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21화 (121/151)

121화 신의 군세, 왕의 군세

드넓은 초원. 몬스터의 육신으로 구성된 나무 뒤로 뜬 홍월이 몽환적인 빛을 뿜는다.

500명 고블린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웠다. 눈은 붉게 빛났다.

척. 척. 척. 발맞춰 진군하는 군세. 갑옷이 절그럭대는 소리는 요란하기보다 정갈했다.

제일 앞에 선 자는 고병갑이었다. 다섯 고블린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뒤따랐다. 옛 영웅의 힘을 계승한 최강의 장수들. 그들은 투지를 불사르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보였다.

‘수정이 모자라지 않았다면 열두 영웅을 모두 동원했을 텐데.’

입에 쓴맛이 감돌았다.

최근 아스빌람에 여성 고블린을 대거 들이고 있어 수정의 여유분이 넉넉지 못했다.

‘그래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군.’

등 뒤로 느껴지는 다섯 개의 거대한 힘. 흡사 대양을 등에 업은 듯한 기분이다.

「저것이로군요, 말씀하신 것이.」

도르마가 다가와 말했다. 고병갑은 칼을 뽑으며 대답했다.

「맞아. 이봐, 도르마.」

「예, 로드.」

「촉수에 얽매인 인간들, 빼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도르마가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촉수에 얽매인 인간들이 일제히 하늘로 떠올랐다. 그러나 단단히 옭아맨 촉수가 쥔 것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끈에 묶인 풍선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대로 뜯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랬다간 인간들도 피해를 받을 것 같습니다.」

「도란.」

「네!」

「저거 싹 베어 버려.」

「맡겨 두세요!」

도란이 의기양양하게 대검을 펼쳤다. 그녀는 몸을 한껏 수그렸다. 그리고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로 튀어 나갔다.

단숨에 나무의 지척까지 다가간 그녀가 일순 용솟음쳤다.

만다라 기사단의 비술.

여덟 무예 중 첫 번째 형식. 절삭.

후두둑!

칼날 그 자체가 된 도란은 진행 경로의 모든 것을 갈라냈다. 겹겹이 꼬인 수천 다발의 촉수가 맥없이 쏟아졌다.

촉수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유유히 부유하여 군단 뒤로 옮겨졌다.

그때였다. 나무가 격하게 떨리더니 표면이 녹아내렸다.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말이다.

도란은 거기다 대고 칼질을 하려 했으나 고병갑이 서둘러 복귀시켰다.

「도란, 돌아와.」

「아, 네! 알겠어요.」

「시작된다.」

나무가 녹아 내림에 따라 그 안에 든 알샤론이 드러났다. 박살 났던 양팔은 그새 복구된 상태였다.

바닥에 흥건한 융해물은 형태를 갖추며 신성군으로 탈바꿈했다.

‘전보다는 수가 좀 줄었군.’

고병갑이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목청껏 소리쳤다.

「전원 태세를 갖춰라! 전투다!」

「우워어어어!」

고요를 지키던 고블린들이 도발적으로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내뿜는 내력이 얼마나 농후한지 공기가 다 눅진해질 지경이었다.

고병갑은 짐짓 놀랐다.

‘이놈들, 성취율이 이만큼이나 됐던가?’

엄선한 녀석들만 데리고 왔다지만 이 정도라곤 생각 못했다. 그때 내면에서 랜드리올이 말을 걸어왔다.

<이것이 왕의 기개다.>

‘왕의 기개?’

<넌 왕이라는 놈이 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한 수 더 가르쳐 주마.>

랜드리올이 수면 위로 올라오려 했다. 고병갑은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것을 막았다.

<…네 몸을 빼앗는 일엔 흥미 없으니 잠자코 물러나라.>

그의 회유에 고병갑은 잠시 몸을 내주었다. 랜드리올은 고병갑 행세를 하며 떠들어 댔다.

「들어라! 저 천인공노하고 사악한 것들은 마드무트의 수하요, 우리의 철천지원수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우리의 혈관에는 신을 죽이는 피가 흐르노니, 너희의 이빨은 저것들의 살가죽을 가볍게 씹어 삼킬 것이다! 저것들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뒤 놈들의 피로 축배를 들자!」

「죽이자! 죽이자!」

「우오오오!」

고블린들의 맞장구치며 발을 굴렀다.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귀가 멀어질 지경이었다.

「짐이 너희 곁에 있다. 내가 이리 굳건한데 세상 무엇이 너흴 두렵게 만들 수 있겠는가? 나는 단 1초도 한눈을 팔지 않고 너희의 투쟁을 지켜볼 것이다. 나를 위해서, 아스빌람을 위해서 싸워라. 그리고 장렬히 죽어라! 살아남는 것을 수치로 여겨라! 내 너희 하나하나의 죽음을 영원토록 기억할지어다!」

랜드리올이 사방으로 내력을 발산했다. 그것들은 오로라처럼 대기를 수놓으며 고블린들에게 스며들었다.

이 순간, 고블린들은 거의 미쳤다.

「우아아아아!」

「케르륵! 케르륵!」

사기가 끓어 넘치다 못해 폭발했다. 고블린들은 제 능력의 서너 배를 가뿐히 초월하며 내력을 뿜어냈다. 그건 기적이란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랜드리올은 피식 웃으며 다시 내면으로 가라앉았다.

<보았는가. 이것이야말로 왕 된 자의 기개다. 저들은 죽음의 공포를 초월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전사는 강인하지.>

‘…네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싸우다 죽으라니, 그건 좀 심하잖아.’

<또 머저리 같은 소릴 하는군. 그럼 전투를 앞두고 절대 죽지 말라고 명하란 말이더냐? 몸을 사리는 전사는 아이를 지키는 어미의 가녀린 주먹에도 맞아 죽는 법이다.>

고병갑은 말을 삼켰다. 아니, 이 경우엔 마음을 삼켰다.

그러자 랜드리올이 측은한 어조로 덧붙였다.

<상처받는 게 무서우면 어찌 싸우고, 싸우는 게 두려우면 무엇을 쟁취하겠는가? 제왕은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천하를 움켜쥐는 존재다. 하나 그렇기에 손에 쥔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존재기도 하다. 짐의 경우엔 충성스러운 부하 수십만을 잃고, 마지막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마저 잃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너졌는가? 나는 되레 일어나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네가 진정으로 왕이 되길 원한다면 소실의 고통을 이겨 내야만 한다. 그것이 왕 된 자의 숙명이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넌 이만 내려가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 해 주지. 내 힘과 도움을 받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마라. 그것은 너를 강인하게 만들어 줄 무기일 뿐이다.>

랜드리올은 그렇게 말하고 정말로 사라졌다.

고병갑은 긴 한숨을 뱉었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어, 아주 끝내주는 기분이다.」

「예?」

「싸우자!」

알샤론이 몸을 움직였다. 일천을 상회하는 신성군도 대열을 갖춰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바몬드.」

「예!」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라. 네 사명은 단 한 명이라도 덜 죽게 하는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해라.」

「제 뼈가 삭아 없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키리얀, 투르카.」

「예!」

「말씀하십시오!」

「일선에서 군을 이끌어라. 알샤론을 따르는 저 조그만 것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려.」

「알겠습니다!」

「맡겨만 두십시오!」

고병갑이 한 발 내디뎠다. 자연히 도란과 도르마가 따라붙었다.

「너희 둘은 내게 붙어라. 함께 적장의 목을 베자.」

「네! 로드!」

「보좌하겠습니다.」

고병갑이 일갈했다.

「가자!」

「우아아아아!」

「케르르륵!」

고블린들이 뛰쳐나갔다. 고병갑은 가장 앞에 서서 제일 큰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신의 군세. 그리고 왕의 군세.

두 거대한 산이 격돌했다.

* * *

쵸비는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밭을 매던 농부였다. 그의 임무는 할당받은 고구마밭에서 멋진 고구마를 생산해 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재배한 고구마는 제법 우람했다. 아무래도 그는 꽤 괜찮은 농부인 듯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쵸비는 전사였다.

적을 죽이고 왕을 지키는 아스빌람의 전사.

「케르륵!」

홉고블린인 쵸비는 다른 동족들에 비해 특출 난 전투 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성실성만큼은 자랑할 만했다.

그는 숙련된 솜씨로 창을 내질렀다. 그의 창날이 신성군의 방패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적의 목을 꿰뚫었다.

대열의 한 부분이 무너졌다. 쵸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칼날이 날아왔다. 쵸비는 창을 넓게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떨쳐 냈다. 동족들이 침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벌어 준 것이다.

쉬익!

「캭!」

화살 한 발이 날아와 어깨에 꽂혔다. 뒤이어선 칼날이 날아들어 팔을 깊숙이 벴다. 쵸비가 창을 놓쳐 버렸다.

하지만 그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광포히 울부짖었다.

「케르르륵!」

맹수처럼 적을 덮친 쵸비가 신성군의 목을 물어뜯었다. 로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의 이빨은 적의 살가죽을 너무도 쉽게 꿰뚫었다.

아슈비는 에아를 도와 식당에서 일하는 고블린이었다. 물론 직접 요리를 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낙천적으로 봐준들 그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으니까.

하지만 자이언트 고블린의 강인한 힘은 식자재나 장비를 옮기는 일에 큰 효용을 발휘했다.

덧붙여 적의 대가리를 깨부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우어어어!」

신성군의 칼날이 아슈비의 옆구리를 스쳤다. 아슈비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적의 머리통과 왼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양팔을 넓게 벌렸다.

「크… 커컥!」

「우아아아아!」

아슈비에게 붙잡힌 신성군은 산채로 목이 뽑히는,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을 하였다. 물론 그 사실을 인지할 겨를도 없이 죽어 버렸지만.

아슈비가 눈을 부라리며 다음 표적을 살폈다. 그때였다. 멀리서 빛이 번쩍이더니 일순 화살 한 발이 날아들었다.

아슈비는 황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짙은 농도의 카르마 화살은 팔을 꿰뚫고 오른쪽 눈마저 꿰어 버렸다.

아슈비가 보는 세상의 절반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찌릿한 통증은 투쟁심을 키울 뿐이었다.

「우워어어어!」

「우으? 커헉!」

눈 하나를 내줬으니 적의 머리통 하나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으리라.

아슈비는 자신을 쏜 궁사를 찾아가 목을 뽑아 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아슈비를 뒤덮었다.

그가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로드께선 적의 피로 축배를 들자고 하셨는데… 피는 비릿해서 별맛이 없었다.

아슈비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음으로 머리통을 뽑을 상대를 탐색했다.

고병갑은 뒤쪽 상황을 흘긋 살폈다. 신성군과 고블린이 마구 뒤엉켜 혼돈을 이루고 있다. 그 모양새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같기도 했다.

분잡하여 적아(敵我)가 쉽사리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도 고블린들이 밀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수적으로 세 배 넘게 차이 나고, 그렇다고 성을 끼우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막상막하라니. 어쩌면 이 밤은 기적을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그 기적을 완성하려면 내가 더 분발해야겠지.’

고병갑은 본인의 전투에 집중했다.

신성 전사 알샤론은 강력했다. 헌터 등급으로 치면 SS급에 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듭된 전투로 인해 녀석도 정상의 상태는 아니었다. 더욱이 이번엔 대진운조차 좋지 않았다.

「쿠오어―!」

「도르마!」

「예!」

도르마가 사방으로 힘을 방출했다. 이윽고 땅에서 새카만 덩굴이 무더기로 솟아올라 알샤론에게 뻗어 나갔다.

놈은 폴암을 휘두르며 몇 개는 떨쳐 냈다. 하지만 남은 덩굴이 구렁이처럼 놈의 팔과 다리를 옭아맸다.

아무리 강한 적인들 움직이지 못하다면 단단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고병갑과 도란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구속된 알샤론을 갉아먹었다.

도르마가 보조하고 고병갑과 도란이 맹공을 펼치는, 그런 양상의 전투가 수십 분이고 이어졌다.

알샤론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건 발악에 불과했다. 승기는 이미 이쪽으로 기울었다.

전장의 피 내음이 점차 짙어졌다. 고병갑은 끝을 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그가 검으로 내력을 모았다. 황금빛 내력이 넘실거리더니 곧 어떤 형을 갖추었다. 그건 큼지막한 망치였다.

자루 길이만 2미터에 이르는 망치를 단단히 쥐고, 고병갑이 날아올랐다.

‘이런 단단한 갑옷을 걸친 놈에겐……!’

그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때 도르마에 의해 구속됐던 알샤론의 왼팔이 해방됐다.

놈이 고병갑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쿠오오오오!」

거인의 주먹이 날아든다. 주먹에는 질릴 만큼 짙은 농도의 카르마가 덧씌워져 있었다.

고병갑은 공중에 떠 있는 터라 피하기도 마뜩잖았다.

‘저건 위험하겠는데? …염병!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고병갑도 기세를 굽히지 않고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섬광 하나가 번쩍이며 튀어 올랐다.

도란이었다.

「로드! 계속 가세요!」

「잘했다!」

도란이 ‘절삭’을 사용해 알샤론의 왼팔을 베어 냈다. 길이 트였다.

고병갑은 알샤론의 머리 위로 뚝 떨어지며 망치를 내리쳤다.

만다라 기사단의 비술.

여덟 무예 중 네 번째 형식.

「폭렬!」

쩌적! 쾅!

망치와 투구가 격돌하며 엄청난 폭음을 발생시켰다. 충격파가 온 사방으로 퍼졌다. 대지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

알샤론의 머리통, 아니 상체 전반부가 통째로 날아갔다. 놈은 이제 입이 없으니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알샤론의 거대한 몸뚱이가 힘을 잃고 넘어갔다.

그렇다. 놈은 죽었다.

알샤론이 죽자 그 휘하에 있던 신성군도 먼지가 되며 흩어졌다. 한창 전투에 몰입했던 고블린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좌우를 살폈다.

고병갑은 알샤론의 시체 위로 쓰러졌다. 큰 기술을 몇 번이나 사용했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널브러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쟁을 시작한 게 자신이니 끝맺음도 자신의 몫이다.

그가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쪽을 우러러보는 고블린들을 향해 선포했다.

「전투가 끝났다. 우리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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