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애도의 하루
「전사자들을 남문 옆 공터로 모셔라.」
신성군과의 전투가 끝났다. 결과는 대승이었다. 하지만 승패를 떠나서 전투는 언제나 흔적을 남기는 법이다.
이번 전투로 동원된 고블린은 총 519명. 그중 41명이 끝내 명을 달리했다. 적은 수다. 분명 적은 수였다. 하지만 슬픔의 크기는 절댓값에 비례하지 않았다.
전사자들은 동족들의 인도하에 남쪽 공터로 옮겨졌다. 고병갑은 그곳에 공동묘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시신을 한데 모은 후 아스빌람에서 가장 희고 깨끗한 천으로 덮어놓는다. 오늘은 밤이 너무 늦어 다음 날 작업을 해야 할 성싶었다.
고병갑은 공터 앞에 주저앉은 바몬드에게 다가갔다. 바몬드는 물에 젖은 휴지 같았다. 그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한다고 했는데도 많은 동족이 죽어 버렸습니다.」
「바몬드, 고개를 들어라.」
바몬드가 버벅거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넌 누구보다 잘해 줬다. 이번 전투에서 기적을 만든 것이 바로 너야.」
「로드시여…….」
「슬퍼하는 일은 해가 뜬 뒤 모두 함께하자. 아직은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중상자는 사망자의 여섯 배가 넘었다. 하지만 숨만 끊어지지 않았다면 그걸로 된 거다. 설령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어도 경단만 있으면 고칠 수 있으니까.
고병갑은 발타드렌에 비축해 놓은 모든 의약품을 끌어모아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혹 부족할까 싶어 솜니움으로 전령을 보내기도 했다. 바몬드도 마지막 한 톨의 힘까지 짜내어 동족들을 치료했다.
그 작업은 동이 틀 무렵까지 진행됐다.
사실 제일 걱정되는 건 영혼을 몸에 들인 다섯 고블린이었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후 영혼과의 동화를 풀었다. 영혼이 소멸하지는 않았다. 영혼은 몸 한구석에 남아 언제든 다시 동화할 수 있었다.
물론 반동이 찾아오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끄으아아!」
「으윽! 으으윽!」
과거 고병갑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들은 고통에 앓고 앓다가 끝내 기절해 버렸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정신을 놓는 편이 차라리 편안할 테니까.
「로드시여, 인간들을 모두 들여왔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다. 너희도 얼른 가서 쉬도록 해라.」
「예, 로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병갑은 작업병들을 돌려보내고 인간들이 안치된 장소로 향했다. 빈 강당에 인간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죽은 사람은 따로 분류돼 있었다. 사람들은 총 223명이었는데, 그중 147명이나 죽었다. 미라 같이 바싹 마른 꼴이 되어서 말이다.
살아남은 76명은 죽지 않을 만큼만 조치해 놓았다. 드래곤 고기를 조금씩 먹여 원기도 보충시켰고.
고병갑은 담배를 피우며 심란한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가만히 둘 수 없어서 데려오긴 했다만 이제 어쩌면 좋냐.”
알샤론을 쓰러뜨리자 예상대로 공간이 붕괴했다. 초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삭막한 폐허로 돌아오게 됐다.
고병갑은 차마 사람들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아스빌람으로 데리고 왔다.
고병갑은 몹시 피곤했으나 잠을 자지 않았다. 강당 앞에 터를 잡고 새벽을 지새운다. 혹 누군가 깨어났을 때 그가 허튼짓하지 못하도록 제지해야 했으니까.
시간을 하염없이 흘렀고 태양이 중천을 밝혔다.
발타드렌의 모든 구성원이 지난밤 있었던 폭풍을 전해 듣게 됐다. 솜니움과 솜니움 2단지의 주민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발타드렌으로 모이게 했다.
다들 힘을 합쳐 묘지를 조성했다. 전사자들은 흰 천에 둘러싸여 땅에 묻혔다. 그 작업은 고병갑이 직접 했다.
41명의 고블린을 모두 묻고 나서,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그들에게 바쳤다. 그리고 죽은 이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주었다.
2,500명에 달하는 주민이 묘지를 넓게 둘러싸 애도를 표했다.
「흑! 흐윽!」
「으아앙!」
대성통곡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에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비록 고블린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슬퍼해 주었다.
한 명이 울자 다른 이도 울었고, 묘지는 금세 눈물바다 되었다. 고병갑은 그것을 막지 않았다. 울어야 할 날에는 울어야 하는 법이다.
「41명의 동포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아스빌람의 전사로서 긍지 높게 싸우다 죽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들은 죽어서도 이곳 아스빌람에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할지어다. 망자를 위해 울어라. 오늘만큼은 목이 쉬도록 울어도 좋다.」
고병갑도 울고 싶었다. 실제로 울려고 했다.
하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랜드리올이 재빨리 그것을 막았다.
<세상 모두가 울어도 왕은 울면 안 된다. 왕은 백성의 눈물을 받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 자신의 눈물을 담을 공간은 없는 것이다.>
‘…나는 맘대로 울 수도 없단 말이냐?’
<그렇다. 왕의 눈물엔 독이 있다. 그래서 백성을 죽이지. 언젠가, 너의 그릇이 가득 차게 된다면 왕좌에서 내려오도록 해라. 그땐 마음껏 울어도 된다.>
‘알겠다.’
고병갑은 랜드리올의 말대로 눈물을 삼켰다. 눈물이 쓰다. 정말로 독이 있는 모양이다.
장례식은 오후 느지막이 끝났다. 솜니움의 고블린들은 발타드렌에서 하루 머무르고 내일 돌아가기로 했다.
인간들이 깨어난 것은 저녁 식사가 이루어질 무렵이었다. 보고를 들은 고병갑은 급히 인간들이 안치된 강당으로 향했다.
깨어난 이는 정선경을 비롯한 일행이었다. 그들은 가장 나중에 당했기에 그나마 상태가 온전했다.
뭐가 됐건 그들은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었다. 기절했다 깨어났는데 웬 낯선 곳이고, 사방에 고블린 천지니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행히 고병갑이 제때 도착한 덕에 보초를 서던 고블린이 해코지당하는 일은 없었다.
“병갑아!? 너 뭐야? 괜찮아?”
정선경이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고병갑은 그녀를 잠시 내버려 두고 고블린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라.」
「알겠습니다.」
고블린이 고개를 꾸벅인 뒤 사라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기겁했다.
“야… 너, 너 방금 고블린이랑 대화한 거야?”
“내가 뭘 본 기고?”
“에휴.”
고병갑은 짧게 한숨 쉰 뒤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정선경에게 던져 주었다.
“일단 살기부터 좀 거둬. 여긴 안전하니까.”
“야! 온 사방에서 몬스터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만 안전은 무슨 안전이야? 그리고 저, 저거! 다 시체 아냐?”
“한 대 피우면서 진정 좀 하라고. 내가 다 설명해 줄 테니까.”
고병갑은 문 옆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지척에 시체가 있으니 기분이 찜찜하긴 했다.
‘애들 시켜서 치워 버리든가 해야겠네.’
정선경은 심란해 죽겠다는 얼굴로 담배를 꼬나물었다. 한창훈과 심승섭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째 된 깁니까? 그 커다란 괴물은요?”
“알샤론은… 아니, 놈은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예?”
“네, 저와 고블린들이 해치웠습니다.”
“모, 모라꼬… 아으윽!”
한창훈은 밀려드는 격통에 표정을 구겼다. 응급조치해 놓긴 했다만 그들의 몸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고병갑은 고대의 상점에서 경단을 몇 개 사들여 나누어 주었다.
경단을 먹은 후에야 그들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가, 감사합니더. 인자 좀 살 것 같네예.”
“여긴 어디죠? 한국이 아닌 것 같은데.”
잠자코 있던 심승섭이 물었다.
“네, 한국이 아닙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기 냄새가 달라서요.”
고병갑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뒤 천천히 서두를 텄다.
“이곳의 이름은 아스빌람. 고블린들의 왕국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곳의 왕이죠.”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 * *
황당한 이야기에도 종류가 있다.
적당히 황당한 것, 많이 황당한 것, 그리고 터무니없는 것.
개중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아예 믿지 못하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이거나.
사람들은 고병갑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다. 반신반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믿지 못했다.
하기야, 고블린 로드라니. 고병갑도 본인이 고블린 로드가 아니었다면 귀신 도시락 까먹는 소리쯤으로 여겼으리라.
하지만 이 경우 고병갑은 자신의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발타드렌을 가득 메운 고블린이 바로 그 증거다.
결국 세 사람은 체념하고 고병갑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허… 저번에 들은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네예. 세상에 우째 이런 희한한 게 다 있노.”
“야, 병갑아. 그럼 네가 고블린들한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면 걔들이 네 말을 철석같이 따른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와. 그러면 여기 고블린이 얼마나 있는 거야?”
“고블린만 따지면 1,800명 정도. 정령이란 애들까지 합치면 2,500명 정도야.”
“죽여주는구먼.”
정선경은 꽁초를 바닥에 비벼 끄자마자 새로 한 대를 물었다.
“하긴, 걔들 생긴 거나 하는 짓이나 사람 같잖아. 지구 말고 다른 세상이 하나 있고, 몬스터들이 거기 살던 주민이라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네. 아니, 오히려 당연한 거지.”
“그런데 이상하네요.”
심승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고블린은 강한 몬스터가 아니에요. 가장 강한 개체라고 해 봤자 B급 정도죠. 아까 이곳에 고블린이 1,800마리쯤 된다고 했나요. 1,800마리를 모두 동원해도 그 괴물들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요.”
“그건 승섭 씨 말이 맞네예. 뭉쳐 봤자 고블린은 고블린 아닙니까?”
“그건…….”
「로드! 여기 계셨… 엥?」
그때였다. 강당 문을 열고 몇몇 고블린이 들어왔다. 영혼을 취한 녀석들이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경계의 기색을 드러냈다가 곧 누그러뜨렸다.
「인간들이 깨어났군요. 혹 저희 때문에 곤란해지셨습니까?」
「괜찮아, 도르마. 그나저나 너희 깨어났구나. 몸은 좀 괜찮냐?」
도르마가 씁쓸하게 웃었다.
「예, 낮까지만 해도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는데 지금은 잠잠해졌습니다.」
「아직도 좀 뻐근하긴 합니다, 허허.」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다들 묘지는 들렀고?」
「예, 함께 가서 추모했습니다.」
「잘했다.」
고병갑이 고블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일행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고블린들에게서 뿜어지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저… 저게 진짜 고블린이라고? 세상에, 저런 고블린이 있단 말이야?”
“A급은 가볍게 넘을 것 같십니더. 생긴 것도 좀 다른데예? 덩치도 여느 고블린보다 큰 것 같고.”
“병갑아, 쟤… 쟤도 고블린이냐?”
정선경이 도란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물었다.
도란은 기분이 나쁜지 눈썹을 찌푸렸다.
「왜 기분 나쁘게 손가락질이지?」
“야, 야! 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나한테 말한 거야? 뭐래?”
“왜 기분 나쁘게 손가락질하냐고 하네.”
“아, 아아! 미안.”
정선경이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도란은 콧방귀를 뀌며 새침하게 굴었다.
「그래. 다들 안정을 찾았으니 마음이 놓인다. 돌아가서 쉬도록 해. 나는 이 자들이랑 할 말이 남아서.」
「알겠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로드, 이따 봐요.」
「오냐.」
고블린들이 떠나갔다. 고병갑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셨다시피 이곳의 고블린은 좀 남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놀랍… 군요.”
“병갑아! 나 여기 구경 좀 시켜 주면 안 되냐?”
“저, 저도 마, 구경하고 싶습니더!”
정선경과 한창훈이 눈에 별을 띄우며 간청했다. 고병갑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괴물과 싸우느라 많은 고블린이 죽었습니다. 웃고 떠들며 관광시켜 줄 분위기가 아녜요.”
“그렇십니꺼… 카믄 마 어쩔 수 없지예.”
“조용히 구경만 하는 것도 안 될까? 말썽부리지 않을게.”
정선경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고병갑은 쩝 입맛을 다시다가 그러라고 했다.
“그럼 조용히 둘러보기만 해.”
“고마워!”
“단, 한 가지는 명심하도록 해.”
“뭐를?”
“누나나 창훈 씨는 상식적인 사람이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고블린을 공격한다면.”
고병갑은 진중한 어투로 덧붙였다.
“내가 절대 가만두지 않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을 거야.”
“당연하지, 인마. 네가 데리고 사는 애들이라며. 걱정하지 마.”
“맞십니더. 안심하이소.”
“대충 둘러보고 바로 돌아와. 미안하지만 멋대로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어서.”
“알았어, 알았어.”
정선경과 한창훈이 강당을 빠져나갔다. 심승섭은 아스빌람 관광에 별로 흥미가 없는 듯했다.
다만 조금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리를 좀 옮겼으면 하는데요. 냄새가 너무 심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심했군요.”
고병갑은 한편에 쌓인 100구가 넘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저걸 어찌 처리하면 좋을지 머리가 아팠다.
일단 고블린들을 시켜 시신을 옮겼다.
그것을 한데 모아 화장한 것은 좀 나중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