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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20화 (120/151)

120화 신의 군세, 왕의 군세

「로드! 정신이 들어요?」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도란의 목소리였다. 시야가 뿌옇다. 고병갑은 눈을 찌푸리며 서너 개쯤 되는 초점을 하나로 맞추었다.

몇 명의 고블린이 보였다. 자신을 둥그렇게 감싼 모양새가 어째 모빌 같기도 했다.

「으윽…….」

「그냥 누워 계십시오.」

바몬드가 말했다. 고병갑은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푹신한 침대에 한껏 몸을 누인 그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어디야?」

「진료소의 병상입니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2시간쯤입니다.」

「제길.」

고병갑이 상체를 일으켰다. 지척에 있던 도란이 달라붙어 도와주었다.

몸 상태는 좀 나아졌지만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그는 한동안 심호흡하며 심신을 다스렸다.

「로드시여, 대체 무슨 일을 당하신 겁니까?」

도르마가 심히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왔다. 고병갑은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을 흐렸다.

「전투가 있었다…….」

「바몬드가 이르길 자칫 위험할 뻔했다고 했습니다. 로드시여, 그리 다급한 상황이었다면 어째서 저희를 호출하지 않으신 겁니까?」

「맞아요! 로드는 왜 항상 혼자 싸우다가 잔뜩 다쳐서 오는 거예요? 로드가 위급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이라고요!」

고병갑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번뜩 물었다.

「내가 다쳤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렸나? 엄마한테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몬드가 바로 대답했다.

「몇몇 간부만 알고 있습니다. 왕대비께는 알리지 않았지요. 그분은 지금 주무시고 계실 겁니다.」

「후… 잘했다.」

「로드,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하셨길래 이렇게 다쳐서 오신 거냐고요.」

고병갑은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전투가 있었어. 신성군과 싸웠지.」

「시, 신성군!?」

「마드무트의 병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 고블린들은 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도 폭주하지 않았다.

랜드리올과 접전 후에 알게 된 건데, 고블린들은 신에 대한 기억이 봉인된 상태였다. 그들이 신의 공포에 잠식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튼 지금은 그 금제가 풀렸다.

「혼자 싸우셨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다치신 거고요?」

고블린들은 거의 원망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걱정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기에 고병갑은 측은해졌다.

「아니, 인간들이랑 같이 있었어. 그래서 부르기가 마뜩잖았고, 또 그놈들이 너무 강…….」

그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신성군이 너무 강해 너희가 다칠까 우려됐다.’라고 말하려 했다. 그 순간 랜드리올이 했던 말이 뇌리를 자극했다.

-네놈은 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또 신하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고병갑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눈을 감으면 랜드리올과 독대했던 순간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로드시여,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신성군은 모조리 잡아내신 겁니까?」

「도르마…….」

고병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무참히 짓밟혔다.」

「패, 패배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응, 동료들은 전부 붙잡혔고 나만 도망쳐 나왔어. 2시간이나 기절해 있었다니, 벌써 몇 명은 죽었을 수도 있겠군. 젠장!」

그가 침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매트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그때 투르카가 한발 앞서며 소리쳤다.

「로드의 동료라면 저희에게도 귀인입니다. 당장 병사들을 끌고 가서 구해 내시지요!」

「아니, 아니… 그렇게 쉽게 결정할 사안이…….」

고병갑은 또다시 말을 삼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고블린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고병갑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대체 왕이란 게 뭐냐?」

의도한 것은 아니다만 그의 시선은 도란에게 향하고 있었다. 덕분에 도란은 로드가 자신에게 질문한 것으로 이해했다.

「네? 왕이요? …그, 그야 로드죠.」

「아니, 나는 그걸 물은 게 아니야. 도르마.」

「예, 로드시여.」

「왕이란 뭐냐?」

도르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녀석은 눈을 감고 말을 정리했다. 자연히 장내에 침묵이 돌았고, 다들 도르마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얼마 뒤 도르마가 입을 열었다.

「왕은 길의 제일 앞에 선 자입니다. 그래서 왕은 등대이며 별자리입니다. 등대는 어둠 속에서 뱃사공에게 길을 알려 줍니다. 별자리는 밤 숲을 헤매는 행인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등대와 별자리는 항상 같은 곳에 서서 변함없이 사람들을 이끌어 줍니다. 왕도 같습니다. 왕은 언제나 최선두에 서서 뒤따라오는 이들이 탈선하지 않도록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로드께서는 훌륭한 왕이십니다.」

고병갑이 피식 웃었다. 그가 이번엔 키리얀을 보았다. 키리얀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왕은 가장 아름다우며 언제나 우러러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고, 어떤 상황에서도 한 점 의심 없이 따를 수 있습니다.」

키리얀을 뒤이어 한 명 한 명 자신의 소견을 말했다.

한 바퀴 빙 돌더니 투르카 차례가 되었다.

「저는 머리가 나빠서 로드께서 하신 질문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왕이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구나.」

「로드! 로드! 나 다시 말할래요!」

「말해 봐.」

「흠흠!」

도란이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치 웅변대회를 하듯 낭랑히 말했다.

「로드는 빛이에요. 우릴 비추어 주는 빛 말이에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지 않는 내일은 상상할 수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빛을 잃은 로드도 상상할 수 없어요. 아니, 상상하기 싫어요.」

고병갑은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이를테면 울컥거림이었다.

「너희… 나로 인해 아프고, 상처 입고 심지어 죽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냐?」

「로드시여, 로드께서 저희를 아끼신다는 걸 잘 압니다. 그것을 알기에 제가 로드를 대신해 아프고 상처 입을 수 있다면 일천 번을 고쳐 죽은들 절대로 괴롭지 않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드를 위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프고 상처 입을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 닥쳐오기 전에 내가 다 처리할게요! 나는, 아니 우리는 언제까지고 로드랑 행복하게 살 거예요!」

고병갑은 꼴사납게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만연했다.

그가 말했다.

「다들 고맙다. 잠깐 갔다 올게. 호들갑 떨지 말고 있어.」

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심상 세계로 빠져들었다.

자욱한 어둠이 공간을 감싸자 기다렸다는 듯 랜드리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보아하니 마음이 정리된 모양이구나.>

「어.」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겠노라. 네놈은 보모가 될 작정이냐, 아니면 제왕이 될 작정이냐?>

「나는 아스빌람을 일으킬 왕이 되겠다. 내 뒤를 받치는 어린 것들을 위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어야 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라. 그 말은, 이를테면 지상의 신이라도 되겠다는 것이냐?>

「필요하다면 신이라도 되어야겠지.」

「흐하하하! 훌륭하도다,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랜드리올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저벅저벅 다가와서 고병갑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은 자칭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한때 지상의 신이라 불린 사내의 말이니 귀담아듣도록 하지.」

<입발린 소리도 제법 하는군.>

고병갑은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번엔 담배가 있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후발주자로서 선배에게 조언을 좀 듣고 싶군. 그래서 신성군 떼거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앞서도 말했을 텐데. 졸은 졸로, 장은 장으로 잡는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단신으로 군단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이야.>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전투력에서 밀리는 게 현실이다. 현재의 고블린들로는 신성군을 당해 낼 수가 없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꼴이라고.」

<어리석긴! 고작 달걀이라고?>

「뭐?」

랜드리올이 먼 산을 보았다. 이곳은 암흑뿐인 공간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먼 산을 보고 있었다.

<아스빌람은 대대로 훌륭한 장수를 배출해 왔다. 특히 나와 동시대에 살았던 12명의 장수는 영웅이라 칭송받을 정도였지. 그들은 나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백전불패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그런 이들을 두고 달걀이라 칭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악평이다.>

랜드리올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알샤론을 쓰러뜨린 건 하슘블란트였지. 그가 그리워지는구나.>

「…알 것 같다.」

고병갑은 몸을 돌리려 했다. 랜드리올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하아, 네놈은 짐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것이냐? 그것은 네가 사용할 게 아니다.>

「…너 독심술도 쓸 줄 아냐?」

<여기는 네놈의 심상 세계가 아니더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고병갑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떠나기 전, 랜드리올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명심해라. 설령 한낱 달걀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썩은 달걀이 될 수도, 적의 심장을 꿰뚫는 암기가 될 수도 있다.」

「명심하지.」

고병갑이 다시 눈을 떴다.

* * *

발타드렌의 고요한 밤.

500가량의 고블린이 광장에 모였다. 엄선하고 엄선한 최정예 병력이다. 꽤 많은 인파였으나 그들은 밤의 고요를 깨지 않았다.

다만 투지로 불타는 두 눈만은 밤의 한 자락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정면에는 고병갑이 서 있었다. 그 앞으로 다섯 명의 고블린이 섰다.

도란, 도르마, 키리얀, 투르카, 바몬드였다.

고병갑의 주위로 다섯 개의 발광체가 떠 있었다. 도깨비불 같기도 한 그것은 영롱한 빛을 발산했다.

「도르마.」

「예, 로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 줄 테니.」

「로드께서 곁에 있으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명하시면 따를 뿐입니다.」

「그래.」

고병갑이 도르마의 심장부로 발광체 하나를 갖다 댔다. 곧 도르마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는 얼마간 몸을 떨다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다음 순간엔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고병갑이 말했다.

「밑으로 내려가라.」

「…당신은?」

「이곳은 더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러니 내려가서 조용히 영면에 들어라, 하슘블란트.」

도르마.

아니, 하슘블란트는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고병갑의 가슴팍에 대고 말했다.

「제왕께서 그 안에 계시는군요. 제왕이시여, 제 말소리가 들리십니까?」

하슘블란트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고병갑의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하슘블란트, 나의 주술 스승이여. 이런 재회도 나쁘지만은 않군요.」

「평안해 보이시니 안심입니다.」

「그렇소, 썩 괜찮은 느낌이오.」

「새로운 왕이 내게 내려가라 명합니다. 소인도 당신의 뒤를 따르면 되는 것인지요?」

「그러도록 하시오. 우리는 이만 쉬도록 합시다.」

「알겠습니다.」

하슘블란트는 고병갑을 한 번 쳐다보고는 꾸벅 인사를 올렸다.

직후 도르마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헉! 허억, 허억…….」

「도르마냐?」

「그렇… 습니다. 제가 저 깊숙한 곳에서 본 자가 그자가 맞습니까?」

「맞아, 희한한 양반이더군. 그나저나 어때. 뭔가 달라진 게 느껴지냐?」

도르마가 제 두 손을 내려보며 감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대답했다.

「믿기지 않습니다. 이 힘, 이 지식.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좋다.」

고병갑은 뒤이어 다른 이들에게도 영혼을 주입했다.

도란에겐 검신 아르히의 영혼을.

키리얀에겐 뇌제 가이안느의 영혼을.

투르카에겐 군단의 심장 트로바틴의 영혼을.

바몬드에겐 군단의 날개 미하일의 영혼을.

‘랜드리올이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군.’

랜드리올의 협조 덕분에 영혼의 본 주인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랜드리올의 말 한마디에 순종하며 의식 저 아래로 내려갔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향해 조용히 외쳤다.

「신아스빌람의 다섯 영웅이 오늘 탄생했다.」

고블린들은 조용히 투지를 불태우며 침묵의 함성을 질렀다.

이윽고 고병갑이 저쪽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외쳤다.

「나를 따라라. 오늘 우리는 신성을 사냥할 것이다.」

왕의 군세가 출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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