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08화 (108/151)

108 세계의 진실

왜 하필 지리산 중턱일까?

고병갑은 산을 오르며 같은 의문에 예순 번 정도 시달렸다. 한마디로 짜증이 났단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댓바람부터 산을 타는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잖은가? 산세가 보통 험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한 번 와본 곳인지라 헤맬 걱정은 없었다. 그의 길눈이 꽤 좋기도 했고 말이다.

“휴우. 좀 쉬었다 가자.”

그는 돌부리에 걸터앉아 숨을 골라냈다. 얼추 80%쯤 온 듯했다. 20~30분만 더 가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으리라.

흡연 욕구가 강렬했으나 산에서 담배를 피울 순 없으니 물만 연신 들이켰다.

“……음?”

고병갑은 인근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보이는 거라곤 수두룩한 활엽수뿐이었으나 그 너머로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졌다.

“멧돼지? ……아니. 야생동물 정도가 아니야.”

그가 긴장하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리 위협적인 기척은 아니다만 일개 맹수의 존재감치고는 위협적이었다.

헌터일까? 어쩌면 김하나나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애들일 수도 있으리라.

여러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노라니 기척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병갑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혼 가브리?” “히이이잉!”

말 형상의 괴수, 혼 가브리가 네 갈래 입을 쩍 벌리며 돌진했다.

놈의 입가가 붉고 축축하다. 포식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몬스터가 왜 여기 있나? 그런 의문은 일단 뒷전으로 미루었다. 그는 유연하게 움직이며 검을 그었다.

“히이잉―끍!”

혼 가브리의 목이 두부마냥 썰려 나갔다. D급 몬스터 하나 도륙 내는 일이야 코 푸는 것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고병갑은 칼을 털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 근방에선 더는 위협적인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제기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곳은 북한 쪽이라고 했잖아. 왜 한참 아래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온 거야?”

경우의 수는 두 개였다.

이북의 몬스터가 포위망을 뚫고 이곳까지 왔거나, 이 일대에서 별개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거나.

둘 중 뭐가 됐건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가 걸음을 서둘렀다.

속도를 높였더니 머지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김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고병갑은 차분하게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렇게 5분, 10분, 30분, 1시간이 지나갔다.

“야아아아! 나 왔다! 나 왔다고!”

챙겨온 김밥을 다 까먹었는데도 김하나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공에다 대고 꽥꽥 고함을 쳐본들 새들만 퍼드덕거렸다.

“이런 썅……. 왜 안 나타나는 거야?”

“소리친다고 나오면 내가 집 지키는 개게요?”

그때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망토로 몸을 가린 김하나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고병갑이 약간은 짜증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젠장.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나라고 앉아 노는 줄 안다면 오산이에요. 그것보다 하신다는 일이 잘 풀린 모양이군요. 다시 이곳에 온 걸 보면.”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김하나가 코를 몇 번 킁킁거렸다.

“당신에게서 피 냄새가 나는군요. 혹시 싸우셨나요?”

“맞아. 제기랄. 여기에 몬스터가 있더군.”

“이 산에요?”

“어.”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병갑은 보이지 않는 뭔가를 응시하며 덧붙여 말했다.

“한동안 저쪽 세계 일로 정신이 없었거든. 그런데 지구로 돌아와 보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더군.”

“몬스터 웨이브를 말하는 거로군요.”

“그래. 당신은 그거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지? 그래서 내게 찾아오라고 한 거고.”

김하나는 대답 대신 저쪽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날 따라와요. 세계의 진실에 대해 알려줄 테니.”

* * *

탄식을 자아내는 만년설의 경관.

고병갑은 로드의 권능을 되찾은 이후 이곳의 지명을 알 수 있었다.

김하나의 집에서 얻은 석판. 그 석판 뒷면에 적힌 글귀에 따르면 이곳은 ‘천도산’이다.

대륙의 극북이며 머나먼 과거 드래곤이란 영물이 살았던 곳. 나약한 자들은 발조차 들일 수 없는 냉혹의 땅.

그 위대한 랜드리올마저 혀를 내두르며 하산했다고 할 정도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그러니 천도산 정상에 우두커니 지어진 통나무집은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 김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물어볼 게 있다고? 말해봐. 내가 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줄 테니까.”

고병갑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련히 ‘고블린 로드’에 관해서 물어오리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조금은 엉뚱했다.

“병갑 씨. 만약 당신이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신이 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뭐…… 그야 당연히 좋겠지.”

“신이 되는 일에 흥미가 있나 보군요?”

“아니. 별로 흥미는 없는데 다들 한 번씩 상상하곤 하잖아? 전지전능해지는 상상을.”

고병갑도 그런 상상을 숱하게 했다. 돈과 걱정에 치여 살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망상에 빠졌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만약 수십억 인간을 희생시켜 당신이 진짜 전지전능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시겠나요?”

“아니.”

고병갑은 별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김하나는 여전히 진지한 투로 말했다.

“왜죠?”

“구태여 그런 거창할 걸 추구할 필요가 없으니까. 글쎄. 몇 년 전의 나였다면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전지전능? 나는 적당히 많은 돈과 안정만 있으면 돼. 더구나 수십억 인류의 희생이라니. 어지간히 통 큰 미친놈이 아니고야 할 수 없는 발상이지.”

그는 잠시 뜸 들이다가 덧붙였다.

“뭐…… 신의 권위에 도전했던 사내의 말로를 알기도 하고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죠?” “아냐. 방금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나저나 듣자 하니 작금의 사태가 신이란 놈과 연관돼있는 모양이지?”

“역시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시겠죠.”

“아니. 나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거든.”

“예상을… 했다고요?”

예상할 수밖에.

고병갑은 진즉부터 지구와 아스빌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지하고 있었다.

얼마 전 치토산의 성주 쿤타에게 옛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론 거의 확신하는 상태였다. 29년 전 딥 임팩트의 배후에 마드무트가 있음을.

“알다시피 나도 마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야. 이것저것 벌이고 다닌 것도 많고.”

“하긴. 그렇네요.”

“그만 끌고 슬슬 말해주지 그래? 세계의 진실이란 게 뭔지.”

“그러도록 하죠. 믿기 힘든 이야기일 거예요. 하지만 내 말엔 한 점의 거짓도 없어요. 모두 믿어주길 바라요.”

“인제 와서 못 믿을 일도 없지. 화성인이 실존한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어.”

농담으로 건넨 말이나 김하나는 피식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고병갑은 괜히 무안해서 입맛을 다셨다.

그녀가 차로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마침내 서두를 텄다.

“나는 김하나가 아녜요. 내 진짜 이름은 서시희죠.”

“서… 시희? 내가 알고 있는 그 서시희?”

“그래요. 그리고 나는 회귀자예요. 이 세상엔 나 말고도 17명의 회귀자가 더 있죠. 이 이야기는 내가 회귀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돼요.”

김하나.

아니, 서시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예고했던 대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 * *

-인류는 죽어가는 중이었어요. 파멸이란 불구덩이를 향해 뛰어가는 꼴이었죠.

2029년. 지구엔 더이상 균열이 발생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시작됐던 딥 임팩트가 느닷없이 끝나버린 것이다.

인류는 이미 삶의 많은 부분을 ‘마석’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딥 임팩트의 갑작스러운 종결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당시까지는 괜찮았다. 미공략 균열은 여전히 많았으니 당장 에너지원이 고갈될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무한할 줄 알았던 자원이 갑작스레 유한해지자 인류는 다급해졌다. 여러 강대국은 더 많은 균열을 확보하기 위해 분쟁을 벌였다.

처음에는 대화와 협상이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보다 무력이 앞서게 됐다. 국경과 임자 없는 땅으로 군사가 몰려들었다.

2033년. 기어코 중국과 미국이 남극 균열의 소유권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끝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과 3차 세계대전의 차이점은 단지 무기가 좋아진 것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에 헌터가 투입됐어요. 쏟아지는 공습에 헌터들이 가루가 되기도 했고, 한 명의 헌터가 1개 사단을 통째로 없애버리기도 했죠. 분명한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거예요.

서시희는 인류가 광기에 젖었다고 표현했다.

그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듯이 싸웠다. 전쟁에서 이긴 후에는 뭐가 남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파괴를 자행했다.

1년, 2년, 3년…….

시간은 묵묵히 흘렀고 전쟁은 무려 5년이나 이어졌다. 적지 않은 약소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그 일이 벌어졌다.

-최초의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죠. 그런데…… 균열에서 나온 것은 몬스터가 아니었어요.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죠.

2038년의 끝자락. 중국 대륙에 그들이 강림했다.

그들은 여태껏 상대해온 몬스터와 달랐다. 창과 갑옷으로 무장한 수십만 정예 군세였다.

그들은 중국의 모든 인간을 단 사흘 만에 쓸어버렸다. 미국도 어쩌지 못한 중국을 닷새도 안 돼서 멸망시켜버린 것이다.

특히 그 군세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손짓 한 번에 지진을 일으키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태산만 한 벼락을 떨어뜨렸다.

또한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역장을 발산해 모든 원거리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야말로 ‘신’이었다.

이 무렵, 뜨겁던 전쟁이 잠시 휴전상태를 맞이했다.

-이제껏 맞이하지 못한 강적에 인류는 위협을 느꼈어요. 자원이고 뭐고 그런 건 한순간에 의미가 없어졌죠. 그야말로 인류의 사활이 걸린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각국은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공공의 적에게 우선 대항하자고 협약을 맺었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치고받던 인류가 연합군을 구성했다.

그 결과 3만 7천여 명으로 이루어진 최정예 헌터 군단이 만들어졌다.

헌터 군단의 선봉을 이끈 것은 42명의 SS급 헌터였다.

서시희도 그 안에 있었다.

인류 대표로 꼽힌 헌터들은 정말 처절하게 싸웠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잠을 잘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거고, 밥을 먹는 건 사치 중의 사치였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밤이든 낮이든 정신없이 적과 싸웠다. 인류의 사활을 건 전면전은 무려 9개월간 이어졌다.

3만 7천여 명이었던 헌터 군단은 막바지에 천몇백 명까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무렵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는 끝내 승리했어요. 인류의 승리였죠. ……하지만 정작 피 흘린 자들은 축배를 들 수 없었어요. 우리는 배신당했죠.

헌터들은 끝내 적장을 쓰러뜨렸다. 사자와 개미의 싸움에서 기적처럼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3만 7천여 명 중 살아남은 것은 고작 열여덟 명이었다. 서시희를 비롯한 SS급 헌터 18명. 오직 그들만이 마지막까지 땅을 딛고 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안락한 휴식이나 죽은 자들을 기리는 추모식이 아니었다.

하늘을 까마득히 수놓은 미사일과 핵무기였다.

미지의 역장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인류 연합군이 원산폭격을 쏟아부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고병갑은 도저히 되묻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당신네가 승리했는데 왜 거기다가 폭격을 쏟아붓냐는 말이야?”

“두려웠던 것이겠죠.”

“두렵다니 뭐가?”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미지의 존재를 각성자들이 끝내 잡아냈으니까요. 그 순간 우리는 더는 인간이 아닌 게 돼버린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우리 역시 그것들과 똑같은 괴물로 보였던 거겠죠. 섬멸해야 하는 괴물.”

수천 발의 미사일이 땅에 꽂혔다.

핵무기는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며 하늘 아래 모든 것을 휩쓸었다.

아무리 SS급 헌터라도 그 무자비한 폭격 앞에선 버틸 수 없었다.

인류를 수호한 대가로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최후의 18인은 절망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적장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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