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통신
신성군과 접전을 벌인 날로부터 나흘이 흘렀다. 아스빌람은 한때 슬픔에 빠졌지만 빠르게 예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거리를 활보하는 고블린이 조금 줄어든 것을 빼고도 아스빌람의 모습은 어딘가 달라졌다. 그건 이곳을 방문한 객원 때문이다.
「로드시여, 인간들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어, 그래. 안으로 들여와.」
「예.」
고블린들이 고구마와 구운 닭고기가 담긴 소쿠리를 잔뜩 들고 왔다. 80명 가까이 되는 식수 인원을 충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양이었다.
“이열! 고블린 친구들, 잘 먹을게요.”
정선경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고블린들은 당연히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큰 눈만 껌뻑였다. 정선경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쿠리에 담긴 고구마를 집어먹었다.
“아뜨뜨!”
‘저 누나는 정말… 난 사람이네.’
그녀가 특히 친화력이 좋은 거였다. 대다수 사람은 아직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병갑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사람들이 모두 깨어난 것은 이틀 전이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린 후 대개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우선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고, 뒤이어 옆에 누가 있는지 파악하고, 마지막엔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 왔다. 하나 덧붙이자면 고블린들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그들을 달래는 건 여러 의미로 고역이었다. 고병갑은 ‘고블린은 안전하다.’라는 개념을 헌터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같은 얘기를 일백 번씩 반복해야 했다.
참고로 아스빌람이니 고블린 로드니 하는 키워드는 꺼내지 않았다. 모두를 납득시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곳은 안전하며 이곳의 고블린도 무해하다. 하지만 너희가 이곳의 규칙을 깨는 순간 생사를 보장해 줄 수 없다.’라는 인식만 단단히 심어 두었다.
그의 갖은 노력, 그리고 먼저 얘기를 전해 들은 일행의 도움 덕분에 헌터들은 ‘고블린이 안전한지 위험한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당신 말을 따르겠다.’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고병갑은 강당 내부를 훑어보았다. 경계심을 푼 몇몇 이는 고구마와 닭고기를 먹어 치웠다. 하지만 일부는 끝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흥, 먹든지 말든지. 자기 마음이지.’
먹으라고 타이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주는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다가 아사하면 그건 자기 업보다.
“성민이 형, 이리 와서 좀 먹으래도? 잘 먹어야 회복도 빨리할 거 아니야.”
“…난 됐어.”
“아, 객기 부리지 말고. 자, 한 덩이 해! 여기 고구마 끝내주게 맛있어.”
조성민이라는 헌터는 머뭇거렸다. 그의 이성과는 별개로 입에선 침이 줄줄 흘렀다. 결국 그는 마지못한 척 고구마를 받아 들었다.
고구마를 옛 애인 사진이라도 되는 양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가 눈을 질끈 감고 한입 베어 물었다.
3분 뒤 조성민은 고구마 소쿠리에 코를 처박게 되었다.
“마, 보소 헌터님들. 헌터들님들도 시위 그만하고 얼른 잡수이소. 저분 말마따나 잘 먹어야 힘도 붙고 회복도 얼른 할 거 아입니까? 또 병갑 씨가 일부러 신경 써 준 건데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예.”
한창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정선경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에휴, 그냥 냅둬요. 안 먹으면 지들만 손해지. 저러다 굶어 뒤져 봐야 정신 차려요.”
“아이고, 마 선경 씨. 말씀을 좀…….”
한창훈의 설득보다는 정선경의 날 선 언변이 사람들을 자극했다. 결국 굶주림에 못 이긴 헌터들이 자존심을 접고 소쿠리로 모여들었다.
단 몇 분 뒤 고구마와 닭고기가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부른 배를 쓰다듬는 헌터들. 그들의 얼굴에서 행복함이 느껴졌다.
“저기.”
그때 한 사내가 주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고병갑에게 말을 건 것이다.
고병갑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계속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다른 건 아니고 우리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죠?”
고병갑은 사내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언제까지 있어야 하냐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니까… 언제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는 말이에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저들을 억류라도 하는 것 같잖은가?
“지금 당장이라도 돌려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돌아간들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
사내가 말을 삼켰다. 고병갑의 말대로였다. 그들의 몸 상태는 과장 한 숟갈 보태 송장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고병갑이야 사람들을 돌려보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이들이 허튼짓할까 싶어 밤잠을 설칠 필요도, 아스빌람의 귀중한 식량을 내어 줄 필요도 없으니까.
다만 지금 상태로 돌려보냈다가 강한 몬스터라도 만나면 객사할 게 뻔하니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여긴 안전합니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일단 기력부터 회복하세요. …그래도 영 못마땅하다면 언제든 말하십시오. 바로 돌려 보내드릴 테니까.”
사람들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예상과 달리 지금 즉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바깥 상황에 대해서 좀 아시나요?”
이번엔 어느 여성이 말했다. S급의 신예지 헌터다. 그녀는 정선경과 친분이 있는 듯했다.
어쨌든 고병갑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저도 딱히 아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더군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뇨?”
“핸드폰이 터지지 않았습니다. 그게 일시적인 오작동인지는 모르겠네요. 분명한 건 열흘 전에는 터졌다는 거지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이에 관해 짐작되는 게 있긴 했다. 육망교 놈들이 뭔가 벌이기 시작했구나, 라고 유추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서시희가 들려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밝혀야 할지 말지는 꽤 어려운 고민거리였다.
어느덧 아스빌람에 밤이 찾아왔다. 정선경과 나란히 서 담배를 피우노니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한테 말 안 할 거야?”
“뭐를?”
“일루미션 어쩌고 한 거 말이야.”
고병갑은 정선경을 빤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몰라, 고민 중이야.”
“말하는 게 낫지 않겠냐. 백지도 맞들면 낫다잖아. 머리를 맞대야 뭐라도 대안이 나오지.”
“어지간한 거면 그렇겠지. 그런데 누나도 알다시피 사안이 좀 엄중한 게 아니잖아. 자칫하면 혼란만 가중될 수도 있어.”
“어휴, 너는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냐.”
“누나는 어쩔 생각인데?”
“뭐가?”
“만약 육망교가 정말로 무슨 짓을 했다 쳐. 이를테면 몬스터들이 미쳐 날뛰고 일루미션 놈들도 사람들을 학살해대는 거지. 그러면 누나는 어쩔 거냐고.”
정선경은 오만상을 구기며 담뱃재를 탁탁 털었다.
“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당연히 맞서 싸워야지.”
“영 승산이 없어 보이는데도?”
“승산이고 나발이고, 내가 힘이 있는데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만약 놈들이 누나한테 접근해서 한 다리 걸치게 해 준다고 하면 동조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그런 또라이들한테 붙게.”
그녀가 언짢은 기색으로 대답했다. 고병갑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연기를 뿜었다.
“저 사람 중에 누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 사람들을 못 믿겠다는 말이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막말로 이기는 편에 붙냐, 지는 편에 붙냐 하면 이기는 편에 붙는 게 맞긴 하거든.”
“네가 우려하는 만큼 저 사람들의 도덕 저울이 고장 나지는 않았을 거야. 헌터라는 직업 자체가 자긍심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냐.”
“글쎄, 나는 돈 때문에 한 거라서.”
“하여간 너는…….”
정선경이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고병갑은 얼른 주워서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재떨이에 넣었다.
“꽁초 바닥에 버리지 말라니까.”
“아. 미안하다, 야. 습관이 돼서.”
“여긴 청정 구역이라고.”
정선경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하여간 너는 진짜 재밌고 신기한 놈이야.”
“내가 흔한 캐릭터는 아니긴 하지.”
“야, 병갑아.”
“왜?”
“너 나랑 연애 안 할래?”
고병갑은 제 귀를 의심했다.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제대로 들었음에도 되물었다.
“뭘 하자고?”
“연애하자고. 나랑.”
“…누나, 욕구 불만이야?”
“뒤질래?”
“그럼 뭐야? 맥락도 없이.”
정선경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가 고블린들 왕이라며. 너랑 어떻게 잘되면 사모님 소리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그런다, 됐냐? 나도 팔자 한번 펴 보자.”
“돈도 많은 양반이 필 팔자가 어디 있다고.”
“어차피 세상이 난장판 되면 돈 따위 똥휴지 될 거 아니야. 나도 보험 하나는 들어 놔야지.”
“별…….”
“그래서 싫어? 싫냐? 응?”
정선경이 팔짱을 끼더니 들러붙었다. 고병갑은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름을 느꼈다.
<좋다 그래라. 계집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한 것이 심성이 진실하여 뒤끝이 없을 상이고, 허리는 잘록한데 엉덩이는 큼직한 것이 자식을 술술 잘 낳을―>
‘…닥쳐, 랜드리올. 그리고 훔쳐보지 마.’
<재미없는 놈.>
고병갑은 마음을 달래며 정선경을 떼 놓았다.
“나도 누나가 좋아. 좋은데… 지금은 이래저래 연애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누나도 알다시피 시국이…….”
“흐흐흐! 됐어, 인마. 어차피 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런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좋아진 거 알아?”
“…….”
“왕비 후보 1로 올려놔라. 후보 2는 받지 말고.”
정선경이 고병갑의 등을 툭툭 친 뒤 떠나갔다. 고병갑은 진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 * *
아흐레째 되는 날. 고병갑은 회복을 마친 헌터들을 지구로 돌려보냈다.
그새 고블린들과 정이 든 몇몇 이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고병갑도 그들과 함께 나섰다. 이것저것 확인해 보고픈 게 있었기 때문이다.
총 80명의 헌터는 군-헌터 연합 총지휘 본부가 있는 황해북도 수안군으로 향했다.
길잡이가 돼 주는 것은 반쯤 찢어진 지도와 나침반, 그리고 기억력뿐이었다.
가는 길, 우연히 버려진 무전기를 발견했다. 무전기에 등록된 모든 채널로 무전을 보내 보았으나 단 한 군데도 받지 않았다. 일행의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감돌았다.
불안함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이라 했던가? 일행은 앞을 가로막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몬스터 군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따리, 천따리가 아니다. 적게 잡아도 수만 마리였다.
이 무렵 고병갑은 확신했다. 올 것이 왔구나, 라고.
헌터들은 최대한 몬스터를 피해 가며 움직였다. 물론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었고, 적지 않은 빈도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일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S급만 20명에 A급도 59명이나 되지 않던가. 알샤론의 군세쯤 되지 않는다면 이쪽에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일행은 낮 동안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이동했고, 해가 저물면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은 그제야 ‘아스빌람과 연결됐다.’는 것의 진면모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정말 편리… 아니, 대단하네요. 적진에서 야영하며 위험을 감수할 일도 없고 말이죠.”
“그러게요. 무겁게 짐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초능력자 중에서도 공간 계열 능력자가 제일이라더니, 정말이었네요.”
사람들의 입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고병갑은 딱히 으쓱하지는 않았다. 아스빌람이 이동식 여관방 취급을 받는데 좋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여관방은 돈이라도 받지…….’
아스빌람에서 안전하게 밤을 보내고, 해가 뜨면 다시 이동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3일간 반복했다.
그리고 일행은 마침내 지휘 본부에 도착했다.
아니, 말을 정정해야겠다. 지휘 본부였던 곳에 도착했다.
“예상은 했지만…….”
“제기랄.”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지휘 본부는 쑥대밭이 돼 있었다. 천막이나 막사는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고, 박살 난 병기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피 내음과 썩은 내는 온 사방을 뒤덮었는데 이상하리만큼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전부 먹어 치운 것이리라.
그때였다. 일행 중 신예지 헌터가 뭔가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반쯤 가라앉은 어느 천막이었다. 그곳에 거대한 무전기가 있었다.
신예지는 침착하게 무전기 상태를 확인하고 이곳저곳으로 통신을 보냈다.
하지만 저번에 그랬듯 돌아오는 것은 침묵…….
-지직!
무전기가 노이즈를 뱉었다. 그쪽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헉 숨을 집어삼켰다.
“아! 아! 들리십니까? 들리세요?”
-지직! …구. …누 …구. 지직!
무전기는 한참을 버벅거렸다. 신예지는 수화기에 대고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곧 통신이 안정을 되찾았다.
“이봐요! 대답 좀 해 봐요!”
-들립니다.
남성의 목소리였다. 저쪽에서 바로 물어 왔다.
-누구십니까?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신포 탈환 임무를 맡고 떠났던 원정단입니다.”
-그럼 헌터들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디입니까?
“지금 황해도입니다. 지휘 본부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직… 지직! …아직 북한……. 지지직!
무전기가 또 말썽을 피웠다.
“지휘소가 이전된 겁니까? 당신들은 어디 있어요?”
-남… 지직! 남쪽… 지직! 입니다.
“남쪽 어디요? 정확한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어디로 복귀하면 됩니까?”
모두가 줌을 숙이고 답변을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음질이 깨끗했다. 그래서 더욱 끔찍했다.
-오지 마십시오. 이곳은 지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