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17화 (117/151)

117화 예상치 못한 적

“뭐… 뭐야?”

“저게 뭐꼬?”

사람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서린 탄식을 흘렸다. 고병갑의 경우엔 양 눈썹이 어긋나도록 표정을 찌푸렸다.

이 순간, 고병갑과 다른 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정선경, 한창훈, 심승섭. 그들은 ‘순수한 의문’을 느꼈다. 반면 고병갑이 느낀 건 ‘약간의 의아함’이었다.

사건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된다.

정선경 일행은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길을 나섰다.

고병갑은 일단 그들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면부지 남이면 모를까, 한때 합을 맞췄던 동료들이니 모른 척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걷고, 뛰고, 때때로 몬스터를 죽이며 목적지인 신포로 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르자 한창훈이 소지하고 있던 휴대용 GPS 장치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신포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행이 길을 헷갈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저 멀리에서. 도저히 모르고 지나칠 수 없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장 10개는 합친 면적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빛은 반구형 틀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63빌딩 정도는 가뿐히 아울렀다.

일행은 정체불명의 ‘하얀 공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50미터쯤 두고 서서는 5분째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고병갑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솜니움의 안개와 닮았어. 그런데 저 파란 막대기는 정체가 뭐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반구의 천정(天頂)에 해당하는 부분이 푸른색 원기둥과 맞닿아 있다. 하늘로 뻗은 원기둥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스빌람의 안개처럼 안쪽 것들을 감싸는 것 같은데…….’

“저 안에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그거야 모르지예. 그런데 저만 그런 겁니꺼? 저쪽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데예?”

“나도 그래요. 그런데 뭔가 이상해요. 뭐가 없어서 느껴지지 않는다기보단…….”

“뭔가 뚝 끊긴 느낌이지.”

“맞아!”

고병갑의 대답에 정선경은 손가락을 튕기며 화답했다.

그 말대로였다. 그들이 딛고 선 곳과 저쪽 하얀 영역은 본질적으로 달랐다. 완벽한 비유는 아니다만, 지상으로 심해 한 조각을 떼 온 것 같기도 했다.

‘한번 만져 봐야겠는데.’

그가 하얀 영역 쪽으로 다가갔다. 심승섭이 재빨리 말을 걸어왔다.

“뭘 하시려고요.”

고병갑은 그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가까이서 좀 보려고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저게 뭔지 모르잖아요.”

“그렇다고 구경만 하기도 뭐하지 않습니까.”

“음…….”

“갑자기 통신 두절된 인원들이 저것과 관련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고병갑이 세 사람에게 물었다.

“당근 관련 있겠지. 장비들이 먹통이 된 것도 이 근처였잖아.”

“저도 마, 수상쩍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더. 그런데 승섭 씨 말도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섣불리 다가갔다가 변이라도 당하면 우짜려고예.”

이 말도 저 말도 맞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심승섭이 말했다.

“일단 본부랑 연락을 취해 보죠.”

심승섭과 한창훈, 두 사람은 무전기를 가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통신 장비가 작동하려면 10킬로는 멀어져야 했다.

고병갑과 정선경은 함께 담배를 피우며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대략 40분 정도 지났을까? 무전기를 들고 떠났던 두 사람이 개똥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둘 다 표정이 왜 그래요?”

정선경이 곧장 물었다. 한창훈이 분을 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디 자슥들! 하여간 군바리 쉐키들, 앞뒤로 꽉 막혀 가지고.”

“왜요? 뭐라던데요?”

“저건 건드리지 말고 이 일대를 수색해 보랍니더. 그래도 토벌대가 발견되지 않으면 고마 폭격을 때려뿌겠다네예.”

“뭐요? 이걸 놔두고요?”

정선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엔 심승섭이 대답했다.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아니!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벌써 다 죽었을 수도 있고, 엄청 강한 몬스터와 함께 있을 수도 있죠.”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보다 그냥 상자째로 불태우겠다, 이거군요.”

고병갑의 요약에 심승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참.’

고병갑은 황당함을 느꼈다. 그래서 하마터면 실없이 웃을 뻔했다.

군(軍) 측의 무자비함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처는 지극히 합리적인 편이었다. 다만 그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미사일을 쏟아부으면 저걸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저 하얀 영역이 솜니움의 안개와 비슷하다면 절대 무력으로 부술 수 없다. 저건 단순한 새장 같은 게 아니니까.

“어쩌시겠습니꺼?”

한창훈이 물었고,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고병갑은 말없이 몸을 움직였다. 훌쩍 뛰어 하얀 영역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번엔 심승섭도 붙잡지 않았다. 그저 뭘 하나 싶어 바라보기만 했다.

스릉.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그가 내력을 응집했다. 응얼거리는 내력은 금세 형태를 갖추었다. 그가 세차게 검을 뿌리자 초승달 모양 검기가 쏘아졌다.

빠르게 뻗어 간 검기는 하얀 영역에 충돌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들어갔다.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다. 심지어 고병갑 자신도.

‘뭐야? 실체가 없잖아?’

마치 공기를 가르는 듯하다. 당연히 하얀 영역은 어떠한 피해도 받지 않았다. 실체가 없다면 아스빌람의 안개와는 확실히 다른 종류다.

고병갑은 확실히 하기 위해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스리슬쩍 칼을 뻗었다. 칼날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하얀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생각 못했는데.’

검을 회수한 고병갑이 고민에 잠겼다. 그사이 일행이 다가왔다.

“희한하네예.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모양입니더.”

“그럼 한번 들어가 봐요.”

정선경은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갈 것처럼 굴었다. 심승섭이 팔을 잡아채지 않았다면 그녀는 벌써 하얀 영역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그녀는 ‘왜 붙잡느냐?’라는 눈빛으로 심승섭을 바라보았다.

“멋대로 오갈 수 있었으면 토벌대 인원들도 진즉 빠져나왔겠죠.”

“그쪽도 봤잖아요? 숭숭 통과되는 거.”

“내 말은, 하아…….”

심승섭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 정리되지 않는 모양이다.

정선경은 팔을 잡아당기며 십승섭의 손을 떨쳐 냈다.

심승섭은 꾸역꾸역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저기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됐어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나 혼자라도 들어가 볼 테니까.”

정선경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창훈도 그 의견에 힘을 실었다.

“승섭 씨,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꺼? 여차하면 바로 도망쳐 나오면 되니니까예.”

“…….”

“병갑 씨 생각은 어떻습니꺼?”

“저도 뭐, 들어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경우엔 사람들을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명보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앞섰다.

들어가 보자는 여론이 과반수다 보니 결국 심승섭도 수긍했다.

“그래요, 그럼.”

그의 동의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하얀 영역 앞에 모여 섰다. 다들 기세가 비장했다.

‘S급이 셋이나 곁에 있으니 황당하게 죽지는 않겠지.’

선두로 입장한 이는 정선경이었다. 이어서 한창훈이 들어갔고, 고병갑은 세 번째였다.

마지막으로 심승섭까지 하얀 영역 안으로 몸을 담갔다. 모두 들어서기까지 5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네 사람의 심장이 철렁이는 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런!”

내부로 들어선 순간, 외부와의 통행이 전면 차단됐다.

* * *

쾅!

무지막지한 소리가 울렸다. 정선경이 살벌하기 그지없는 기세로 양날 도끼를 내지른 탓이다.

하지만 공격 대상, 다시 말해 ‘벽’은 아파하는 티조차 내지 않았다. 흠집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염병할!”

“관두시죠. 그런다고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아니,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요! 저기요, 나한테 버프 좀 둘러 줘 봐요!”

“이미 둘렀는데예…….”

“으아아, 젠장!”

정선경이 다시 한번 벽을 후려쳤다. 결과는 그녀가 앞서 행했던 수십 번의 도끼질과 같았다.

고병갑은 김빠진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그러곤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여기 아스빌람 같은데.’

이젠 척하면 척이다.

이곳은 초원이었다.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가 적당한 밀도로 솟았고, 땅엔 발목 높이의 풀이 자라 있다. 전장의 피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맑고 향긋한 풀 내음만 가득했다.

그래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도리어 기분이 좋았다.

쾅!

다시 한번 굉음이 울린다. 고병갑은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누나, 적당히 관두고 저쪽으로 가 보자. 다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움직이죠.”

“그래요.”

“예, 그라입시다.”

심승섭과 한창훈이 개인 짐을 챙겨 다가왔다.

정선경은 퀭한 눈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땀 때문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추레하다.

그녀가 입술을 벙긋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요?”

“우리 갇혔잖아요. …나 원망하지 않느냐고요? 내가 들어가자고 했는데…….”

그녀가 어물거렸다. 심승섭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고병갑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미 갇힌 거 어쩌겠어? 내가 보기에 그거 백날 치고 있어 봤자 소용없으니까 얼른 따라오기나 해.”

“그리고 뭐, 선경 씨만 들어오자고 했습니꺼? 우리 다 합의해서 들어온 건데 원망하기는 와 원망을 합니까? 허허.”

“…미안해요.”

정선경은 풀이 죽었다. 하얀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 자기 고집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일행이 이곳에 갇힌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겠지.

“여긴 마치 던전 같네요.”

심승섭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도 마 그렇게 생각했습니더. 일종의 변종 던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처음 보는 거라.”

하얀 영역 안의 공간은 바깥에서 관측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수십 배, 어쩌면 수백 배일지도 모른다.

일행은 동산 하나에 타올라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거라곤 드넓은 초원과 높다란 봉우리뿐이었다.

‘여기는…….’

고병갑은 이 장소가 눈에 익었다. 아니, 기억에 익었다. 대체 언제 경험했던 것일까?

한참을 말없이 기억을 되짚던 그가 별안간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거기야! 사라온들이 신성군과 싸웠던 그 초원!’

과거 트로바틴의 영혼을 취했을 때 그의 기억에서 엿본 곳과 일치했다. 과거 수십만 대군이 격돌했던 격전지. 어째서인지 그 전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쪽에 뭔가 있네요.”

심승섭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해의 위치를 보니 북쪽이다. 고병갑 또한 그곳에서 은근한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고병갑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가 보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예, 가입시더.”

일행은 꾸준하게 걸었다.

밥을 먹거나 봉우리에 올라 위치를 살피는 게 아니면 한시도 쉬지 않았다. 호재인지 악재인지, 그렇게 걸었는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마주치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렸다. 그들은 적당한 봉우리에 올라 야영을 했고, 이튿날 해가 밝자마자 또 걸었다.

한창훈이 남은 식량 개수를 세며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무렵이었다. 인근 동산에 오른 정선경이 아래쪽을 보며 외쳤다.

“저기! 뭐가! 있어요!”

“뭐라고? 뭐라고 했어?”

“저기! 뭐가! 있다고 오!”

아래쪽에 있던 세 남자는 급히 동산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 숨을 헐떡이자니 정선경이 방방 뛰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기! 무슨 나무 같은 게 있지 않아?”

까마득한 곳이었다. 그곳에 그녀 말마따나 나무처럼 보이는 게 있었다.

그게 그저 나무일 뿐이라면 ‘이 누나가 노망이 났나?’라며 나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나무가 아니었다. 일단 크기부터가 말이 안 됐다.

“이 거리에서 저 정도면… 백수십 미터는 족히 되겠는데?”

“100미터짜리 나무라니, 희한하네예.”

“그쵸? 뭔가 수상쩍더라고요.”

“한번 가 보도록 하죠.”

일행은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거목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대략 1시간쯤 나아갔을까?

그들은 나무만큼이나 거대한 바위에 올랐고, 몸을 잔뜩 수그린 채 비대한 나무를 바라보았다.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일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씨…….”

“쉿!”

고병갑이 급히 정선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대체…….’

아득하리만큼 높은 나무, 그건 나무가 아니었다. 수천 마리의 몬스터로 이루어진 일종의 기둥이었다.

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수백 갈래의 촉수요, 잎사귀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잘한 몬스터의 육신이었다.

그리고… 촉수의 끝엔 2백가량의 헌터들이 미라가 된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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