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16화 (116/151)

116화 만남

찌르르르!

만화적 묘사를 빌리자면 새 1,000마리가 지저귀는 듯하다. 경이롭기까지 한 고음이 귓전을 때리면 등줄기가 절로 시큰해졌다.

세상은 때때로 번쩍였는데 고병갑은 시야가 하얗게 물드는 게 싫었다. 그래서 털이 곤두선다 싶으면 재빨리 눈을 감곤 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땅에서 번개가 솟구쳐 올랐다. 그럼 몇 초 뒤 역한 탄내가 스멀스멀 퍼졌다. 단백질이 타는 냄새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누굴까?’

작은 언덕을 타오르며 고병갑은 저 너머에 누가 있을지 짐작해 보았다. 한국에 초능력자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전격 계열에 저 정도 위력을 낼 수 있는 사람은 특히나 드물다.

마침내 언덕 정상에 선 고병갑이 아래쪽 상황을 빠르게 훑었다. 그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번졌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잖아?”

후드를 푹 뒤집어쓴 남자가 허공으로 손을 휘적거리고 있다. 마치 유령 악단을 지휘하는 듯한 몸짓. 그의 손끝을 타고 새파란 플라즈마가 튀었다.

저 동작들이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게 원정 당시 숱하게 봐 왔던 것이다.

사내의 곁으로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아쉽게도 실루엣만 어렴풋할 뿐 생김새는 알아볼 수 없었다.

“지금 가면 나도 바싹 익어 버리겠구먼.”

적어도 전격 세례가 멈출 때까지는 기다리자 싶었다. 소란은 곧 멎었다. 전투보다 일방적 학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난리가 가신 후 고병갑은 바삐 달려갔다. 일부러 기척을 드러냈기에 저쪽에서도 그의 접근을 알아챘다.

“누가 오는데요.”

“그라게예. 군인은 아닌 것 같은데. 낙오 헌터 아니겠심꺼?”

“나야 모르죠.”

“…어? 잠깐만, 쟤 병갑인데?”

“누구예?”

정선경은 눈썹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곧 오만상을 구겼다.

“뭐야? 진짜 병갑이잖아? 야! 네가 여기 왜 있어!?”

그녀가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고병갑이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오, 낯익다 했더니 진짜 누나였네.”

“아니, 네가 여기 왜 있냐고?”

그녀가 기겁했다. 유령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다. 아니, 실제로 유령을 봤어도 지금보단 덤덤했으리라.

고병갑은 짧게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정선경, 심승섭, 그리고 한창훈. 모두 C조에 속했던 멤버들이다. 고병갑은 이들이 어떻게 다시 뭉쳤는지 적잖이 궁금했다. 정선경이 흔들어 대지만 않았다면 진즉 물어봤으리라.

“너 설마 지원한 거야? 얀마! 집에나 가만히 박혀 있지 여기가 어디라고 와?”

“그러는 누나도 지원해서 와 있는 거 아니야?”

“지원은 개뿔. 길드 회장이 하도 사정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라고. 아니면 내가 이 엿 같은 곳에 다시 오겠냐?”

“하긴, 그렇긴 하지.”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나머지 두 사람을 보았다.

“창훈 씨, 승섭 씨. 오래간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뵐 줄은 몰랐네요.”

“아아! 누군가 했더만 이제 기억 나네예. 그때 우리가 신세 졌지예? 또 보니 억수로 반갑십니더.”

한창훈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면 무던한 성격의 심승섭은 고개만 조금 까딱일 뿐이었다.

“너 왜 혼자야? 일행은?”

정선경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없어. 혼자 왔거든.”

“뭐?”

“자자, 여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움직입시더. 해도 저물었고 하니 일단 야영지부터 찾아보는 게 어떻겠심니꺼?”

한창훈이 중간에 개입했다. 심승섭도 얼른 자리를 뜨고 싶은 눈치였기에 일단 움직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야영할 만한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사이 고병갑은 본인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자신은 지원서를 쓰고 부대에 배속받은 게 아니라 독단으로 군사 벨트를 넘어온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정선경과 한창훈은 ‘이거 혹시 미친놈인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친… 네가 희한한 놈인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들이 갈 곳이 없어서 이딴 데 와? 너 혹시 뒤뜰에 목숨 서너 개쯤 묻어 놓고 사냐?”

“뭐, 그런 건 아니고.”

고병갑은 차마 ‘고블린 파밍 하러 왔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좀 알고 싶어서. 요새 심상치 않잖아. 그렇다고 군에 배속되는 건 싫으니 독단으로 움직인 거야.”

“나 참.”

“병갑 씨, 여드레 전에 넘어왔다고 하셨습니꺼? 그라믄 바깥 상황도 좀 아시겠네예?”

한창훈이 물었다. 고병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지 않습니다. 아래쪽에서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고 있어요. 이곳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날마다 사망자가 나올 정도입니다.”

“왐마, 미쳐 굴러가네예. 그라믄 어떡한답니까?”

“뭘 어떡해요. 일루미션이 겁나 뺑이 치는 거지.”

“그른가예? 하기야 일루미션에 헌터가 워낙 많으니―”

“일루미션은 우리 적입니다.”

“예?”

“뭐?”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말했고, 자신의 경솔한 입을 속으로 나무랐다.

정선경과 한창훈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건 심승섭뿐이었다.

“일루미션이 적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야영은 저기서 하죠.”

심승섭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거 북한의 관공서 따위로 쓰였던 건물이 보였다.

반 정도는 뭉개진 상태였지만 잠시 쉬어 가기엔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세 사람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안으로 들어섰다.

곰팡내가 자욱할 뿐 몬스터나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일행은 짐을 풀고 둘러앉았다. 한창훈이 자기 배낭에서 보존 식량을 꺼내 늘어놓았다.

“병갑 씨도 한술 하시지예. 넉넉하게 들고 와서 부족하진 않을 겁니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 봐.”

“그 전에, 누나네는 뭘 하던 거야? 짐꾼도 없고, 구성도 너무 단출하니 공격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세 사람이 어떻게 다시 뭉친 건지도 궁금하고.”

“아, 설명하자면 좀 긴데…….”

정선경은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얼마 전. 함경남도 신포 인근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됐다. 신포는 부두와 닿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래서 무려 S급 17명, A급 62명이 동원됐다.

토벌은 무탈하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바로 어제. 갑작스레 토벌대와 연락이 끊어졌다.

본부에서는 서둘러 위성 관측을 통해 토벌대의 소재를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신포 인근엔 정체불명 역장이 퍼져 있었고, 수천억에 호가하는 관측 위성은 같은 무게의 고철과 별다를 것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본부는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S급 17명, A급 62명. 그 아래로 결집한 헌터가 다시 170명이다. 만약 그들이 죽었으면 전력에 지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래서 그들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조가 꾸려졌다.

정선경 일행이 그 정찰조였다.

“이렇게 셋이 뭉친 건 그냥 우연이야. 마침 지원자 중에 우리가 있었고, 서로 안면도 있고 하니 팀을 꾸린 거지.”

“그렇구먼. 그럼 신포라는 곳으로 향하던 중이었겠네?”

“어, 내일 정오쯤이면 아마 닿을 거야.”

“그런데 만약 투입된 헌터들이 다 죽은 거면 어떻게 되는 거야?”

정선경은 대답 대신 쓴 입맛을 다셨다.

눈치를 살피던 한창훈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되면 해당 지점에 폭격이 쏟아질 겁니더. 그 정도 규모의 토벌대를 해칠 정도면 예사 몬스터가 아닐 테니까예.”

“그렇군요.”

“무사하길 바라야지.”

정선경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녀가 굳은 얼굴로 고병갑을 돌아보았다.

“우리 얘기는 끝났으니 이제 슬슬 들려주지? 일루미션이 적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흠.”

“사실 나도 전부터 켕기는 게 있었어. 그 자식들 하는 짓거리가 워낙 이상하니까. 넌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고병갑은 장내 사람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가 알기로 이 중에 일루미션 소속은 없다.

이번에 인원들의 목이나 손을 살폈다. 육망교를 상징하는 육각 펜던트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이것만으로 피아를 단정 짓기는 섣부른 감이 있다. 그래도 그의 경험으로 볼 때 이들은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고병갑은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서두를 텄다.

“다들 육망교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야.”

“알다마다. 사이비 자식들이잖아.”

“그렇지. …혹시 여기 육망교 신자 있으십니까?”

혹시나 해서 물었다. 응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없나 보네.”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이건 순전히 내 가설일 뿐이야. 그러니 믿든 말든 그건 본인 자유야. 다만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어.”

사람들은 얼른 말해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병갑은 목을 푼 뒤 본론을 꺼냈다.

“어쩌면… 곧 인류가 멸망할지 몰라.”

* * *

고병갑은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들려주었다.

물론 아스빌람과 관련된 부분은 제외했다. 그 부분은 말해 줘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서시희와 관련된 내용도 조금의 각색을 거쳤다.

몇 군데 손을 보긴 했으나 이야기는 큰 개연성의 오류 없이 청중에게 전달되었다.

세 사람은 집중하여 경청했다. 중간중간 인상을 구기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으나 딴죽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육망교 맹신자들이 인류를 말살하리란 내용을 끝으로 고병갑의 음모론은 마무리됐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심승섭조차 입을 떡 벌렸다. 남은 두 사람은 볼 것도 없다.

“그, 그게… 사실이야?”

“말했잖아. 가설일 뿐이라고. 그런데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마냥 터무니없지도 않은 것 같지 않아?”

“이런 미친…….”

“그, 그라믄 서시희 씨는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벌써 고건룡을 잡으러 출발한 겁니꺼?”

“모르죠. 저도 그날을 끝으로 그 사람과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으니까요.”

“허… 세상에 마상에. 우째 이런 일이 있노.”

“이거 보십시오.”

고병갑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약지에 육각형 반지를 내보인 것이다.

“이게 아까 말한 그 물건입니다. 일루미션 소속 헌터한테 빼앗았다는 거요. 실험해 봤는데 정말이더군요. 몬스터들이 저를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일루미션, 이 개새끼들! 몬스터랑 합세해서 사람을 죽인다고? 누가 순순히 당해 줄 줄 알고?”

정선경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병갑이 급히 그녀를 만류했다.

“뭘 어쩌려고?”

“몰라서 물어? 당장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아니면 일루미션 놈들 모가지라도 다 따 버리든가!”

“진정해, 내가 말했잖아. 설령 사람들이 믿어 준다 쳐도 문제가 생긴다고. 여기서 병력이 빠지면 내려오는 몬스터는 어떻게 막아?”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SS급인 서시희도 놈들을 어쩌지 못해서 숨어 다니고 있어. 누나 혼자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니까.”

“저 말이 맞아요.”

심승섭이 불쑥 말했다. 시선이 쏠리자 그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병갑 씨가 말한 거랑 별개로 우리한테는 당장 할 일이 있어요. 일단 그것부터 마무리 지어야죠. 사람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확인해 봐야 할 거 아녜요.”

“…염병!”

정선경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분을 삼켰다. 곧 품에서 담배를 꺼내며 나가 버렸다.

심승섭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병갑에게 물었다.

“그쪽도 달리 계획이 있는 건 아닌가 보네요.”

“네, 자랑스레 할 말은 아닙니다만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럼 일단 함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말씀하신 대로 떠벌여 봤자 혼란만 가중될 것 같으니까요.”

“제 생각도 같심더. 그렇잖아도 전선 상황이 개판 5분 전인데…….”

장내에 침묵이 돌았다. 각자 생각할 거리가 태산이리라.

얼마 뒤 정선경이 돌아왔고, 고병갑은 장내에 깔린 침묵을 깨트렸다.

“제가 여러분께 권고하고 싶은 건 한 가지입니다. 일단 살아남으세요. 그리고 고민해 주세요.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지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은 허름한 건물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새벽 동이 트자마자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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