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11화 (111/151)

111화 병합

폭풍전야. 폭풍이 몰아치기 전 밤은 고요하다는 의미다. 다만 그 말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 한국의 분위기는 사뭇 살벌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폭풍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작년 8월경, 한반도에 최초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 그때 국민의 불안지수는 하늘을 찔렀고, 사재기나 생필품 품귀 현상이 실과 바늘처럼 따라붙었다.

현재 거리의 모습은 그 당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쌀이나 라면 통조림 따위를 사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대형 마트부터 동네 구멍가게까지 줄이 끊어진 곳이 없다.

연일 보도되는 몬스터 웨이브 사건 때문이다.

고병갑은 뉴스가 되레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들이 선보이는 기사는 너무나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며 섬뜩했으니. 조금 쉬쉬하거나 은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뭐… 그게 언론의 참 역할이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만.

아르헨티나는 벌써 국토의 70% 이상이 수복 불가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인접국인 칠레와 우루과이 또한 번져 나가는 몬스터로 골치를 앓고 있고.

몬스터들이 이 기세로 북상하면 머지않아 파라과이, 볼리비아, 브라질도 몬스터들에게 먹힐 거란다. 쉽게 말해 바다 건너는 좆됐다는 말이다.

“예, 사장님. 문자 드렸던 사람입니다. 예예, 그럼 1시쯤 방문하겠습니다. 예에.”

“오늘도 나가는 거니?”

통화를 종료하자 어머니인 박영옥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아, 응. 볼일이 좀 있어서.”

“요즘 같은 시국엔 가만히 집에 있지 그러니. 여간 흉흉한 게 아니던데.”

“괜찮아. 엄마나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엄마야 갈 데도 없지만서도…….”

고병갑은 아련히 웃으며 신발을 고쳐 신었다.

“그럼 갔다 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조심히 갔다 오렴.”

고병갑도 여느 사람들처럼 혹시 있을지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했다. 다만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그가 구하는 품목은 쌀, 라면 통조림 등의 비상식량이 아니었다. 각종 농작물의 묘목과 여러 종류의 가축이었다. 그런 것들은 흉흉한 시국에서도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벌어 둔 돈은 충분했다. 더는 병원비로 지출될 돈이 없기도 하고.

‘아끼다 똥 되는 것보단 써 버리는 게 낫지.’

그는 거의 모든 재산을 현찰로 환원했다. 게다가 들고 있는 현찰은 다 써 버릴 심산이었다.

서시희 말만 믿고 무책임하게 돈을 써 버리느냐 질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병갑은 생각이 달랐다.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야. 하지만 한 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

서시희가 예견한 재앙이 정말로 닥치면 지폐 다발은 휴지만큼의 쓸모도 없어진다. 금고 얼싸안고 엉엉 우느니 속 시원하게 써 버리는 게 낫다는 말이다.

하여 고병갑은 오늘도 바삐 움직였다. 전국 곳곳을 쏘다니며 작물과 가축을 사들인다.

판매업자들은 고병갑이 은인이라도 된 양 굴었다. 흉흉한 시국에 매상을 올려 주니 고마운 것이다. 사실 고마운 건 고병갑 쪽이었지만.

“아이구, 감사합니다, 사장님!”

“후후, 제가 감사하죠.”

목장에 들러 가축으로 쓸 양을 200마리나 사들였다. 이 짓 하려고 5톤급 메가 트럭이랑 트레일러까지 샀다. 군시절 대형 면허를 따둔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잔금을 치르고 가축을 트레일러로 옮겨 싣는다. 목장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길까지 차를 몰고 간다. 그 뒤엔 차째로 아스빌람에 넘겨 버렸다.

이젠 허공에서 트럭이 튀어나와도 고블린들이 놀라지 않았다. 그저 ‘왔는가 보다.’ 하고 넘겼다.

「로드시여, 오늘도 짐승을 싣고 오셨습니까?」

마침 지척에 있던 키리얀이 아는체했다. 고병갑은 담배 한 대 꼬나물고 대답했다.

「어, 양이다. 어이, 거기 털북숭이들. 다 이리 와.」

「예!」

비스트 고블린들이 몰려왔다. 고병갑은 능숙하게 트레일러 문을 열고 발판을 설치했다.

양들은 비스트 고블린에게 겁먹어 완전히 얼어붙었다.

「어제 목책 박아 둔 곳 있지? 그리로 몰고 가서 풀어놔.」

「알겠습니다!」

「암놈, 수놈 따로 분류해 놓고 여물 쒀서 먹여.」

「옙! 자, 가자! 케르륵! 케륵!」

“메에에…….”

비스트 고블린이 으르렁대자 양들이 3열 종대로 발맞춰 이동했다. 하여간 편리한 능력이다.

「요새 뭐가 많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키리얀이 양 떼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고병갑이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뭐, 그러려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에이, 됐어, 인마. 무슨 무리야.」

「무리가 아니시라면 다행입니다만.」

사실은 키리얀의 우려가 맞았다. 한 며칠 흥청망청 돈을 썼더니 통장 잔고가 반절 이하로 줄어들었다.

애지중지하던 곳간이 비는 기분이라 씁쓸했다. 그걸 달래려 담배만 뻐끔뻐끔 피운다.

‘…세상이 전쟁통이 되면 담배도 못 피우는 거 아닌가?’

문득 그런 불안감이 스쳤다.

고병갑은 담배를 한 5만 갑 정도 구비해 놓을까, 이참에 끊을까 고민했다. 아쉽게도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성벽 쪽은 어때? 별일 없냐?」

「정오쯤에 그러글 십수 마리가 몰려오긴 했습니다만, 모조리 처치했습니다.」

「다친 애는?」

「경비대원 한 명이 전투 중에 경상을 입은 것 빼곤 없습니다.」

「다행이네. 그러글 시체는 잘 처리했고?」

「예, 숲에 가져다 뿌렸습니다.」

「잘했다.」

그가 키리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키리얀은 배시시 웃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역시… 로드께서 계실 때야 비로소 아스빌람이 평화로운 것 같습니다. 그분, 아니 그자가 있을 때는…….」

「야야, 키리얀. 그 얘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앗. 죄송합니다.」

「다 지나간 일 아니냐. 지나간 일 들춰 봐야 속만 쓰리지.」

「저, 저는 단지 지금이 좋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안다, 알아. 그나저나 너 성벽으로 가려던 거 아니냐?」

「예, 맞습니다.」

「어서 가 봐.」

「알겠습니다!」

키리얀이 고개를 꾸벅이고 떠나갔다. 고병갑은 한 까치 더 입에 물며 발타드렌의 전경을 감상했다.

고블린들이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노곤함이나 피로에 물든 얼굴은 아니었다. 다들 해맑게 웃고 있다.

역시 이놈들은 바보처럼 실실거릴 때가 보기 좋다.

‘그래, 괜히 마음 쓰지 말자.’

고병갑은 서시희와의 마지막 회담을 떠올렸다.

그녀는 참으로 뻔뻔하게도 고병갑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당신이 네 번째 창이 돼 주길 바라요.

그녀는 고건룡을 암살할 거라고 했다.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내를 말이다.

그 계획 자체를 힐난하거나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위해 박수라도 쳐 주고픈 심경이었다.

듣자 하니 계획도 마냥 허무맹랑하지는 않았고.

다만 자신이 나서서 암기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대의와 신념만으로 목숨을 걸 수 있을는지 몰라도 본인은 아니었다.

고병갑은 지킬 사람이 많았다. 엄마도 지켜야 했고, 믿고 따르는 고블린들도 지켜야 했다.

-만약 우려하는 사태가 정말로 일어난다면 나는 당신과 같은 편에서 싸우길 약속하겠어. 하지만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는 않아. 나는 내 독단으로 움직이겠다.

그가 서시희에게 한 말이었다.

서시희는 ‘암살이 실패하면 어차피 미래가 없다!’며 끝까지 매달렸지만 차마 고병갑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터놓고 말해서 지구가 개차반이 나도 아스빌람에서 살아가면 그만이다. 마음의 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다.

* * *

고병갑은 꽤 오래간만에 아스빌람을 질주했다. 지금 시각은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4시경이었다.

「좀 자지 그러냐.」

「아닙니다. 로드께서 깨어 계시는데 제가 어찌 자겠습니까.」

조수석엔 도르마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치토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뒷좌석에 메리린만 타고 있으면 딱 그날이네.’

그다지 좋지 못한 추억이 떠오른다. 흘끔 옆을 보니 도르마도 그런 듯했다. 사내놈 둘이서 달리 할 말도 없으니 부지런히 가속 페달을 밟았다.

대략 11시간 정도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들은 오후 3시 무렵 치토산에 도착했다.

치토산의 성주 쿤타는 고병갑을 보자 기뻐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이제야 온 것이오!」

「하하, 이리 기다리고 계신 걸 보니 서신이 제대로 닿았나 봅니다.」

「…그렇소.」

고병갑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보낸 사신은 잘 있는지요?」

쿤타가 질린 표정으로 한 건물을 가리켰다. 식당이었다.

「치토산 재정을 거덜 내는 중이오.」

「너무 야속하게 생각하지 마시지요. 날아오느라 힘들었을 겁니다.」

고병갑은 우선 식당으로 들어갔다. 조그마한 하피가 희멀건 죽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 로드!」

하피가 고병갑을 보며 외쳤다. 아직 어리고, 주위 고블린들이 온통 로드라고 해대는 통에 따라 부르는 모양이다.

그는 하피 로드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용케 찾아왔구나?」

「응, 로드가 말한 방향. 쭉 가니까 나왔어.」

「오냐, 잘했다.」

이 하피도 인생이 참 기구하다.

랜드리올이 잠시 아스빌람을 차지하고 있을 때 이 녀석은 ‘과녁’으로 쓰였다.

다리에 쇠사슬을 매달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하늘에서 버둥대는 하피를 표적 삼아 투창 연습을 했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피가 움직이는 과녁으로 꽤 쓸모가 있었기에 죽지 않을 만큼 치료를 해 주었다. 덕분에 목숨만큼은 부지할 수 있었다.

랜드리올이 물러간 후 고병갑은 강철 우리에서 썩어 가던 하피를 발견했다. 발견 당시 녀석은 몬스터의 포악함에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였다.

고블린 비슷한 것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며 꽥꽥 소리쳐댈 지경이었으니.

더는 길들이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여 죽이려고 했다. 그때 에아가 불쌍하다며 하피의 기억을 지워 주었다.

그제야 하피는 예전의 온순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만 먹고 일어나. 이제 돌아가자.」

「가는 거야?」

「그래, 가는 거다.」

고병갑이 하피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성주 쿤타는 치토산의 주민을 넓은 공터에 집결시켰다. 주민들은 가벼운 봇짐을 품에 안고 있었다.

고병갑은 그리로 다가가며 물었다.

「모두 모인 겁니까?」

「그렇소. 819명, 다 모였소.」

「이동 방법은 서신에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제가 일러둔 사항은 모두 숙지하셨으리라 믿겠습니다.」

「그냥 꼼짝 않고 기다리라는 것 아니오?」

「맞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고병갑이 지구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걸 보자 정령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쿤타도 미리 언질 받긴 했지만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서신에 적혀 있던 그것인가 보오?」

「그렇습니다. 저리로 넘어가면 됩니다. 인원들을 좀 통제해 주시지요.」

「알겠소! 자, 맨 앞 열부터 저기를 넘어가라!」

정령들은 쿤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

문을 넘어서면 나타나는 곳은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어느 폐공장이었다.

부지가 워낙 후미진 곳에 있고, 방치된 지도 족히 십수 년은 된 곳이라 찾아오는 사람이 아예 없는 곳이다.

혹시나 해서 며칠간 답사를 다니며 확인했는데, 본인 외에는 폐공장을 찾는 사람이 전무했다.

정령들을 몇 시간 숨겨 두기에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모든 정령을 폐공장 안으로 안내했다. 도르마와 하피도 함께 데리고 나왔다.

「여기서 딱 한나절만 숨죽여 기다리고 계십시오. 자정 무렵에 제가 데리러 오겠습니다.」

「알겠소. 당신만 믿고 기다리리다.」

「절대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주민들 통제를 잘해 주십시오.」

「걱정 마시오.」

「도르마, 너도 여기 남아서 인원들 통솔하는 걸 도와라. 찾아오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꼭꼭 숨어 있어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물이랑 식량은 저쪽에 놔두었으니 적당히 먹으면 된다.」

「예.」

「그럼 이따가 보자.」

고병갑은 서둘러 아스빌람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발타드렌을 향해 아주 빠르게 달렸다.

처음에는 버스 같은 걸 대절해서 정령들을 실어 나를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문’을 통한 인원 운송이었다.

시속 180킬로로 수 시간을 달리니 발타드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온종일 운전을 했더니 몸이 기진맥진했다. 그래도 엎어져 잘 수는 없다.

그는 다시 지구로 넘어갔고, 무사히 정령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우… 우와!」

「여기가 발타드렌?」

정령들은 발타드렌의 위엄을 보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발타드렌에 비하면 자기들이 살던 치토산은 시골 촌 동네나 다름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고블린들이 정령들의 안내를 도왔다.

그들은 발타드렌 옆에 작게 딸린 분지로 이동했다. 집과 편의 시설은 미리 모두 지어 놓았다.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됐다.

「당신들은 이제 이곳 ‘인술라’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정령들만을 위한 공간이니 마음 편히 지내십시오.」

「우… 우리에게 이리 좋은 곳을 내줘도 되는 거요?」

「뭐 어떻습니까? 이제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 텐데.」

고병갑이 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가 됐건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군요.」

쿤타가 고병갑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우리를 이곳에 불러 줘서 고맙소. 부디 폐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리다.」

「예, 좋군요.」

이날 819명의 정령을 아스빌람에 정착했다.

아스빌람의 국력은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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