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신의 군세, 왕의 군세
일곱 번째 신성 전사 알샤론. 놈이 태동하자 고병갑은 저절로 뒷걸음질 쳤다. 그는 끔찍한 기시감에 시달려야 했다.
‘분명 죽었을진대 어떻게?’
사라온 군단은 엄청난 희생을 치러 총 일곱 명의 신성 전사를 잡아냈다. 그리고 그 대미를 장식했던 게 바로 알샤론이다.
‘대적할 수 없는 적이다.’
놈들의 괴팍함은 여느 몬스터와 비교를 불허한다. 그야말로 궤가 다르다, 궤가.
“칫!”
심승섭 이를 갈며 전격을 쏘았다. 그 순간. 알샤론의 왼팔로 빛이 모이더니 둥근 방패를 만들어 냈다. 놈은 방패를 이용해 간단히 전격을 막았다.
뒤이어 알샤론의 오른팔로 빛이 모였다. 빛은 총장 15미터짜리 폴암으로 탈바꿈했다. 수천 사라온의 목을 떨쳐 냈던 그 무기다.
“저거 위험해.”
정선경이 으르렁댔다. 그녀는 바닥에 떨군 자신의 양날 도끼를 흘겨보았다. 그녀가 빠르게 자리를 박차 도끼를 집어 들었다.
“조심해!”
고병갑이 비명 질렀다. 뾰족한 폴암의 끝이 정선경을 노리고 뻗어 갔다. 그녀는 침착하게 도끼를 휘둘러 받아쳤다. 하지만 완벽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곤두박질쳤다.
“누나!”
“…제기랄.”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던 모양이다. 정선경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위야!”
넓적한 폴암의 날이 정선경의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그녀가 얼른 도끼를 치켜들었다. 곧 두 날붙이가 격돌했고, 정선경의 하반신이 땅에 잠겼다.
두 번째 공격이 있기 전, 고병갑이 날쌔게 돌진했다. 훌쩍 도약한 그가 알샤론의 면상으로 검기 다발을 쏟아 냈다.
검기가 폭발을 일으키자 놈이 휘청였다. 심승섭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같은 자리에 전격을 퍼부었다.
「쿠오어어!」
“뒤져―!”
눈 깜짝할 사이 접근한 정선경이 온몸을 돌려 가며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이 놈의 발목을 때려 맞추자 알샤론은 버티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정선경은 쉬지 않고 뛰어올라 도끼를 치켜들었다. 가공할 카르마가 도끼로 집결하자 알샤론의 폴암과 비견해도 뒤지지 않는 거대 흉기가 탄생했다.
양날의 너비가 8미터는 될 도끼가 뚝 떨어졌다. 알샤론은 즉시 방패를 뻗어 공격을 받아 냈다.
쩌적!
“큭! 꺄악!”
실체화한 카르마 도끼가 속절없이 깨져 나갔다. 방패는 그대로 정선경을 후려쳤다. 그녀가 요란하게 추락했다.
고병갑은 얼른 그녀를 막고 섰다.
“창훈 씨!”
“알고 있십니더!”
한창훈이 치유 능력을 발휘해 정선경을 회복시켰다. 그사이 알샤론이 몸을 일으켰다.
고병갑은 공격이 날아오리라 예상하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의외의 광경이었다. 알샤론의 몸, 구체적으로 짚으면 방패를 쥔 왼팔이 먼지가 되며 흘러내리고 있다.
「쿠오……?」
투구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알샤론도 당황한 듯 보였다.
“퉤! 저 덩치 새끼, 맷집은 별로인가 본데? 해볼 만하겠어!”
정선경이 피 묻은 입가를 훔치며 투지를 불태웠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알샤론을 관찰했다. 이내 뭔가 깨달은 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놈은 지금 완전한 상태가 아니야.’
자세히 보니 놈은 엉망이었다.
휘황찬란하기만 한 줄 알았던 백금색 갑옷은 곳곳에 금이 나 있었다. 비약을 조금 보태자면 부서진 점토 인형을 억지로 붙여 놓은 듯했다.
또한 크기가 작았다. 신성 전사는 본래 50미터도 넘는 거체(巨體)다. 한데 현재 녀석은 기껏해야 7미터쯤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놈은 불완전하다.’
만약 알샤론이 만전의 상태였다면 고병갑 일행만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불완전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충분히 비벼 볼 만하다.
“병갑아! 탱킹 가능하냐?”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저 괴물 새끼 공격 한 번만 막아 줘. 그 틈에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한번 해 볼게.”
“좋아, 가자!”
정선경이 빠르게 내달렸다. 고병갑도 그녀와 나란히 달렸다.
알샤론은 당황하지 않고 폴암을 휘저었다.
“병갑!”
“알았어!”
고병갑은 재빨리 폴암의 궤적을 막아섰다. 그가 내력을 있는 대로 방출했다. 금빛 내력이 큼직한 방패를 만들어 냈다. 찰나의 순간 폴암과 방패가 격돌했다.
“끄으으!”
내력의 방패가 쩍쩍 갈라졌다. 고병갑은 아무리 낙천적으로 봐준들 1초쯤 버텼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S급 헌터에게 1초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니까.
그가 벌어 준 소기의 기회. 정선경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도끼가 다시금 거대 흉기로 변모했다.
알샤론은 덩치에 맞지 않는 날렵함으로 피하려 들었다.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일순 놈이 딛고선 땅에서 전격의 채찍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알샤론의 몸을 단단히 구속했다.
심승섭의 보조. 흠잡을 곳 없는 연계다.
“뒤져어―!”
정선경은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외치며 도끼를 휘둘렀다. 질릴 만큼 거대한 날이 알샤론의 오른쪽 어깨를 성공적으로 때렸다.
도끼날이 어깨를 갈랐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오른팔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쿠오오오!」
알샤론이 고성을 질렀다. 삽시간에 가공할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지척에 있던 고병갑과 정선경은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멀찍한 곳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으윽!”
“끄으으…….”
‘젠장.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진 것 같네.’
정신이 아찔해졌다. 다행히 한창훈이 즉시 치유해 준 덕분에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고병갑과 정선경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전방에선 양팔이 떨어져 나간 알샤론이 괴로운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정선경이 이가 보이게 웃었다.
“좋아! 앞으로 두 번만 더 하면 돼. 저 새끼 다리까지 다 잘라 내고 마지막엔 대가리를 뽑아 버리는 거야.”
이 무렵, 고병갑 일행은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알샤론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어나라.」
놈이 읊조렸다. 아스빌람어를 모르는 이들에겐 그저 뜻 없는 옹알이로 들렸을 거다. 하지만 고병갑은 똑똑히 알아먹을 수 있었다.
알샤론이 일갈한 직후였다. ‘나무’를 구성했던 몬스터들이 꾸물거렸다. 그것들은 융해하더니 밀가루 반죽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회갈색 반죽들이 제각기 형을 잡았다.
‘이, 이놈들은…….’
그건 족히 2천은 될 병사였다. 덩치는 평범한 인간 수준이나 두르고 있는 무장은 알샤론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신성군!」
「불신자들을 쳐라.」
알샤론의 명령에 신성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놈들은 오와 열을 이루어 돌격해 왔다. 그 모습이 흡사 해일 같았다.
“젠장! 저것들은 갑자기 뭐야?”
“대갈 수가 너무 만십니더!”
“흐아압!”
심승섭이 양팔을 넓게 펼치더니 카르마를 폭발시켰다. 그는 너비가 100미터는 될 법한 전류의 역장을 일으켜 저리로 쏘아 보냈다.
웬만한 떨거지들은 스치기만 해도 재가 돼 버릴 공격. 애석하게도 저들은 떨거지가 아니었다.
「가디언!」
신성군 병사들이 기합을 질렀다. 대열의 일선을 책임지던 병사들이 카르마를 방출하여 보호막을 생성했다.
하나하나가 양질이다. 그런 것이 수백 개가 되니 규모가 대단했다.
심승섭의 전격 공격과 수백의 보호막이 충돌했다. 일부 보호막은 맥없이 박살 났다. 그 뒤에선 신성군은 바싹 구워졌고.
하지만 대다수는 살아남았다.
「아쳐!」
군사가 다시금 기합을 질렀다. 대열의 후미에 있던 병사들이 활시위에 카르마 화살을 걸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쏘아졌다.
“이런 미친!”
“내한테 모이소!”
한창훈이 앞으로 나서며 반구형 보호막을 전개했다.
파파박! 파박!
“으으!”
화살이 소낙비마냥 쏟아져 내렸다. 한창훈은 사력을 다해 보호막을 유지했다. 그때 정선경의 비명이 사람들의 등골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위야! 피해!”
“무, 무슨―큭!”
순식간,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멀찍이 있던 알샤론이 훌쩍 뛰더니 보호막 위로 떨어져 내렸다. 놈의 육중한 발이 보호막을 찍어 눌렀다.
고병갑, 정선경, 심승섭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창훈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짓밟혔다.
“창훈 씨!”
「나이츠!」
어느새 접근한 기사들이 창칼을 휘둘러 왔다.
놈들 개개인의 전투력은 A급 헌터와 비슷했다.
개떼처럼 들러붙는 신성군. 그것뿐이었다면 버틸 수 있었으리라. 다만 거기에 알샤론까지 가세하자 판도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커헉!”
제일 먼저 당한 것은 심승섭이었다. 그는 알샤론에게 걷어차여 수십 미터나 날아갔다. 애석하게도 그를 치료해 줄 유일한 힐러는 이미 바닥과 하나가 된 상태였다.
“젠장! 젠장!”
정선경이 닥치는 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한 번 휘두르면 신성군 예닐곱은 사지를 떨구어 냈다. 하지만 그녀도 끝없는 물량 공세에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고병갑이라고 사정이 낫지는 않았다. 아차, 하는 사이 신성군 궁수가 쏜 십여 발의 화살이 등에 박혔다. 그가 움찔한 틈을 놓치지 않고 무수한 흉기가 몸을 헤집었다.
외마디 비명이 초원을 울렸고, 고병갑 일행은 전멸했다.
* * *
<한심한 놈.>
칠흑의 어둠만이 존재하는 곳. 그곳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고병갑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매우 언짢아한다는 것 말고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한심한 놈, 덜떨어진 자식.>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고병갑은 짜증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아가리 닥쳐, 랜드리올.」
<모질이.>
「닥치라고 했어.」
그가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말을 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뭐지?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고병갑이 눈을 떴다. 사방을 훑은들 보이는 거라곤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그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랜드리올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어딜 봐도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놀리기라도 하듯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사라온은 신의 천적이다. 그 의지를 잇고도 무참히 짓밟히다니. 그것도 고작 반쪽짜리에게 말이야. 정말이지 한심해서 못 봐줄 지경이군.>
고병갑이 사납게 몸을 돌렸다. 그러곤 비아냥댔다.
「난 인간인데.」
<설마 네가 다스리는 것들이 인간이란 말은 하지 않겠지.>
「걔들은 고블린이야. 사라온이 아니고.」
<같잖은 말장난은 집어치우지 그래?>
「제기랄, 왜 네놈까지 나타나서 지랄이야? 그렇지 않아도 신경질 나서 죽겠는데!」
<그래, 나약하단 건 짜증 나는 일이지.>
「염병, …네가 눈앞에서 얼쩡거린다는 건 내가 죽었다는 건가? 그럼 여긴 사후세계 비슷한 곳인가 보군. 생각보다 별거 없구먼.」
고병갑은 혀를 차며 드러누워 버렸다. 랜드리올은 심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 꼈다.
<내가 너 같은 놈에게 당했다니 믿기지 않는군. 하기야 그 조막만 한 계집애가 아니었다면 네놈은 짐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겠지.>
「흥. 패자는 말이 없다, 이런 거 안 배웠어? 죽어도 진즉 죽은 놈이 인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뭣하면 여기서 한판 뜨던가.」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며 랜드리올을 흘끔 훑었다. 2미터도 넘는 거대한 몸뚱이를 가득 채운 근육이 대단히 위협적이다. 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옷이나 입고 있든지. 변태도 아니고 왜 나체로 저런대?」
<헛소리는 그쯤하고 어서 일어나라.>
「뭐? …됐어. 지금 싸울 기분 아니야. 나중에 하자.」
<어서 일어나래도. 더 늦으면 정말로 위험하다.>
랜드리올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병갑은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이 입이 문제다.
「야, 야……. 나중에 하자니까, 나중에―」
<일어나!>
랜드리올이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고병갑은 눈을 떴다.
“허억! 허억!”
시야가 붉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이다. 고병갑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닦아 내려 했다. 하지만 팔이 구속된 터라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뭐가 어떻게 된…….’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언제 해가 저물었는지 어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나무였다. 신성 전사 알샤론이 나온 그 나무 말이다. 자신은 나무에서 뻗어 나온 촉수에 묶인 상태였다.
본인뿐만이 아니다. 모든 헌터가 의식을 잃은 채 나무에 구속돼 있었다.
‘알샤론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샤론을 비롯한 신성군이 보이지 않았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안도를 느껴야 할지, 불안감을 느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경이 누나! 승섭 씨! 창훈 씨!”
그가 목청껏 일행을 불렀다. 하나 그들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목소리부터가 기어들어 갔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숨 쉬는 일조차 고역일 지경이었다.
‘이 촉수가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가?’
느낄 수 있었다. 거머리처럼 몸을 감싼 촉수가 자신의 힘을 흡수해 가고 있음을.
지금 힘으로 촉수를 끊어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달아날 길은 있다.
그는 문을 열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철퍼덕!
“끄으…….”
그가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도통 몸을 가눌 수가 없어 바닥을 꾸물거리기만 했다.
설상가상 의식까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힘을 빨렸어. 누가… 누가 좀 도와줘…….’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떴다. 그때 머리맡으로 불빛이 어른거렸다. 잠시 후 목소리도 들려왔다.
「로드?」
고병갑은 꾸역꾸역 고개를 들어 소리 난 곳을 보았다.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비스트 고블린 한 명이 횃불을 든 채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곧 녀석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로, 로드시여!」
가가브라는 이름의 비스트 고블린은 헐레벌떡 달려와 고병갑을 부축했다. 그리고 사방에 대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여기 로드가 쓰러지셨다! 누구 없나! 로드가―!」
「쉿. 조용히… 조용히 해, 인마…….」
「로드시여! 괜찮으신 겁니까? 몸이 엉망진창입니다!」
가가브는 거의 울려고 했다.
‘엄마한테 이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이런 와중에도 고병갑은 엄마 걱정을 했다.
「일단 나를 좀 옮겨다오.」
「로드의 거처로 가면 되겠습니까?」
「아니. 바몬드, 바몬드의 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가가브가 얼른 고병갑을 둘러업었다. 그리고 인생에 다시 없을 속도로 내달렸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바몬드의 거처에 도착했다. 가가브가 두세 차례 문을 두들기자 바몬드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 주었다.
「이 밤중에 무슨… 헉! 로드시여!?」
「바몬드! 로드께서 위급하시다. 얼른 치료를!」
「어, 어서 데리고 들어오시게!」
고병갑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바몬드는 편평한 곳에 그를 눕히고 급히 치유에 돌입했다. 가가브가 지척에 서서 초조한 눈빛을 보냈다.
「어, 어떠냐? 로드께서는 괜찮으신 건가?」
바몬드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상처도 상처인데 기력이 너무 쇠하셨어. 당최 무슨 일을 당하신 건지…….」
「로드께서 잘못되시는 건 아니겠지? 바몬드, 제발 로드를 살려 줘!」
바몬드가 끙 앓았다. 그러더니 번뜩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에아! 에아를 찾아가시게.」
「에아는 왜?」
「식당의 식자재를 관리하는 게 그녀지 않나. 그녀에게 드래곤 고기를 찾아 달라고 해. 그 고기가 있어야 해!」
「아, 알겠다!」
가가브가 헐레벌떡 튀어 나갔다. 바몬드는 울먹임을 참고 치료에 전념했다.
「로드시여… 눈을 뜨십시오. 로드시여…….」
* * *
「또 여기야? …제기랄, 또 만나는구먼.」
<짐이라고 네놈 얼굴을 보는 게 반가울 거라 생각지 말라.>
「피차일반이네.」
고병갑은 콧방귀를 뀌며 주저앉았다. 랜드리올은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심한 놈.>
「젠장! 그 소리 좀 관두면 안 되냐?」
<네놈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무슨 도리로?>
「참나, 자기가 뭐 보태 준 게 있다고.」
<짐이 보태 준 게 없다고!>
랜드리올이 사나운 기세로 말했다. 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고병갑의 멱살을 끌어 올렸다.
<다시 말해 봐라. 내가 보태 준 게 없다고?>
「이거 안 놔? 또 죽고 싶냐?」
고병갑도 만만치 않게 살벌한 기운을 뽐냈다. 그가 랜드리올의 팔을 뿌리쳤다.
랜드리올은 세모 눈을 뜨고 이쪽을 째려보다가 짙게 한숨 쉬었다.
<왜 짐이 준 힘을 사용하지 않는 거지? 일부러 정수까지 떼어 줬더니만 묫자리까지 지고 갈 생각이었나?>
「개소리도 맥락을 좀 갖춰 줬으면 좋겠는데.」
<시치미 떼지 마라. 네가 은연중에 나를 거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고병갑이 말을 삼켰다. 그는 스리슬쩍 시선을 피하며 습관적으로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제기랄, 담배가 없다.
<나에 대한 증오 때문인가? 그게 목숨보다 소중한가?>
고병갑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랜드리올은 계속 말했다.
<너와 함께 있던 인간들, 곧 죽을 것 같더군. 그들을 구할 심산이 아니더냐? 지금의 너라면 전과 다를 바 없는 전철을 밟을 텐데.>
「제길, 그럼 네가 알려 줘! 어떻게 하면 그 괴물 같은 것들을 잡을 수 있지?」
랜드리올이 고병갑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전투의 기본도 모르는 놈 같으니. 졸은 졸로, 장은 장으로 잡으면 될지어다. 네놈에게도 군세라 칭할 것이 있지 않으냐?>
「…고블린들을 대동하란 말이야?」
<그것 말고 네놈에게 내세울 것이 더 있단 말이냐? 짐조차 거부하고 네게 붙은 것들이다. 그들의 충성심은 믿어 의심치 않을진대?>
「아무렴 잘 알지. 애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병갑은 고블린들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한순간 그의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안 돼. 나 때문에 그 녀석들이 죽거나 다치는 게 둘 수는 없어.」
<뭐가 어째? 이런 등신 같은 놈을 봤나!>
랜드리올이 호통쳤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암흑의 공간이 통째로 울릴 지경이었다. 그의 분노에 살갗이 따끔할 지경이었다.
랜드리올은 쉬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네놈은 왕을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또 신하는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
「뭐?」
<왕은 지평을 비추는 등불이요, 신하는 불꽃에 몸을 불사르는 땔감이다. 또한 왕은 가장 높은 곳에 선 자요, 신하는 제 등을 내주어 왕을 치켜세우는 발판이다. 저 스스로 타오르는 왕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존재한다 쳐도 가장 먼저 사그라질 불꽃일지어다. 저 스스로 마천루에 닿는 왕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 쳐도 그릇된 착각이나 오만에 빠진 어리석을 자일 것이다.>
「…….」
<내 너의 자질을 인정하여 일선 물러났으나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너는 네 아래 것들을 보살피는 보모인가? 아니면 만민 위에 군림하는 제왕인가? 잘 생각하고 답하여라!>
「나는…….」
고병갑이 대답을 지체함에 따라 랜드리올의 얼굴도 울긋불긋해졌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랜드리올이 분에 찬 한숨을 연신 뱉어 내더니 말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마. 마음이 정리되면 다시 나를 찾아오라.>
새카맣던 공간이 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랜드리올은 어둠에 휩싸여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고병갑은 수많은 고블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