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09화 (109/151)

109 세계의 진실

-그 존재는 자신을 ‘마드무트’라고 소개했어요.

무수한 미사일이 지상을 때렸다. 사방에서 폭음이 들린다. 그럴 때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천지가 요동쳤다.

최후의 18인은 넋 놓고 하늘만 올려 보았다.

도대체 왜? 그들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만 헌터의 희생으로 최후의 적을 잡아냈다. 그들은 정치, 이념, 전쟁을 다 떠나 인류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기껏 돌아온 게 폭약 세례라니.

‘몬스터와 함께 땅에 묻혀라!’라는 인류 연합군의 의중을 깨달은 것은 정말로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어떠한 징조도 없이 세상이 멈추었다.

최후의 18인은 형형색색의 빛줄기가 몰아치는 공간에서 눈을 떴다. 서시희는 그곳을 ‘무한대의 유성우가 쏟아지는 우주’라고 묘사했다.

옆을 스쳐 가는 별똥별 하나하나가 시간과 공간이었다. 그랬다. 그곳은 시공의 틈새였다. 누가 설명해 준 건 아니지만 저절로 알 수 있었다.

그곳엔 ‘최후의 적’도 있었다.

앙골모아니 사탄이니 부르는 명칭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대부분 헌터는 단순히 최후의 적(Last enemy)이라고 불렀다.

놈의 뒤에 무언가 더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습구나. 대의를 위해 희생한 대가로 불 막대기를 얻어맞다니. 그것이 한없이 불완전한 너희 필멸자의 한계다. 공포 앞에 너무도 쉽게 분열하지.>

단 한 번도 입을 연 적 없는 ‘최후의 적’이 말을 걸어왔다.

육성으로 하는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직접 전하는 메시지. 산전수전 다 겪은 최후의 18인이었으나 난생처음 겪는 초현실에 입을 쩍 벌렸다.

<너희는 실패했다. 그리고 나도 실패했다. 하나 실패가 기회의 소멸을 뜻하는 것은 아닐지어다. 너희는 필멸자의 한계를 극복했고, 나는 너희의 가치를 높이 산다. 그러니 너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다… 당신은 대체 뭡니까?”

<나는 우주의 제일 큰 조각. 불완전한 것 중 가장 완벽한 것. 너희 필멸자가 하늘, 세계, 태양, 혹은 신이라 부르는 존재. 나는 마드무트다.>

마드무트라는 이름이 언급되자 고병갑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서시희는 목이 타는지 차를 마시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가 재차 입을 연 것은 고병갑의 인내심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마드무트.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줬어요.”

“무슨 계획이었지?”

“그는… 어떤 공간을 만든다고 했어요. 오직 극락만이 존재하는 완전무결의 공간이라고 했죠. 자신은 그곳에서만 살 수 있다면서요.”

“완전무결의 공간?”

“네, 이름 붙이기를 천상계라고 하더군요.”

‘천상계!’

다시 아는 단어가 나왔다.

천상계라 하면 신과 그의 종복들이 사는 곳이다. 아인들이 지상계에 살고, 정령들이 영계에 살 듯 신은 천상계에 사는 것이다.

아쉽지만 랜드리올의 기억을 엿보아도 그 이상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그래도 추측만큼은 가능했다.

‘마드무트가 천상계에서만 살 수 있다고? 잠깐, 분명 지상을 침공했던 악마가 끝내는 천상계까지 꿰찼다고 했더랬지?’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스빌람에서 쫓겨난 마드무트가 지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목적은 천상계를 만드는 거고. 그러면…….’

일련의 사고가 이어진다.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번뜩 소리쳤다.

“젠장! 그렇게 된 거였나?”

“그렇게 되다니요?”

맥락 없는 탄식에 서시희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집에서 쫓겨났으니 새 보금자리 삼기 위해 지구를 침공한 거였어. 제기랄. 그럼 모든 일이 그 악마란 새끼들 때문… 헉!?”

중얼거리던 그의 안색이 별안간 하얗게 질렸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고병갑을 보며 서시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고병갑이 몸을 덜덜 떨었다. 적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악마를 불러들인 게… 사라온이었다고?”

* * *

고병갑은 랜드리올의 기억에서 끔찍한 부분을 발견했다.

마드무트에 의해 종족이 저주를 받고, 아스빌람이 파국에 치달을 무렵의 일이었다.

많은 이가 랜드리올이 왕후 바린을 떠나보낸 후 골방에 틀어박혀 자폐가 됐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랜드리올은 복수를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건 금단의 영역, 즉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일이었다.

한낱 피조물이 넘봐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랜드리올은 물러서지 않았다. 멸국(滅國)은 고사하고 종족의 파멸을 앞둔 상황에서 종족의 지배자로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애초에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월식이 일어 온 세상이 암흑으로 가려진 날, 랜드리올은 ‘태초의 악마’를 불러냈다.

사람들은 악마를 단순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께름칙한 덩어리’쯤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칠 정도로 격하된 평가였다.

악마의 본질은 ‘신의 허물’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과거. 신이 천상계에 오르기 위해 벗어 던진 껍데기.

쉽게 말해 그 근본은 신과 같다.

태초의 악마가 물었다.

-지상의 미물이 무슨 까닭으로 나를 깨웠는가.

-나와 거래하자. 너희에게 얼과 지혜를 주마. 대신 힘을 다오.

-거절한다.

-뭐라고? 어째서냐! 너희는 셀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그저 존재하기만 하지 않았나! 너희라면 생(生)을 간절히 바랄 줄 알았는데?

-우리의 힘은 거시적인 것이다. 미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너희 미물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야. 세계의 질서가 뒤바뀌고 혼란이 찾아올 것이 자명하다.

-흥! 네가 세계의 질서를 걱정할 이유가 무엇이더냐? 솔직히 말해라. 단지 마드무트가 두려운 게 아닌가?

-감히 그따위 말을…….

-너흰 영겁의 시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해 오지 않았는가? 그 저주받은 신세를 탈피하고 싶지 않으냐? 네 말마따나 나는 일개 미물이다. 그런데도 신과 전쟁을 벌여 일곱의 신성 전사를 잡아냈다.

-신성 전사를?

-그렇다! 일개 미물인 나조차도 신성군의 피를 받아 낼 수 있었다. 하물며 한때 마드무트의 일부였던 너희라면 천하에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너희가 지상으로 나오더라도 마드무트가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

-생각해 보라. 너희가 두렵지 않았다면 왜 빛조차 들지 않는 지하계에 너희를 몰아넣었겠는가? 나와 거래하자. 너희가 너희 스스로 존재할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 대신 힘을 조금만 나누어다오.

태초의 악마는 한참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랜드리올은 수천 사라온의 넋을 악마에게 바쳤다. 대가로 신의 권능을 얻었다. 그는 새로 얻은 권능을 바탕으로 훗날의 복수를 위한 밑천을 마련해 갔다.

특히 ‘고대의 상점’은 그가 만들어 낸 희대의 역작이었다.

하지만 그런 랜드리올조차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악마의 폭주다.

‘랜드리올도 거기까진 예상하지 못한 거야. 악마들이 지상계와 영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천상계까지 쳐들어갈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거지.’

아스빌람에서 지구로 이어진 재앙의 굴레.

그 시발점에 선 자가 랜드리올이었다. 말하자면 이 모든 일이 랜드리올이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고병갑은 그야말로 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랜드리올… 너는 진짜 대단한 미친놈이다.’

“왜 그래요?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요.”

서시희가 우려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고병갑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그래요.”

천도산의 칼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운다. 한 개비만 피우자는 게 줄담배로 이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념이 깊어진다는 의미다.

‘골치 아프네.’

고병갑은 자신이 책임감을 느끼는 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느 쪽으로 결론짓던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담배 연기처럼 뿌옇게 변했다.

결국 생각을 매듭짓지 못하고 통나무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얘기가 시작됐다. 서시희가 서두를 트자마자 고병갑은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즉각 행동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 존재, 마드무트가 말하길 천상계를 만들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하다고 해요.”

“제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을 거예요. 네, 제물이라는 건 인류를 말하는 거예요. 알파, 지도를 좀 가져다주렴.”

“네, 마스터.”

모닥불을 쬐던 알파가 빠릿빠릿하게 지도를 대령했다. 서시희는 세계 전도를 테이블에 펼쳤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몇 군데를 짚었다.

“중국, 인도, 그리고 미국. 이 세 군데가 제단으로 선정된 곳이에요.”

“…젠장, 하나같이 인구가 미어터지는 곳이구먼.”

“맞아요. 최근 아르헨티나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 사건, 알고 계시겠죠.”

“물론 알고 있어. 보통 난리가 아니던데.”

“미국에서 남미계 난민을 무분별하게 수용하고 있어요. 작년에 아프리카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대외적으로는 난민 구제를 표방하지만―”

“그 실상은 제물로 쓸 사람을 모으는 거다?”

“그렇게 추론하는 게 합리적이겠죠. 인류 종말을 조장하는 세력이 미국 수뇌부까지 침투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요.”

고병갑은 입술을 질근질근 씹다가 번뜩 질문했다.

“이, 이봐! 한국에서도 지금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고 있잖아. 이건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서시희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정확한 내막은 몰라요. 한국인들을 중국이나 미국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자연 현상일 수도 있겠죠.”

“자연 현상?”

“몬스터는 딥 임팩트 이래 균열 밖으로 나온 적이 없어요. 하지만 작년에 갑작스레 튀어나왔죠. 그건 말이죠… 기현상 같은 게 아니에요.”

그녀는 굳은 얼굴로 읊조렸다.

“이미 이 세계가 몬스터들이 살기 적합한 환경으로 탈바꿈되었다는 방증이에요.”

“가… 갑자기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야?”

“갑자기가 아녜요. 지난 20여 년간 인류는 마석 발전소를 가동했죠. 마석 발전소가 지구의 환경을 그렇게 바꾼 거예요.”

고병갑은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발전소를 박살 내고 다녔던 건가?”

“맞아요, 이젠 의미 없는 일이 돼 버렸지만요.”

그녀가 슬픈 어조로 덧붙였다.

“수십 개의 구멍 중 하나를 틀어막는다고 새던 물이 차오르진 않더군요. 좀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너무 늦어 버렸어요.”

“허…….”

고병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담배를 꼬나물고 싶었으나 애들이 있으니 참기로 했다.

서시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네요. 마드무트는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며 우리에게 제안했어요. 자신에게 협력하면 천상계에 데리고 가 주겠다고요.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있던 증오감을 일깨웠죠. 우릴 배신한 자들에 대한 증오감을요.”

“…….”

“최후의 18인 전원이 그의 계획에 동조했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우리는 배신감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당신도 말이야?”

“그럼요, 나 역시 약아 빠진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려 했어요. 당신이었으면 안 그랬을 것 같나요? 인류의 명운을 위해 죽자 살자 싸웠는데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니, 뭐… 그야 그랬겠지.”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고말고.

그도 그럴 게, 그가 신뢰하던 부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그렇지만 고병갑은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서시희는 분명 인류를 구하려는 입장인 것 같은데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잖은가?

서시희는 곧장 이어 말했다.

“마드무트는 우리를 과거로 보내 줬어요. 그때 내게 그 일이 일어났고, 내 사상도 바뀌었죠.”

“그 일?”

“난 시공의 틈에서 이것과 만났어요.”

서시희가 눈을 감았다.

감겼던 눈이 뜨였을 때 그녀의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짐승의 울음이 새어 나왔다.

“크르르르…….”

‘음!?’

고병갑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의 존재감이 180도 달라졌다.

너무도 사납고 날카로운 존재감. 그야말로 포악한 맹수 같은 기세였다. 고병갑은 자기도 모르게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병갑이 기가 차서 물었다.

“바… 방금 그건 뭐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예요. 당신이 얼마 전에 본 내 다른 모습의 주인이기도 하고요.”

서시희는 호흡을 고르고 말했다.

“이것의 이름은 드래곤. 아주 먼 옛날 이 대륙에서 살았던 생물이에요. 동시에 마드무트에 의해 말살당한 종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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