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세를 늘리다 >
대검이 사나운 궤적을 그렸다. 그 선상에 있던 몬스터는 졸지에 이승과 결별하게 됐다. 도란은 맹수의 눈을 부라리며 다음 표적을 탐색했다.
옳다구나, 저놈이렷다.
그녀는 절대 쉬면 안 되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병적일 만큼 악착같이 적을 도륙 냈다. 그녀와 마주 선 몬스터들은 기세에 질렸는지 임종을 앞둔 노인네처럼 굴었다.
다른 한편에선 고블린 창병들이 크게 활약했다. 구령에 맞춰 일제히 뻗어 나가는 창은 언뜻 파도 같기도 했다. 내력이 깃든 창날은 예외 없이 적의 살점을 꿰뚫었다.
“쿠궤겍!”
몬스터들이라고 마냥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는 않았다. 놈들은 껑충 뛰어오르거나 혹은 거의 땅에 붙을 듯 몸을 수그리며 창공(槍攻)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하나 그건 죽음의 구덩이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행위였다.
「방패병!」
「우워어어어!」
자이언트 고블린들로 이루어진 방패병이 견고한 방어진을 구성했다. 그들은 거대한 방패로 덤벼드는 적을 쳐냈고, 이어서 짧은 검이나 둔기를 내질렀다. 몬스터는 목이 갈라지거나 두개골이 으스러지며 죽었다.
전장의 형세가 실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몬스터들은 부나방처럼 모여들어 하루살이처럼 죽었다. 그 시체가 어지럽게 깔렸다.
“꾸이에엑!”
도란이 제 몸집의 세 배에 이르는 몬스터의 척추를 갈랐다. 확실히 죽일 요량으로 목까지 무지른 후 그녀가 전장을 살폈다.
「전투 종료!」
전투가 끝났다. 이 일대서 허파나 심장이 제 기능하는 건 고블린뿐이었다.
‘훌륭해.’
고병갑은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그는 이번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구경했다. 그게 방만한 행동이 아닐 정도로 전력 차는 압도적이었다.
‘랜드리올이 확실히 살육 병기를 만들어 놓긴 했군.’
랜드리올의 공포 정치가 낳은 것은 폐단만이 아니었다. 저 엄격한 군기와 체계화된 동작들을 보라. 저것은 공포로 점철된 훈련이 아니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들 고생했다! 아스빌람으로 돌아가서 부상자를 돌봐라.」
고병갑이 크게 외쳤다. 고블린들은 승리의 함성을 지르며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고병갑은 그 사이에서 도란을 불렀다. 어느새 키리얀과 도르마도 다가왔다.
「로드!」
「잘했다, 도란. 애들 지휘하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네. 나중에 성 하나 맡겨도 걱정 없겠어.」
「헤헤. 별거 아니던데요, 뭘.」
그가 도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뒤를 보았다.
눈망울에 조금의 두려움과 많은 경외를 담은 고블린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르마.」
「예, 로드시여.」
「얘들 데리고 돌아가라. 상처 치료해 주고 밥도 배불리 먹이도록 해. 많이 굶주린 듯하니까.」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로드께서는 어쩌실 심산입니까?」
「나는 이 근방을 좀 더 둘러봐야겠어. 고블린들이 더 있을지 모르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래, 다들 고생했다.」
「로드, 이따 봐요!」
「로드시여,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물러가겠습니다. 자, 다들 나를 따라오시오!」
도르마가 고블린 군락을 이끌고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고병갑은 204명의 고블린이 새로 아스빌람에 귀속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아쉽지만 이날은 그게 다였다.
* * *
발타드렌의 고블린이 1,254명이 되었다.
에아를 포함한 정령 820명을 합치면 주민이 2,000명도 넘는다. 여기에 다시 솜니움의 고블린 530여 명을 더하면 총인구는 2,500명을 웃돌았다.
사실 나라는커녕 일개 도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숫자다. 하나 최초 33명의 고블린을 데리고 시작한 아스빌람이 아니던가. 이만하면 충분히 대단한 발전이다.
물론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의 목표는 ‘신 아스빌람’의 개국. 이 방대한 황야를 다스릴 대국을 세울 것이다.
그러려면 주민 99%가 남자인, 이런 기형적인 구조는 필연적으로 탈피해야 했다.
“날씨 좋네.”
9월도 어느덧 중엽을 달리니 날이 선선하다. 하늘도 슬금슬금 높아진다. 지구의 혼돈은 아스빌람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고, 이곳은 자잘한 소동을 제외하면 늘 그렇듯 평화로웠다.
고병갑은 아스빌람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했다. 2층 창가에 기대 마당을 내려보는데, 어머니가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박영옥은 예상보다 더 아스빌람에 잘 적응했다. 고블린들과 스스럼없이 지냈고, 특히 에아와 짝짜꿍이 잘 맞았다. 그녀는 고블린들의 식단을 돌보는 일에 큰 열정을 보였다.
고병갑은 구태여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맞아, 엄마는 되게 활동적인 분이셨지.’
퇴원 후 집에서 TV만 보는 생활이 적잖이 지루하셨으리라. 고병갑은 엄마가 활력을 되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휘잉!
하늘에서 이질적인 바람 소리가 들렸다. 고병갑은 자연히 위를 올려 보았다.
「로드!」
「음? 하피 아냐?」
하피가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녀석은 가볍게 지붕에 올라탔다.
「너 언제 왔냐?」
「나? 방금 왔어. 로드, 이거.」
하피가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넸다. 고병갑은 받아 든 뒤 펼쳐 보았다. 조금은 엉성한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고붕이가 전해 주라든?」
「응, 로드. 나 배고파.」
「그래, 오느라 고생했다. 에아한테 가서 밥 달라고 해.」
「응, 갈게.」
하피가 훌쩍 뛰어오르더니 식당 방향으로 날아갔다. 고병갑은 뒤쪽 의자에 앉으며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삐뚤삐뚤한 필체와 달리 내용은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로드시여. 고붕이입니다.
그제 땔감도 구할 겸 겸사겸사 바위산 일대를 둘렀습니다.
강의 갈래를 따라 1시간쯤 거니니 이전에 발견하지 못한 분지를 발견했습니다.
크기는 솜니움만 하고, 그곳에도 수정 광산과 통하는 광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터전을 구성하시고 인력을 투입하면 수정 채굴량이 늘지 않을까 싶어 편지를 보냅니다.
글을 마칩니다. 보고 싶습니다. 고붕이 올림.>
“짜식…….”
고병갑은 괜히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갱도를 발견했다라. 이거 좋은 소식이네.”
마침 많은 자원이 필요했는데 잘됐다. 그는 당장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솜니움으로 간다. 길이 잘 닦여 금방이었다. 그가 솜니움에 행차하자 한참 업무를 보던 고붕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허억, 허억. 로드시여. 오실 줄은 알았는데 이리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같이 가자.」
「아, 예예! 금방 채비를 갖추겠습니다.」
고붕이가 짧게 준비를 마치고 돌아왔다.
「차 타고 갈 수 있나?」
「음… 길을 새로 닦으면 모를까 지금은 걸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쩝, 어쩔 수 없네. 안내해 줘.」
「옙! 저만 따라오십시오.」
고병갑은 고붕이와 함께 새로 발견했다는 분지로 향했다.
강의 여러 갈래 중 하나를 따라 걸으니 자갈이 즐비하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나왔다. 무성한 잎사귀와 덩굴을 해치며 30분쯤 더 나가니 편평한 분지가 등장했다.
「여깁니다! 어떻습니까?」
「키야, 멋지네. 땅도 비옥하고 곁에 강도 흐르고. 너한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헤헤, 요새 이곳저곳 쏘다니다 보니 저절로 발견했습니다.」
「이곳저곳 쏘다닌다니? 왜?」
「그냥… 솜니움 주변에 뭐가 있나 확인해 두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야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할 수 있잖습니까.」
고병갑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붕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짜식! 하여간 너만 한 놈이 없단 말이야.」
「헤헤헤.」
「그래도 너무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아직 그러글이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까.」
「웬만한 것들은 이제 저 혼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고붕이가 허리에 찬 검을 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병갑은 그 모습이 웃겨 홍소를 터뜨렸다.
「좋다! 여기에 솜니움 2단지를 구성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수정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런 호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수정이 많이 필요하다니요? 무슨 사업을 벌일 생각이신지요?」
고붕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 왔다. 고병갑이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너 색시 만들어 주려고, 인마.」
* * *
요즘 같은 사회 풍조에 했다간 큰일 날 말이다만, 고병갑은 남녀에 따라 각자 걸맞은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장 도란만 봐도 웬만한 장성 고블린보다 칼질이 우월하다. 그러니 고병갑의 말은 ‘남자가 힘이 세고, 여자는 힘이 약하다.’ 같은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 바깥에서 일은 하면 누군가는 안에서 내조를 봐주는 게 여러모로 조화롭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음과 양의 조화랄까?
그래서 솜니움 2단지 공사로 바쁜 와중에도 고블린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우선 한 가지 법령을 내렸다. 이른바 작명령(作名令)이다.
-이름 없는 놈이 너무 많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이름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지.
그는 이름이 없는 고블린들에게 이름을 주기로 했다.
물론 1,700명이 넘는 고블린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작명 센스가 돌멩이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고.
그래서 몇몇 감각 있는 고블린을 선별했다. 대개 고블린계 상위종이었다. 그들을 시켜 각자 맡은 고블린에게 이름을 지어 주도록 했다.
너무 거창한 건 좋지 않다. 어지간하면 두세 글자로 끊게 했다.
킹 고블린과 로열 고블린 일동이 자신의 상상력을 전부 소진할 무렵 그 작업은 끝났다.
그들은 이름이 적힌 장부를 거두어 왔고, 고병갑은 연금술을 통해 목패(木牌)로 제작했다. 그날부로 고블린들은 가슴팍에 명찰 하나씩 달고 다니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든 고블린이 이름을 갖게 된 이후로도 고병갑은 쪼꼬미, 홉 친구, 덩치, 복슬이 등으로 고블린들을 불렀다.
천하제일 이름 공모전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본 행사는 그다음이었다.
발타드렌의 넓은 광장. 820명의 정령까지 구경꾼으로 모여들었다.
고병갑은 이날 13명의 여성 고블린을 사들여 군중에게 선보였다. 수정으로 환산하면 무려 650만 수정어치다.
「우으…….」
사실 고블린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랜드리올이 집권할 당시 고블린들을 관리하며 가혹하게 군 것은 여성 사라온이었으니까.
그날의 악몽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다들 박수로 환영해 줘. 얘들은 앞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갈 고블린들이니까.」
고병갑이 그렇게 일러둔 후에야 고블린들은 경계의 기색을 누그러뜨렸다.
‘사라온의 천성이 교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교육하면 고블린으로서 살게 할 수 있어.’
좋은 일례로써 도란이 있다. 그녀는 랜드리올과의 투쟁에서도 기꺼이 고병갑을 지지해 주었다.
타고난 성품도 중요하지만 살아온 환경이 더욱 중요하다고, 고병갑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여성 고블린들은 처음 도란이 그랬던 것처럼 혼란을 겪었다.
고대의 상점에 박제하기 위해 생전 기억을 봉인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머리는 새하얀 백지상태였다.
고병갑은 그들의 기억을 일깨워 주지 않았다. 그들이 과거의 존재가 아닌 현재의 존재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열셋의 여성 고블린 중 셋은 솜니움으로, 나머지 셋은 솜니움 2단지로. 일곱은 발타드렌에 남겼다.
아직은 미미한 변화다. 하나 차츰차츰 남녀 비율이 정상으로 맞춰질 것이다.
어쨌든 그런 몇 가지 행사가 거치는 사이 솜니움 2단지가 완성됐다. 고병갑은 우선 300명의 고블린을 그리로 이주시켰다.
「바셀로, 모쪼록 잘할 거라 믿는다.」
「맡겨만 두십시오, 로드시여.」
「그래, 고붕이가 추천할 정도니 잘하겠지. 솜니움이 바로 지척이니까 뭔가 문제가 생기면 자문하도록 해.」
「예!」
바셀로는 킹 고블린이다. 그리고 솜니움에서 고붕이를 도와 일한 경력이 있다.
고붕이는 2단지의 관리자로 바셀로를 추천했고, 고병갑은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후우…….”
슬슬 해가 저물어 갈 즈음 고병갑은 담배를 꼬나문 채 지구로 넘어왔다.
고작 한 발자국 걸어 나왔을 뿐인데도 주변을 감싼 공기가 싹 바뀌었다. 이곳에 평화로운 공기는 없었다. 피비린내와 화약 내음이 뒤섞인 악취만이 자욱했다.
지구에만 오면 기분이 언짢아진다. ‘개차반’쯤으로 요약할 수 있는 여러 안 좋은 상황이 자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피하는 심정으로 아스빌람에 숨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건 철부지 어린애나 할 법한 일이다.
지구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고병갑은 먼 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헌터들인가? 이렇게 거대한 기척을 발산하는 걸 보면 전투 중인 모양인데.”
북쪽 방면에서 거대한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런 추론에 답변이라도 하듯 일순 세상이 번쩍였다.
쿠릉! 콰쾅! 쾅!
거대한 벼락 줄기가 세차게 바닥을 때리더니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마치 전류의 강이 범람한 듯한 연출이다.
‘자연현상이 아니야. 초능력 계열 각성자가 있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고병갑은 저 전격이 눈에 익었다. 얼마간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원정 당시 전격을 쏘아 대던 팀원을 떠올릴 수 있었다.
S급 헌터 심승섭. 혹시 그는 아닐까?
‘한번 가 보자.’
호기심을 느낀 고병갑은 전격이 몰아치는 곳으로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