고건룡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나도 한국이나 갈까.”

“…뭐하러?”

“뭐하러 가긴, 쉬러 가는 거지.”

“휴양지로 그다지 좋을 것 같진 않군. 지금 같을 때는 더더욱.”

“왜? 재밌을 것 같은데. 인간들 뒤져 나가는 걸 보면 묵은 체증도 싹 가실 것 같단 말이지. 그나저나 한국 헌터들은 막 쿵푸 같은 걸 쓰면서 싸우려나? 사무라이도 있고?”

“쿵푸는 중국이다. 사무라이는 일본이고.”

“뭐야, 서로 다른 거였어? 따다닥 붙어 있길래 거기가 거긴 줄 알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나 일본에는 몇 번 가 봤어. 온천에서 잽스들이랑 마리화나 빨면서 반신욕 했더랬지.”

“흠.”

고건룡은 콧방귀를 뀌며 눈을 감았다. 아리에나가 못마땅한 듯 코를 찡그렸다.

“에이 씨, 재미없어.”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창가에 기댔다. 그리고 무념 무상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우주를 떼온 듯한,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어서 대전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마음껏 활개 치며 살육을 벌일 수 있을 텐데!

유치한 공상에 빠졌던 아리에나가 일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주교.”

“…….”

“대주교!”

“왜 그러나.”

“대주교는 외계인 믿어? UFO 같은 거 말이야.”

“헛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피곤할 텐데.”

“헛소리 아닌데. 나 지금 UFO 보고 있다고.”

고건룡은 이쯤 되니 짜증을 느꼈다. 그가 한쪽 눈만 떠서 아리에나 쪽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비행기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창문에 딱 붙어 있었다.

“아!”

그녀가 작게 탄성을 내지른 순간. 객실의 전등이 모두 꺼지더니 기체가 마구 요동쳤다.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끔찍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비행기 내부가 녹아내리고 시트에는 불이 붙었으며 승무원과 뼈조차 남김없이 타 버렸다.

쾅!!

비행기가 폭발했다. 지상에서 봤다면 하늘에 별 하나쯤 더 생겼구나, 하고 말겠지만 실상은 무지막지했다.

조각난 파편이 온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것들은 전부 녹아 벌건 쇳물을 뚝뚝 흘렸다.

그 쇳조각 사이로 두 사람이 뚝 떨어졌다. 고건룡과 아리에나였다. 그들은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이 8,000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고건룡은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격추한 장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고건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놈은 아리에나가 말한 UFO 따위가 아니었다. 엄연한 생물이었다.

‘드래곤?’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어찌나 많은지 하늘을 거의 가득 메웠는데, 고작 하나의 주둥이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양이었다.

“크흑!”

빗발치는 불덩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까마득한 높이 자체는 대단히 위협적이다.

고건룡은 자세를 바로잡으려 갖은 애를 썼지만 쏟아지는 불길이 그 행위를 교묘하게 방해했다.

“꺄아악!”

별안간 아리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새빨간 화염에 둘러싸인 채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고건룡은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그가 허공을 찼다. 낙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땅과 가까워졌다. 지상은 온통 새카맸다. 바닥과의 거리가 3,000미터 안으로 좁혀졌을 때 비로소 그것이 바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암초로 이루어진 섬이 있었다. 고건룡은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암초에 대가리를 처박는 것보단 수면과 부닥치는 편이 낫다.

문제는 아리에나였다. 그녀는 추락하며 불덩이를 수차례나 얻어맞더니 정신을 반쯤 놓아 버린 듯했다.

고건룡은 카르마를 뿜어내 기다란 줄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아리에나를 낚아챈 뒤 잽싸게 품에 안았다.

지면과 닿기 수십 미터 전, 고건룡은 육지 방향으로 어마어마한 카르마를 폭발시켰다. 그 반작용으로 그의 몸이 떠밀렸고, 결과적으로 그는 바다에 떨어질 수 있었다.

퍼어엉!!

수면과 마찰하자 물기둥이 십수 미터나 솟아올랐다. 소리는 또 어떤가? 흡사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서졌군.’

카르마로 몸을 보강했는데도 몸 군데군데 뼈가 가루가 돼 버렸다. 아리에나는 아예 의식을 잃은 듯했다.

고건룡은 아리에나를 부여잡고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잠시 후 그가 마치 소금쟁이라도 된 양 수면을 밟고 섰다. 카르마 운용에 능통한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불청객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일순 수면이 탁! 하고 튀더니 세 방향에서 칼날이 날아들었다.

큼직한 칼끝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고건룡의 몸을 관통했다. 그 모든 일이 0.5초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쿨럭!”

고건룡의 입으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왼쪽 옆구리에 아리에나를 낀 그가 오른팔을 넓게 휘둘렀다.

“크흑!”

“꺅!”

고건룡을 노렸던 세 사람.

알파, 베타, 오메가는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그들은 두당 인간 물수제비를 200번 정도 띄운 후에야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고건룡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더듬었다. 손바닥으로 새빨간 혈흔이 듬뿍 묻어나왔다.

‘내게 상처를 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머리 위로 느껴지는 아득한 살기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거대한 질량이 이쪽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칫!”

그가 암초 섬 방향으로 아리에나를 던져 버렸다. 그녀는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섬에 고꾸라졌다.

그녀를 던진 직후 고건룡은 발산한 카르마를 조작해 두터운 방벽을 생성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방벽이 구성된 공간이 울렁거리더니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다.

곧이어 거대한 앞발이 그를 찍어눌렀다.

“크롸라라라라!”

“끄아아악!”

네 개의 발톱이 고건룡을 단단히 움켜쥐었고, 공간째로 구겨 버렸다. 그의 온몸이 한 점으로 모여들어 끝에는 농구공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일순 드래곤이 꼬리를 휘둘러 고건룡을 강타했다. 얻어맞은 고건룡은 수십 미터의 수심까지 단번에 잠수해 버렸다.

드래곤은 잠자코 수면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드래곤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며 날아올랐다. 하지만 무형의 힘이 드래곤의 날개를 억류했고 바닷속으로 잡아당겼다.

아래쪽에선 고건룡이 수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드래곤은 모습을 변모시켰다. 한순간 인간 여인으로 외형을 바꾼 드래곤은 성공적으로 힘의 올가미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 서시희의 곁으로 세 아이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고건룡과 마주 보고 섰다.

“쿨럭, 쿨럭! …후우, 못 본 사이 아주 괴물이 되셨구만. 어째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다 했더니 드래곤으로 둔갑하는 재주는 언제 익히셨소, 누님?”

고건룡은 반가움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 하나 서시희의 눈빛에선 경멸 이외의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멈춰. 너희가 벌이는 일이 그릇됐다는 것을 정말로 모르겠니?”

“시희 누님, 애석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수다. 폭발하는 분화구에 뚜껑을 덮는다고 그게 멈춰지겠수?”

“…그럼 너를 죽이는 수밖에 없겠지.”

“흐흐흐흐… 쿨럭! 쿨럭!”

고건룡이 격하게 기침했다.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누님은 이미 두 번 나를 당해 내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재주로 나를 죽이겠다는 말이요?”

“5단계 리미트를 풀어라.”

“예, 마스터.”

아이들이 일제히 답했다. 그들은 각자의 팔에 부착된 일곱 개의 팔찌 중 다섯 개를 한 번에 뜯어 버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전에서 기름이 솟구치듯 방대한 카르마가 온 사방으로 발산된 것이다.

고건룡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또 괴상한 장난감을 만들어 오셨구려.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어디 산골짜기에 처박혀서 저런 거나 만들고 있으셨수?”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거다. 그래야만 해.”

“그래도 한때 누님, 동생 하던 사이인데 너무 매몰차게 구는 거 아니요?”

고건룡이 너스레를 떨자 서시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넌 이미 나를 두 번이나 죽였잖아? 너, 나를 누나라고… 아니,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니?”

“내 표정에서 반가운 게 안 느껴지쇼? 우리가 어디 한두 해 인연인가. 알고 지낸 지 근 50년 가까이 되는데.”

“그런데… 그런데 너는 나를 그렇게 매몰차게…….”

서시희가 말을 잊었다. 고건룡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눈동자를 돌려 옆의 암초 섬을 바라보았다. 아리에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누님, 인제 와서 이러는 것도 웃기다마는 그냥 우리와 함께합시다. 누님이 그렇게 열불 내고 고생해서 얻는 게 대체 뭐란 말이요?”

“그러는 너는! 너희는 인류를 말살해서 뭘 얻겠다는 거냐?”

“영원한 평온.”

“…….”

서시희가 더 말하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칼을 높이 들었다.

“원하는 것이 영원한 평온이라면 내가 죽음으로 선사해 주마.”

“풉! 푸하하하! 푸하하하하!”

고건룡은 느닷없이 파안대소했다. 이윽고 그를 둘러싼 공기가 바뀌었다. 그가 새빨간 눈을 부라리며 이어 말했다.

“네깟년이 감히 나를 어찌한단 말이냐! 저딴 장난감을 가지고? 오만이 도를 넘었구나!”

“알파, 베타, 오메가. 준비해라.”

“예 마스터.”

“그래, 네년이 무슨 요술을 부려 자꾸 되살아나는가 했더니 이제야 알았구나. 알았으니 대처할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이 우주에서 단 한 끌의 티도 남기지 않고 없애 주마.”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고건룡이 선 자리에서 카르마를 뿜어냈다. 그 농밀하고 새카만 힘은 능히 하늘에 닿았다.

서시희와 세 아이는 움츠러들지 않고 수면을 밟으며 돌진했다.

이날, 지중해의 어느 고요한 바다에서,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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