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10화 (110/151)

110 세계의 진실

드래곤이란 이름은 꽤 익숙했다. 당장 고대의 상점만 봐도 ‘골드 드래곤 고기’라는 상품이 있잖은가.

물론 고병갑에게 있어 드래곤이란 이름만 알고 얼굴은 모르는 연예인 비슷한 것이었다.

서시희는 설명을 이어갔다.

마드무트가 기적을 일으켰고, 최후의 18인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곤두박질쳤다.

시공의 격류에 몸을 맡기고 정처 없이 떠내려가던 중. 그녀는 마치 표류하는 듯 보이는 거대한 신비와 마주치게 됐다.

그렇다. 그 신비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녀석은 가히 필사적인 기세로 서시희를 노렸다.

딱히 그녀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서시희를 발견한 드래곤이 저돌적으로 접근해 왔을 뿐.

놈은 말릴 틈도 없이 융화를 시도했다.

서시희는 자아를 빼앗기는 끔찍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저항했다.

몸의 지배권을 두고 두 자아의 자웅 다툼이 이어졌다. 그 일은 고작 0.1초 동안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1억 년이 넘는 오랜 세월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시공의 틈새에선 역설적으로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정확한 계산은 무의미했다.

다만 서시희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오랫동안’이란 표현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 쟁탈전이 끝났다.

승자는 그녀였다.

“난 그 이후 전과 다른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됐어요. 이 세계와 연결된 포탈을 열 수 있는 것도 능력 중 하나죠. 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건 내 사상이었어요.”

“사상?”

“네, 자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끝없는 싸움. 결국 내가 이겼지만 나는 또 한 명의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서시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 뉘앙스가 꼭 남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했다.

“이 애한테 남아있는 것은 마드무트에 대한 증오심뿐이었어요. 이 세상에 있는 바닷물을 전부 끌어와도 채울 수 없는 거대한 증오심이었죠.”

“…그렇게 미워하는 걸 보니 단체로 마드무트에게 잡아먹히기라도 했나 보군.”

“음!?”

서시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병갑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알긴, 고대의 상점에 다 적혀있거든. 드래곤이 신의 만찬에 쓰였다고.’

고병갑은 휘휘 손사래 치며 화두를 돌렸다.

“뭘 그렇게 정색해?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사상이 개조된 탓에 마드무트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이 말인가?”

“결론적으로 보면 그런 셈이죠. 드래곤의 증오심이 내 증오심을 덮어 버린 거예요.”

“그다지 정의로운 계기는 아니구먼?”

그가 짓궂게 말했다.

서시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고작 복수심 때문에 인류를 말살시키는 건 그릇된 일이라고 자각하고 있어요.”

“드래곤과 융화하지 않았더라면 당신도 그 계획에 동참하고 있을 거 아니야? 허울만 그럴듯하지 사실은 위선인 거 아닌가?”

“그, 그건…….”

그녀가 말을 흐렸다. 솔직히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관두기로 했다. 인제 와서 도덕적인 것을 따져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까.

“됐어. 지나간 얘기는 그만하자고. 그래서 계획이 뭐야? 당신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 아니야.”

그가 떠보듯 물었다. 서시희는 무의식적으로 벽난로 쪽의 아이들을 보았다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깍지낀 채 테이블에 얹어진 손이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초조해 보였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왔어요. 과거로 돌아온 시점은 1999년 2월 9일.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27년쯤 전이죠.”

1999년의 세계는 아직 딥 임팩트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리로 나가면 종말론자들이 종말을 부르짖고, 도시 곳곳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뭣도 모르던 각성자들이 균열로 뛰어들었다가 개죽음당하거나 실종된 것도 이맘때의 일이었다.

1999년의 서시희는 19살이었다. 그때 그녀는 아직 각성도 하지 못한 고등학생 여아에 불과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0년. 각성 붐이 일었던 해인 만큼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새로 각성했다.

그 틈새에는 서시희도 있었다. 아니 2000년 한국의 주인공은 단연코 서시희였다. 한반도 첫 SS등급 헌터의 탄생이었으니까!

그녀는 일단 기존의 역사대로 행동했다. 감정의 갈피를 확실히 잡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개의 신분을 더 만들어 놓았다.

김하나라는 예명으로 말이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서시희는 복잡한 마음으로 기존의 역사를 되풀이했다. 그러던 2003년. 최후의 18인 중 한 명이었던 빌리안 밀러가 그녀를 찾아왔다.

-때가 되었소. 나와 함께 갑시다.

빌리안의 전용기를 타고 날아간 곳은 노르웨이의 어느 무인도였다. 그곳에 최후의 18인이 모두 모여있었다.

최후의 일원 중에는 아직 각성하지 못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생김새며 기운이며 너무 낯선 탓에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개중 특히나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이제 갓 10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아이였다.

만약 아이가 한국어로 인사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고건룡인 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서시희는 이래저래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와중에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최후의 일원들이 고건룡에게 고개를 수그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메시아시여, 드디어 모두 모였습니다. 서둘러 다음 지령을 내려주십시오.

“메시아?”

“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메시아 혹은 대주교라 부르더군요.”

“왜지? 그도 당신처럼 뭔가 특별한 힘을 얻은 건가?”

“맞아요,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그는 우리와 조금 달랐어요. 그는 마드무트와 직접 교신할 수 있었죠.”

‘신과 소통이라… 끝내주는구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고병갑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서시희는 지체하지 않고 다음 내용을 말해주었다.

“최후의 일원들은 고병갑을 필두로 이런저런 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육망교 창설이 대표적인 사업 중 하나였죠.”

“육망교라면 그 사이비 종교를 말하는 거군.”

“그래요, 그들은 자신들의 장기말로 쓸 수족을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육망교라는 우스꽝스러운 종교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전파시켰죠. 또 그들은 마석 발전소의 개발을 15년 이상 앞당겼어요.”

서시희가 이마를 짚더니 끙 앓았다.

“그때는 차마 몰랐어요. 왜 그렇게 발전소를 지어 대는 것인지…….”

“당신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나? 마드무트에 대한 증오심이 끓어 넘쳤다고 말했잖아. 왜 당장 깽판 치지 않은 거야?”

“그 당시의 나는… 아직 확실하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어요. 혼란스러웠으니까요. 마침내 결단을 내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고요.”

2011년. 고건룡이 각성을 하고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무렵 서시희는 최후의 일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인류를 파멸로 이끌기보단 설득하고 화합해야 한다고!

최후의 일원들은 서시희의 진심 어린 호소에 감동하기는 개뿔.

가차 없이 그녀를 살해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더군요. 그저 갈가리 찢어발길 뿐이었죠.”

“자, 잠깐만. 분명 그날 죽었다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드래곤의 능력 덕분이에요. 나는 적절한 준비만 되어있다면 불멸할 수 있거든요.”

“…….”

고병갑은 말문이 막혀서 적당한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다른 걸 묻기로 했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하지 않았나?”

“당연히 그렇게 했어요. 처음 살해당했을 때, 나 혼자 힘으로 그들을 막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그래서 믿을 만한 인간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죠.”

“어떻게 됐는데?”

“후후…….”

서시희가 작게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은 게 아니었다. 너무 허탈해서 웃은 것이다.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모두 박살 났어요. 나와 얽혔던 자들은 모조리 살해당했고, 나 역시 또 한 번 죽임당했죠.”

“…….”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더군요. 나는 그날 이후 서시희란 신분을 완전히 버렸어요. 철저하게 몸을 숨겼죠.”

침울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담배가 고파졌다. 고병갑은 잠시 시선을 거두어 벽난로 쪽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이 전부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좀 아쉬웠다.

“그래서… 이제 어쩔 셈이야? 애들 셋 데리고 다니면서 발전소 부셔대는 것도 무의미해졌다고 했잖아. 설마 푸념이나 늘어놓자고 날 부른 것은 아닐 테고.”

“물론 아니에요.”

서시희는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 말했다.

“나는 그들 계획의 치명적인 허점을 알고 있어요.”

“제발 그럴듯한 것이었으면 좋겠군.”

고병갑이 비아냥댔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부르는 존재, 다시 말해 고건룡이 없으면 절대 대업을 완성할 수 없어요.”

“…….”

“알파. 베타. 오메가.”

“네 마스터.”

그녀가 부르자마자 세 아이가 달려왔다. 고병갑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훑어보았다.

“쟤들도 드래곤인 건가?”

“아니요, 이 아이들은 인간이에요. 다만 여느 인간과는 다르죠.”

“어떤 점이 다른데?”

“전에도 말했었죠. 내가 이레귤러를 찾고 있다고요. 이 아이들이 바로 이레귤러에요. 아주 드물게 관측되는 성장형 각성자죠.”

“성장형 각성자?”

적지 않게 헌터 생활을 한 그였지만 성장형 각성자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았다.

보통 각성 등급이라는 건 최초 판정받은 그대로 평생을 가는 법이다. 고블린 로드 같은 특수 케이스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다는 건가?”

“이론상으로요.”

“그다지 강한 것 같지는 않던데?”

그가 도발하자 아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서시희는 슬쩍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리미트가 걸려 있기 때문이에요. 그날 리미트가 하나라도 해지됐더라면 당신은 살아있지 못할 거예요.”

“…….”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깃들어 있었다.

“얘들은 내가 만든 비장의 비수예요. 신의 옆구리를 찌를 세 자루의 비수.”

“고건룡을 암살해서 이 판을 끝내겠다는 건가?”

“정확해요.”

“그렇다면 날 필요로 한다는 말도…….” “맞아요. 당신이 네 번째 창이 돼주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 * *

고병갑이 서시희의 거처를 빠져나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인류 사멸에 반한다는 입장 역시 같았다. 하지만 끝내 의견이 합치되지는 않았다.

그는 지구로 넘어오자마자 다시 아스빌람으로 향했다. 물론 천도산 정상이 아니라 발타드렌을 말하는 것이다.

「아! 로드 왔어?」

「오냐, 왔다. 밥 먹었냐.」

「응, 아까 먹었다.」

「그래, 일 봐라.」

마주치는 고블린들이 아는 척했다. 지난 몇 주 사이 그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그는 털래털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선 뒷정리가 한창이었다.

그는 또 한차례의 인사 세례를 받아준 뒤 에아를 불러 먹을 것을 좀 가져오게 했다. 온종일 먹은 게 없는 터라 배가 고팠다.

「남은 게 이것밖에 없네요. 당신이 미리 말해 줬다면 닭이라도 잡았을 텐데요. 아니면 지금 잡을까요?」

「에이, 됐어. 이거면 충분해.」

그녀가 내온 것은 찐 옥수수와 고구마 몇 덩이였다. 고병갑은 그것들은 주워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실감이 안 되네.’

서시희에게 들은 이야기는 예상했다면 예상한 것이고, 놀랍다면 놀라운 것들이었다.

다만 머지않아 엄청난 살육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내용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와닿지 않았다.

‘나는 그냥 평화롭게 살고 싶은 건데.’

지구에서 돈 벌고, 아스빌람에 와서는 농사나 지으며 천하태평하게 사는 것이 그가 추구하던 삶이었다.

그런데 이번 접선으로 그 작은 소망은 날아가 버렸다. 진실을 안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우는소리나 할 수는 없지. 서둘러 대비해야 해.’

그래도 미래에 닥쳐올 재난을 알고 있으니 대비하기 수월했다.

더구나 그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쉘터를 가지고 있다. 자격이 없으면 발조차 들일 수 없는 초강력 쉘터 말이다.

‘여차하면 아스빌람으로 완전히 이주할 수 있게 준비해야겠어. 우선 엄마부터 모셔 오고, 늦기 전에 고블린도 더 모아야 해.’

고병갑은 고구마를 씹으며 머릿속에 많은 것을 그렸다.

지금은 신아스빌람 2기가 출범할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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