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난리통
강원도, 황해북도, 황해남도를 잇는 군사 벨트.
약 40만 명에 달하는 군인이 방어 한계선을 사수하고 있다. 철야를 시작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안면 위장으로 거뭇한 얼굴엔 짙은 피로가 녹아 있었다.
수천 종의 중화기가 사열된 자태는 가히 삼엄하다. 전차와 장갑차는 밤낮없이 기동했다.
정영운 병장은 원래 같으면 사흘 전 전역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상황이 터진 탓에 말년 휴가 도중 복귀했다. 그것도 억울한데 전역까지 무기한 연기란다.
“시발.”
하나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이곳에 그런 사람은 넘치고 넘쳤다. 당장 동기 녀석들과 타 중대 아저씨들만 봐도 동병상련이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화랑?”
“담배 시댕아.”
“용무는?”
“근무 서로 왔다, 시댕아.”
정영운이 장난스레 답했다. 전번초 근무자인 최규철 상병은 긴장을 풀며 말했다.
“정영운 병장님,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뭘 늦어? 10분 전인데.”
“에이, 근무 교대 15분 전에 오는 게 매너 아닙니까.”
“지랄하네. 그나저나 몬스터랑 싸우는데 암구호는 왜 묻는 거야? 존나 이해가 안 되네.”
“그러게 말입니다.”
“나와 새꺄, 담배나 한 대 피우고 교대하자.”
“좋습니다.”
최규철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부사수에게 말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말해라.”
“예! 알겠습니다!”
최규철이 초소에서 빠져나왔다.
정영운과 함께 근무에 투입되는 이준규 이병이 그를 지나쳐 초소로 들어갔다.
최규철은 이준규를 흘끔 쳐다보았다.
이준규는 전입해 온 지 3주도 안 된 신병이었다. 그래서일까?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쉐뱅이 새끼 너무 떠는데 말입니다. 저러다가 사고 치는 거 아닙니까?”
“쉐뱅이 말고 나나 좀 걱정해 줘라. 사고 칠 것 같으니까.”
“킥킥, 사고 치시면 군 생활 늘어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몰라. 시발, 집 가고 싶다. …특이사항 없지?”
“예, 조용합니다. 근데 균열 근처에 계속 있었더니 기 빨려 죽을 것 같습니다.”
“에휴, 뭣 같은 군대.”
두 사람은 초소 앞에서 담배를 태우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대체로 정영운이 푸념하면 최규철이 달래 주는 양상이었다.
“아 참, 정영운 병장님. 아까 낮에 이소리 보셨습니까?”
“이소리? 걔가 누군데?”
“헌터 이소리 말입니다. 모르십니까? 낮에 저희 거점 왔었는데.”
“몰라, 유명한 애냐?”
“S급입니다!”
“그러냐? 못 봤는데…….”
“와아! 진짜 운 없으십니다.”
정영운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러자 최규철은 온갖 오두방정을 떨어 대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겁나 예쁩니다. 진짜 태어나서 그렇게 예쁜 여자 처음 봤습니다.”
“새끼, 오버하기는.”
“와꾸도 와꾼데 몸매가 진짜 죽입니다. 바로 고백해 버리려다가 참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저 정도면 타율 꽤 되는데 말입니다.”
“킥킥, 지랄을 해라.”
“에이, 진짭니다. 제가 말씀 안 드렸습니까? 군대 오기 전에 만난 딸내미 줄 세우면 연병장 두 바퀴―”
탕!
킥킥거리던 두 사람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처소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타다당! 타다당!
“저, 저 미친 새끼가!”
정영운과 최규철은 피우던 담배를 아무렇게나 던지며 처소로 달려갔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신병 자식이 기어코 사고를 쳤구나! 그런 낭패감이 들었다.
그런데 처소에 오르니 놀랍게도 두 부사수 모두 멀쩡했다. 총구가 향하는 곳은 경계 방향이었다.
전방 450미터쯤. 균열이 하나 있다. 저 균열은 예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리고 토벌을 위해 오늘 오후 헌터들이 투입된 곳이기도 하다.
그 균열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흡사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모양새로.
정규철이 입을 쩍 벌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저… 저깁니다.”
“뭐?”
“이소리가 들어간 균열이… 저깁니다.”
정영운은 그 말이 시사하는 바를 당장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좆됐다는 사실 말이다.
* * *
헌터 모집 공고가 내려왔다.
고병갑 같은 프리 헌터들을 보고 전선으로 향하라는 내용이었다. ‘자율 참여’라는 문구가 적히긴 했다만 공문의 뉘앙스를 보면 강요나 다름없었다.
무시해도 독촉 문자가 쉴 새 없이 날아왔다. 얼른 협회로 와서 자원 신청서를 쓰라는 문자가.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은 이미 대부분 북으로 가 있는 상태였다. 오로지 한 개의 길드만이 도심 전반을 당당히 차지했다.
육각형 자수정을 심볼로 하는 길드 일루미션만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일루미션의 임무는 민생 보호 및 치안 유지, 그리고 유사시 도심 수호다.
실제로 길드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푸는 둥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모르고 봤다면 참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고병갑의 시선은 그리 달갑지 못했다.
일루미션이 육망교에서 파생된 길드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일루미션에 소속된 헌터들은 대부분 육망교 신자들이에요. 그들은 재앙이 시작되면 자신들만의 행동강령에 따라 움직일 거예요. 그들을 믿으면 안 돼요.
-하지만 이상하잖아? 난 육망교도 뭣도 아닌데 내게도 입단 권유가 왔었다고.
-버림패로 쓸 작정이었겠죠. 아니면 포교하여 한편으로 만들거나.
-제정신 박힌 사람이면 그런 정신 나간 계획에 동조하지 않을 텐데?
-글쎄요, 헌터 중에는 현 사회와 제도에 불만을 품은 이가 은근히 많아요. 곧 각성자들의 세상이 도래할 거고 그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고 꼬드긴다면 꽤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겠죠.
-별 미친…….
고병갑은 길가에 마련된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웠다. 육각형 심볼을 완장처럼 차고 거리를 거니는 헌터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이따금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끝까지 째려보았다.
고병갑은 그들의 눈에서 묘한 선민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그런 오묘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퉤!”
그가 거칠게 침을 뱉고 흡연장을 빠져나왔다. 오늘 바깥 일은 다 봤으니 집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핸드폰을 두들기며 뉴스 기사나 보며 시간을 때운다. 그때였다. 옆에 선 노파가 풀썩 쓰러졌다.
“아으으… 아윽.”
“하, 할머니! …흡!?”
그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쳐들었다. 하늘이었다. 지상에서 5미터쯤 떨어진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쩍 갈라졌다.
균열이었다. 균열이 발생했다!
“꺄악!”
“으아악!”
“도… 도와주세요…….”
사람들이 헐레벌떡 달아났다. 몇몇 심약자는 균열의 역장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도심지 한복판에 균열이 발생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균열에서 몬스터가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기긱! 케기기긱!”
“께륵! 께륵!”
‘몬스터 웨이브!’
균열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고병갑은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전투를 대비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에 검은 없었다.
“꺄아아악! 살려―컥!”
“으아악! 으아아악!”
“염병!”
거리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균열에서 나온 것은 대략 60마리쯤 되는 몬스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몬스터가 F급의 꺽치라는 점이었다. 물고기의 몸통에 짐승 다리를 달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하위 몬스터.
“케기긱! 케―끄륵!”
고병갑은 손날을 휘둘러 꺽치의 머리통을 으깨 놓았다. 그 아래 널브러져 있던 40대 중년은 쏟아진 피를 얻어맞고 그만 실신해 버렸다.
“젠장!”
꺽치 따위야 우습다. 정작 문제는 민간인들이었다.
그들에겐 F급 몬스터도 재앙 그 자체였다. 꺽치들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물어뜯었다.
행인들은 필사적으로 다리를 놀렸다. 하나 몬스터를 상대로 달음박질은 무의미했다.
‘모두 살릴 순 없다!’
그가 빠르게 결심을 굳혔다.
모두 살리는 건 애당초 무리다. 다만 최대한 신속히 모든 적을 섬멸할 수는 있다.
그는 가히 살벌한 기세로 내력을 방출했다. 이윽고 벼락처럼 움직였다.
주먹과 다리가 파죽지세로 뻗어 간다. 고작 꺽치 잡는 데 검까지 쓸 필요는 없었다. 애저녁 그의 몸이 흉기 그 자체였다.
손날 비수로 꺽치 다섯을 한 번에 가른다.
발차기를 날리면 꺽치가 포탄에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전투 중 흘끔 옆을 보았다. 일루미션 소속 헌터들이 가세하여 꺽치를 잡아 대고 있었다.
고병갑은 짐짓 놀랐다. 그들이 도와줄 거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께엑!”
“칵!”
고병갑을 비롯한 다섯 헌터가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그 덕분에 당장의 소란은 빠르게 잠식됐다.
“…젠장.”
거리는 꺽치의 시체로 너저분했다. 그리고 그만큼 죽은 사람도 많았다. 널브러진 육신을 보고 있자면 욕지기가 치솟았다.
“저기다!”
“부상자를 옮겨!”
도심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과 헌터들이 이제야 몰려왔다. 대체 뭘 하다 온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뒷정리는 그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병갑은 미처 잡지 못한 몇 마리의 몬스터를 쫓아 몸을 움직였다.
마치 헨젤이 흘린 빵조각처럼, 늘어진 핏자국이 몬스터의 경로를 알려 주었다.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고병갑과 반대 방향으로 도망쳐 왔다. 그는 졸지에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신세가 되었다.
‘위로 가는 게 빠르겠어.’
고병갑은 훌쩍 도약해 건물 옥상으로 올랐다. 얼마간 달렸을까? 그는 어느 후미진 골목을 내려보게 되었다.
그곳에 달아난 꺽치가 있었다. 그 앞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엎어진 민간인이 있었고.
“아… 아아… 살려…….”
서둘러 뛰어내리려던 찰나. 누군가 한발 앞서 등장했다. 몸놀림을 보아하니 헌터인 듯했다.
‘일루미션?’
상박에 찬 완장의 표식이 일루미션 소속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는 민간인을 등진 채 꺽치와 대치했다.
고병갑은 ‘저 인간이 어련히 처리하겠군.’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 했다. 한데 어딘가 낌새가 이상했다.
“크르르…….”
꺽치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본래 사람만 보면 달려드는 게 몬스터의 습성일진대 말이다.
그때 꺽치와 대치하던 헌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 감사합니다…….”
“풉! 뭐가 감사한대?”
“네?”
헌터가 무기를 거두며 슬그머니 비켜섰다. 그러자 꺽치가 헌터는 건들지 않고 민간인에게 달려들었다.
“꺄아아악!”
“케기기기―칵!”
꺽치가 민간인을 베어 물기 직전. 고병갑이 뚝 떨어지며 녀석을 두 동강 냈다.
그 모든 일이 0.5초 안에 벌어졌다.
“어, 언제!?”
헌터가 화들짝 놀라며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고병갑은 저쪽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 뭐야? 몬스터 프락치냐?”
“쳇! 제기랄!”
놈이 별안간 검을 뽑더니 휘둘렀다.
“이 싸가지 없는 놈이 대뜸!”
하나 고병갑을 잡기엔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얼추 B급 정도이려나?
고병갑은 바람처럼 움직이며 검격을 피해 냈다. 순식간에 파고든 뒤에는 다섯 번의 정권을 때려 박았다.
“커학!”
헌터가 왈칵 피를 토했다. 고병갑은 멈추지 않고 팔과 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뼈 부스러지는 소리가 섬뜩하다.
“끄아아아악! 끄악!”
“시끄러 인마.”
“읍!”
고병갑이 헌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흘끔 뒤쪽을 보았다. 여인은 기절했는지 미동이 없었다.
“읍! 으읍!”
“너는 나 좀 보자.”
그가 헌터를 데리고 아스빌람으로 건너갔다. 순식간에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헌터는 난생처음 겪는 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드시여?」
「오, 투르카. 마침 잘 만났다.」
“읍! 읍! 으읍!”
「이 인간은 누구입니까?」
투르카가 덩치에 맞지 않는 순둥한 얼굴로 질문했다. 고병갑은 팔을 크게 휘둘러 사내를 패대기쳤다.
“으으…….”
「이놈 데려다가 쇠사슬로 결박해 놔.」
「적입니까?」
「그런 셈이지. 아무튼 결박한 다음 감시하고 있어. 위험할 것 같으면 죽여도 좋다.」
「예! 알겠습니다!」
투르카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내는 기겁하며 발버둥 쳤다.
“으아악! 저리 꺼져! 이이! 자이언트 고블린 따위가!”
놈은 팔다리가 부러진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투르카의 이마로 핏대가 올랐다.
「이놈이!」
투르카가 별안간 큼직한 주먹으로 사내의 복부를 때려 맞추었다.
“끄으어억…….”
고작 한 대 얻어맞았을 뿐인데 사내가 축 늘어졌다. 투르카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허약한 인간이로군요.」
「네 주먹이 무지막지한 거야.」
「죽지는 않았습니다.」
「됐어, 잘했다. 이따가 다시 올 테니 잘 데리고 있어라.」
「옙!」
고병갑이 아스빌람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