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세를 늘리다
‘대한민국도 머지않아 사달이 날 거라고?’
고병갑은 상념에 잠겼다. 지난날 일루미션 소속 헌터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들은 바에 따르면 한반도도 아프리카나 남미처럼 초대규모 몬스터 웨이브에 시달릴 운명인 듯했다.
그렇게 되면 파국은 당연한 수순이다.
땅이 좁고 삼면이 바다라 달아날 곳은 마뜩잖고, 인구는 몇몇 대도시에 밀집해 있으며 인구 대비 각성자 수는 턱없이 적다. 6천만 인구 중 각성자라 봤자 2만 3천여 명. 비율로 따지면 0.04% 수준이 아니던가.
그마저도 인간 중에서 인간의 적이 있으니…….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북에 있는 균열 중 절반만 터져도 다 죽겠는데?’
작년 10월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북 원정을 진행하고 있다만 아직도 균열은 차고 넘쳤다. 저 위쪽엔 지난 20년 동안 발생한 균열이 퇴적층처럼 꾸역꾸역 쌓여 있으니까.
지금에 들어 부랴부랴 총 전력을 투입하고 있다마는 그마저도 난항을 겪는 모양이다.
오늘 자 뉴스만 봐도 그랬다. 몬스터의 남하를 막는 군사 벨트 중 한 지점이 하룻밤 새 붕괴했단다. S급 헌터도 무려 두 명이나 실종됐고.
“실종은 무슨. 죽은 걸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S급 헌터 이소리와 허길남이 투입됐던 균열이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자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말이 좋아 실종이지 실상은 죽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우웅!
“아, 이 새끼들… 시도 때도 없이 보내네.”
협회에서 문자가 왔다. 발신자는 헌터 협회. 오늘만 무려 네 통 째다.
내용이야 안 봐도 뻔하다. 얼른 협회로 와서 지원서 쓰고 북한으로 가 버리라는 거겠지. 어찌 된 영문인지 수신 차단을 했는데도 소용이 없다.
“이것들이 누굴 요단강 보내려고? 그렇게 시급하면 일루미션 놈들이나 데려다가… 어?”
고병갑은 뭔가 번뜩임을 느꼈다. 하지만 짙은 안개에 감춰진 양 어렴풋했다. 그는 연기처럼 흩어지는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몇 초간 끙 앓아야 했다.
인고의 시간이 가고, 그는 비로소 자신이 떠올리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동시에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협회도 일루미션과 한통속인 건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사고의 결과다.
현재 대한민국의 총 전력이라 부를 만한 것들은 북녘에 집결해 있다.
비각성자들로 구성된 군대, 그리고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헌터 집단. 그들은 이 좁디좁은 반도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모여 있다.
좋게 보면 힘과 힘을 대치시켜 위험을 상쇄한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비틀면 그 이면에 감춰진 끔찍한 속셈을 잡아챌 수 있다.
‘북쪽 땅에 초대규모의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켜서 군대와 헌터를 한큐에 잡아내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산개한 적보다 뭉쳐 있는 적이 일망타진하기에는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물론 육망교 놈들이 무슨 재주로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저들이 수족으로 부리는 일루미션만 교묘하게 전장을 이탈한 실태를 보면 뭔가 꿍한 구석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제기랄! 당장 이 사실을 알려야…….”
고병갑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굴다가 멈칫거렸다. 이 천인공노하고도 무지막지한 계획을 누구한테 어떻게 알려야 좋단 말인가?
당장 길가는 사람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은들 미친 사람 취급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운이 좋으면 한두 명쯤 진지하게 들어 줄지 모르지. 하나 겨우 그것으론 여론을 바꿀 수 없다.
사람들이 고블린이라서 자신이 말만 하면 ‘로드시여!’ 하고 따르는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당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설령 신의 은총이 따라 대치선에 결집한 병력을 남쪽으로 빼낸다고 해도 골치다. 그렇게 되면 몬스터들의 남하를 막을 방도가 없어진다.
모로 가도 사람들 죽어 나가는 결과는 똑같다. 좀 늦냐 더 빠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낭패로군.”
그리고 예로부터 나대는 놈은 일찍 죽기 마련이다. 멋모르고 설치고 다니다가 육망교의 표적이라도 되면 밤낮으로 암살자와 일기토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서시희는 앞뒤가 꽉 막힌 이 상황을 보다 현실적으로 직시한 것일지 모른다. 아마 두 번의 죽음을 통해 저절로 깨달은 것이겠지.
그러니 고건룡을 암살한다는, 보다 원론적이고 단순한 계획을 세운 것이고.
대통령이라도 찾아가서 알려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접었다. 이 판국에 대통령이라고 힘을 쓸 수 있을까? 애당초 대통령이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불확실했다.
온 사방이 벼랑 끝이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해답은 명쾌하게 다가왔다.
“고민할 거 뭐 있어? 나는 그냥 내 세(勢)를 키우면 돼.”
고병갑은 간결하게 짐을 꾸렸다. 그 후 차를 몰고 북으로 향했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란의 땅으로.
* * *
전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며칠 전 군사 벨트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붕괴하지 않았던가.
군대는 분명 막강했다. 개인화기는 B급 이상 상위 몬스터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전차나 중화기가 퍼붓는 막강한 화력은 A급 몬스터도 곤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나, 몬스터와의 싸움은 화력으로 판가름 나는 현대전과 양상이 달랐다. 몬스터는 그 특유의 기동성으로 심부 깊숙한 곳까지 단시간에 파고들었다. 군대는 필연적으로 근접전을 벌어야 했고, 그 일은 40킬로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사병 하나하나가 아이언맨 슈트라도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몬스터들과 백병전에서 이길 리 만무했으니.
이마빡에 별 두어 개씩 박고 있는 장성들은 원탁에 모여 골머리를 싸맸다. 무너진 전선을 복구할 것인지, 방어선을 후퇴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상복을 1년 입을지 3년 입을지 따지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어쨌든 고병갑은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혼란을 틈타 야산을 타고 군사 벨트를 넘을 뿐이었다.
그가 구태여 도둑놈처럼 은밀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누군가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을 지나 북한으로 진입한 게 3일 전의 일이다. 통천과 원산을 지나 함경남도 인근까지 다다르자 더는 군인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 이유 역시 명료했다.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는 아직도 균열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구성원 대부분이 비각성자인 군대는 균열이 즐비한 곳까지 진출할 수 없다. 하여 저 멀찍한 곳에 일찍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다.
아스빌람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지구로 넘어온 고병갑은 저 먼 곳에서 열댓 명 정도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헌터였다.
‘공격대인가 보군.’
과거 원정단에 있을 때 그는 C조라는 그룹으로 활동했었다.
문득 함께 활동했던 헌터들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원정이 끝난 이후 정선경이랑만 근근이 연락할 뿐 다른 이들과는 일체 교류가 없었으니.
‘다들 S급이니 어련히 살아 있겠지.’
그는 얼마간 인원들을 훔쳐보다가 길을 나섰다.
산을 해치며 나아가는 중간중간 고병갑은 몬스터와 대치했다. 놈들은 무슨 야생 동물이라도 된 양 자연스럽게 굴었다.
몬스터들이 그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일루미션 소속 헌터에게 빼앗은 반지 때문이리라.
“쿠우…….”
이번에도 그랬다. B급 몬스터인 샤프디어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콧김을 한 번 뿜더니 몸을 돌려 유유히 떠나갔다.
고병갑은 슬그머니 검을 뽑아 샤프디어를 등짝을 베어 버렸다.
“께켕!?”
샤프디어가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며 죽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 바꾸면 ‘아니, 시발 왜 때림?’ 정도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샤프디어의 통곡할 속사정도 모른 채 고병갑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후우… 나오라는 고블린은 안 나오고.”
그가 지난 3일을 새어 가며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고블린이었다.
대규모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으니 확률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그사이에 고블린이 있을 터다.
하지만 고블린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고병갑은 그 이유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입맛이 씁쓸해졌다.
“제길, 벌써 다 잡아먹혀 버린 건가?”
균열에서 빠져나온 몬스터는 허기짐을 느낀다. 그리고 놈들의 먹이는 대체로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다.
고블린 같은 하위 몬스터는 잡아먹히기 안성맞춤이란 말이다.
아스빌람의 고블린이 특별히 강한 것일 뿐 야생(?) 고블린은 몇몇 개체를 빼면 힘이 하잘것없다.
고병갑은 잠깐 휴식을 갖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부디 저 사이에 고블린이 있기를 바랐다.
하늘이 도왔는지 그의 바람은 얼마 안 가서 이루어졌다.
민둥산 중턱에서 아래쪽을 내려보는 중 고블린 군체로 여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거리는 대략 1킬로 정도.
고병갑은 심지어 반가움까지 느끼며 그리로 뛰어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기척?”
그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고블린 군체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짐승형 몬스터로 사료됐다. 기척의 덩어리가 꽤 거대한 것을 보니 못해도 B급은 될 성싶었다.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자칫하면 코앞에서 고블린들이 뜯어먹히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쌍것들이!”
그가 폭풍 같은 기세로 내달렸다. 어떻게든 자신이 먼저 고블린들에게 닿아야 했다.
‘이러다 늦겠어.’
뜀박질로 짐승형 몬스터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고병갑은 자신은 두 발로 뛰고, 놈들은 네 발로 뛰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목표물을 두고 경쟁할 거면 종의 합치는 됐다 쳐도 다리 개수 정도는 맞춰야 할 거 아닌가?
“미친, 나도 점점 이상해지는구먼.”
고병갑은 콧방귀를 뀌며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키리얀! 도르마!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와 봐!」
그가 멈춤 없이 내달리며 외쳤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키리얀과 도르마가 동시에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로드시여! 무슨 일이십니까?」
「어어? 달려야 하는 겁니까?」
그들은 엉겁결에 고병갑과 다리를 맞추어 달렸다. 고병갑은 눈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 봐!」
「괴수들이로군요?」
「맞아, 그리고 저기.」
고병갑은 다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동족들!?」
「대충 짐작되지?」
「알겠습니다!」
「역시. 척하면 척이구먼.」
키리얀과 도르마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힘을 끌어냈다. 곧 허공으로 전격의 창과 암흑 투사체가 잔뜩 생겨났다.
고병갑도 검기를 날릴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의 사정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런 중장거리에서 적을 요격하기에는 이 두 친구가 제격이었다.
「하압!」
당찬 함성과 함께 수십 줄기의 공격이 뻗어 나갔다. 몬스터 떼 사이사이로 땅이 튀어 올랐다. 무리의 앞쪽 대열은 자연히 고꾸라졌다.
고병갑은 더욱 가속하여 앞질러 나갔다. 잠시 후 그는 상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고블린 군체와 가까워졌다.
녀석들도 이쪽을 향해 덤벼 오는 몬스터 떼를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겁에 질린 얼굴로 어설픈 무기를 꼬나쥔 꼴이 가련하다.
「로, 로드?」
「로드다!?」
고병갑을 발견한 고블린들은 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기도 했다.
만나서 반갑다는 둥 인사치레를 나눌 수도 있으리라. 하나 다른 사안이 시급했다.
도르마와 키리얀 둘의 화력만으론 족히 백 마리에 이르는 몬스터를 전부 저지할 수 없었다.
선두로 달리던 몬스터는 이미 수십 미터 안팎까지 근접한 상태였다.
「물러라! 모두 물러서!」
고병갑이 드세게 외쳤다. 고블린들은 이래저래 경황이 없었지만 그 간결한 명령을 따를 정도는 됐다.
고병갑은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이어 외쳤다.
「도란! 병사들을 끌고 나와!」
황량한 들판에 메아리가 번졌다. 바로 다음 순간. 문을 넘으며 일백에 이르는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정갈한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상태다. 그 선두에 제 몸집만 한 검을 든 도란이 있었다.
그녀가 몬스터 떼를 째려보더니 단박에 상황을 파악했다.
「전투 준비! 대형을 갖춰!」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치자 고블린들이 넓게 섰다. 일백의 병사가 창과 방패를 앞세워 뒤의 동족들을 보호했다.
「로드 저것들 잡으면 돼요?」
「그래, 싹 쓸어버려.」
「네! 가자!」
몬스터 떼와 고블린군(軍)이 맞부딪쳤다.
그 기세가 흡사 계란과 바위의 격돌처럼 여겨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