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예상치 못한 적
‘제기랄. 저건 대체 뭐야?’
앞의 참상은 끔찍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생기를 잃은 채 굵직한 촉수에 휘감긴 헌터들. 마치 파리지옥에 빠진 곤충 같은 모습이다.
고병갑은 좀 더 면밀하게 상황을 살폈다. 몬스터의 육신으로 이루어진 저 거대한 나무를 제외하면 다른 몬스터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기괴한 나무 그 자체였다. 나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융합한 융합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히 살아 있었다.
쉴 새 없이 깜빡이는 눈동자. 이따금 뻣뻣하게 치솟곤 하는 사지. 잎사귀처럼 윗동을 덮은 몬스터는 군체를 이룬 지렁이 같았다.
고병갑은 저런 게 존재한다는 말조차 들어 본 적 없다. 아니, 저런 괴상한 것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저… 저 사람들. 다 죽은 건 아니겠죠?”
정선경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렸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헌터에게도 저 기괴한 나무는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살아 있십니더.”
한창훈이 단호한 어투로 답했다. 평소 느긋한 인상인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몹시 냉철해 보였다.
“지는 마 알 수 있십니더. 저 사람들. 아직은 살아 있구만요. 지금 구하면 살릴 수 있을 낍니더.”
“그럼 당장 가요! 얼른 가서 다 건져 오자고요.”
“아니요. 그대로 있으세요.”
심승섭이 조용히 정선경을 제지했다.
“S급 헌터가 무려 열일곱이에요. 그들이 당해 내지 못한 괴물이 저기에 있다면, 우리들도 똑같이 당하겠죠.”
“그렇다고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요.”
심승섭은 입을 다물고 몇 초간 고민하다가 말했다.
“기척을 최대한 감추고 여기 있으세요.”
그가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을 멀뚱멀뚱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내가 저것의 주의를 끌어 보죠.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해 볼 수 있겠네요. 내 쪽으로 어그로가 끌리거나, 무반응하거나. 전자의 경우라면 계속 숨어 있으세요. 괜히 같이 휘말릴 필요는 없으니까. 후자라면 접근해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겠네요.”
“지금 그쪽이 희생양이 되겠다는 말이에요?”
“당신 말처럼 구경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이봐요. 잠깐!”
사람들이 채 붙잡기도 전에 심승섭은 훌쩍 도약했다. 정선경은 서둘러 그를 따라가려 했으나, 고병갑이 막아 세웠다.
“이거 놔! 잘못되면 저 인간 혼자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러면 뭐? 다 같이 죽자고?”
“뭐? 야, 야 너…….”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누나나 나나 용기 내지 못할 때 승섭 씨가 나선 거고. 승섭 씨 말마따나 괜히 같이 휩쓸려 죽을 필요는 없어. 일이 잘못되면 우리 셋이 머리 맞대고 다음 방도를 찾는 게 맞지 않겠냐고.”
정선경은 대답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무렵 이미 심승섭은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일행과 거리를 벌려 나무의 왼편으로 향했다. 적당한 자리를 잡고 서서는 카르마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곧 그의 손바닥으로 방대한 전류가 모여들었다.
전신주를 가로로 눕힌 듯 거대한 전류의 창이 삼엄한 살기를 뽐낸다.
-찌르르르!
귓전을 후벼 파는 고음을 내며, 전류의 창이 뻗어 나갔다. 그것은 나무의 밑동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바싹 탄 고깃덩이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파여 소실된 부분에선 거무튀튀한 혈액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정적.
고병갑 일행도, 심승섭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나무 쪽 움직임을 살폈다. 그 순간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아…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예?”
“그런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휴우……. 염병.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무는 공격을 받았음에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심승섭이 제시했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에 해당한 셈이다.
저 멀리 있는 심승섭이 일행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정선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됐어! 얼른 가서 사람들을 구하자!”
“그라입시다. 그런데 사람들을 구한다 쳐도 여서 나갈 수가 없으니 우짠답니까?”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예? 우째 말입니까?”
“그건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사람들부터 건져 내죠.”
“아, 알겠십니더.”
고병갑 일행이 심승섭과 다시 합류했다. 그들은 경계의 기색을 늦추지 않고 나무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나무는 먼발치에서 볼 때보다 훨씬 기괴했다. 나무줄기를 구성하는 몬스터들은 맹목적으로 수족을 허우적댔다. 한두 마리면 모를까. 수천 마리가 그 주접을 떨어 대니 욕지기가 치솟을 지경이다.
“으 역겨워. …야 병갑. 너 뭐 해?”
정선경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무 밑동에 서서 그것을 쓰다듬고 있었다.
「께… 께르륵…….」
나무의 일부가 된 몬스터 중에는 고블린도 있었다. 어떻게든 고블린만 도려내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 다시 말해, 나무의 속은 이미 온갖 몬스터로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고병갑은 고블린을 보며 분노와 울컥거림을 느꼈다.
「미안하다. 내 능력으론 너를 구할 수가 없구나.」
“병갑, 뭐 하냐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자, 퍼뜩 사람들 건져 냅시다.”
네 사람은 나무를 타고 올랐다. 몬스터의 팔과 다리 등을 잡아 가며 등반하는 일은 조금 다른 의미로 고역이었다.
일행은 차근차근 사람들을 구출해 내기 시작했다. 촉수에 휘감긴 이들은 전부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한 명 한 명 조심스레 옮겨야 했다. 시시각각 헌터들이 쌓여 갔다.
세 사람이 사람들을 이고 오면 한창훈은 열과 성을 다해 그들을 치료했다.
이미 죽은 사람도 적잖이 있었다. 보통 A급 이하 헌터들이 그랬다. 그들은 나무에 모든 양분을 흡수당해 바싹 말랐고, 그래서 슬쩍 만지기만 해도 육신이 바스러졌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사람들을 구출하는 작업이 끝났다.
한창훈이 난색을 표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기… 돌아뿌겠네.”
“왜 그러십니까?”
“상처는 다 치료했십니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상처가 문제가 아니라예. 생명력 자체가 워낙 낮아져서 거의 임종 직전 노인 수준이다 이 말입니다. 아마 당분간은 의식 불명 상태로 계속 있겠지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실 이 사람들 전부 일류 헌터니까 잘 먹고 잘 자기만 해도 저절로 회복할 낍니더. 문제는 여건이 마땅치가 않다는 거지예. 당장 식량만 해도 두 끼 분량뿐 안 남지 않았습니까.”
“흠.”
고병갑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정선경이 말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사람들을 옮겨요.”
“어디로요?”
“처음 들어왔던 곳이요. 병갑이가 나갈 수 있는 방도가 있댔어요. 그치?”
“어. 짐작되는 게 있긴 해.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해 주지 그랬어요.”
심승섭이 말했다. 빈정거리는 어투가 아니었기에 고병갑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방금 생각나서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심승섭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널브러진 사람들을 보았다.
“하지만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 옮기죠? 여기 누워 있는 사람만 백오십은 될 텐데요. 듣자 하니 얼마간은 깨어날 것 같지도 않고.”
“하아……. 오래 걸리긴 하겠죠. 그러니까 하려면 빨리해야지 않겠어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이런 발상은 어떨까요.”
“뭐가요?”
“나는 이곳을 일종의 이면 세계라고 생각해요. 한번 발을 들이면 도로 나갈 수 없으니 던전에 가깝겠고요. 그렇다면 보스 몬스터도 있겠죠.”
그가 손을 뻗어 나무를 가리켰다.
“저걸 한번 부셔 보는 건 어떨까요. 잘하면 별 수고로움 없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
정선경은 손가락까지 튕기며 감탄했다.
“그거 괜찮은데요? 그럴 듯해요.”
“맞네예. 여기가 던전이라 치면 보스도 있을 끼고, 암만 둘러봐도 저것보다 괴상한 건 없으니 잘하면 탈출할 수도 있겠십니더.”
“흐음.”
찬성하는 두 사람과 달리 고병갑은 회의적이었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다. 하지만 괜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 역시 들었다.
“저는 좀 걱정되는군요. 괜히 저것을 자극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극이요? 글쎄요. 보셨다시피 저것은 저희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어요.”
“맞아, 병갑아. 촉수 잘라 가며 사람들 빼낼 때도 꿈쩍도 안 했잖아. 그런데 인제 와서 뭘 하겠어?”
“그건 그렇긴 한데…….”
“사람들을 벽까지 옮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돼요. 왔다 갔다 하는 데만 이틀이죠. 이 사람들을 모조리 옮기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열흘은 걸릴 텐데요. 식량도 없는 마당에 열흘씩 버틸 수 있을까요?”
심승섭의 지적은 합당했다.
다만, 고병갑에겐 그 모든 과정을 하루로 단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간단하다. 쓰러진 헌터들을 전부 아스빌람에 보내 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스빌람과 고블린에 대해 들킨다는 리스크가 존재했다. 자칫하다간 일백 명도 넘는 사람에게 들킬 수 있다.
지금 와서 필사적으로 감출 필요야 없지만 일부러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알겠습니다. 별다른 방도가 없어 보이네요.”
결국, 고병갑은 그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심승섭 말마따나 잘만 풀리면 만사가 속 편해질 테니까.
“그럼 더 끌 것도 없으니 바로 하죠.”
“그래요.”
네 사람이 나무를 마주 보고 나란히 섰다.
이윽고 폭발적인 힘이 온 사방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S급 헌터 셋의 전력이란 그런 것이다. 고병갑 또한 그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제일 먼저 심승섭이 허공으로 손을 휘적였다.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카르마가 초고압 전력으로 환원되며 나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파지직! 콰차창!
어마어마한 벼락이 휘몰아쳤다. 살 타는 끔찍한 악취가 온 사방으로 퍼졌다.
전류 폭풍이 휘몰아친 이후. 고병갑과 정선경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한창훈은 그 두 사람에게 최상급 버프를 걸어 주었다.
‘이게 버프란 건가? 몸에 힘이 넘치는군.’
고병갑은 내력을 한껏 응집하여 다섯 발의 검기를 쏘아 보냈다. 검기 다발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지점을 타격했다.
직격한 부위에 넓고 깊은 흠이 생겼다.
“흐아아아압!”
뒤이어 정선경이 비스듬히 든 도끼를 힘껏 내질렀다. 그녀의 거대한 도끼는 고병갑이 밑 작업해 놓은 곳을 정확히 때렸다.
아마 이번 공격으로 나무는 반으로 쪼개질…….
-캉!
‘캉?’
까랑까랑한 타격음이 울렸다. 살점을 때렸다고는 믿기 힘든 소리였다.
정선경은 그대로 도끼를 놓쳤고 팔을 부여잡으며 물러났다.
“으윽!”
“뭐야! 괜찮아?”
“저 안에 뭔가 단단한 게…….”
그 순간이었다.
-콰직! 콰지직!
거대한 나무가 세로로 쩍 갈라지며 안에 든 것을 내비쳤다. 마치 과육에 감싸졌던 씨가 드러난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 씨앗에 해당하는 것은 이제껏 세상에 드러났던 적이 없는 것이었다.
‘놈’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고병갑을 포함한 모두가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의 본능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위험하다고. 저건 너무도 위험하다고.
“저, 저건…….”
백금색의 판금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거인.
그 모습은 실로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부족할 만큼.
넓적한 투구에는 쇠창살 모양 홈이 파여 있었는데, 안에서부터 환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신성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고병갑은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거부감이 들었다.
그는 저 존재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 알샤론. 이, 일곱 번째 신성전사……. 분명 죽었을 텐데 어떻게?」
놈의 정체는 이 평원에서 사라온 군단을 쓸어버렸던 신의 사자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