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제자리를 찾다
메리린이 허물어졌다. 갈라진 허리에선 끔찍한 것들이 마구 쏟아졌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끈질긴 생명력 덕에 숨은 간당간당 붙어 있었다.
「도… 란…….」
뻐끔거리는 입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리린은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도란을 보려 애썼다. 눈꼬리를 타고 피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미… 안……. 나… 나를…… 용서…….」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녀는 강을 건넜다.
도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애증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주검을 지나쳐 고병갑에게 달려왔다.
「로드! 괜찮아요?」
고병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불편했다. 메리린을 처단할 심산이긴 했으나 그 일에 도란의 손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메리린과 도란은 먼 과거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였다.
고병갑은 버벅거리는 무릎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로드 무리하지 마세요. 다 끝났어요.」
「아니. 랜드리올을 끝장내야 해. 놈은 아직 살아있어.」
랜드리올은 반쯤 송장 신세였다. 허나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놈의 심장이 멎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제, 제가 할게요.」
「아니 내가 한다. 더는 네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어.」
그가 랜드리올에게 다가갔다. 사라온 여인들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칼끝이 애처롭게 떨린다. 몇 명은 보호하듯 배를 가렸다.
「너희는 고블린이냐 사라온이냐. 잘 고민하고 답해라. 뱃속의 생명은 죄가 없으니.」
「우린 오직 제왕만을 섬긴다!」
「네놈 변절자들과 동일시하지 마라! 우린 고귀한 사라온이다!」
「대단한 충성심이로군.」
그는 13명의 사라온 여인에게 손수 안식을 선사해주었다.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한 명 한 명 베어 넘길 때마다 욕지기가 치솟았다.
그래도 해야 했다. 후환을 남겨둘 수는 없으니.
자신의 피와 남의 피로 피칠갑한 고병갑. 그가 랜드리올의 머리맡에 서서 아래를 응시했다.
랜드리올. 한때 지상의 신이라 불렸던 사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눈빛으로 컴컴한 하늘을 올려보았다.
고병갑의 검으로 내력이 모여들었다.
그때 랜드리올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나는 남들보다 오랜 세월을 살며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 대륙 네 방위의 끝을 찍어보기도 했고, 여러 아인의 틈새에 끼어 그들 문화에 흠뻑 취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무려 신성군과 전쟁까지 벌였다. 선봉장으로 신성전사 넷의 목을 베어냈지. 나는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수십만의 밤을 보냈고, 각기 다른 수십만의 하늘을 보았노라.」
랜드리올이 시선을 옮겨 고병갑을 보았다.
「한데 오늘처럼 허무한 날은 없었느니라. 저 하늘을 보라. 구름 한 점 없고, 달빛도 없거늘 어째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잖느냐. 저 시커멓기만 한 우주가 지금 내 마음과 같다. 이상하다. 상실감과 허탈함은 뼈저리게 느꼈을진대 이리도 새롭다니.」
「……뒤질 때가 되니 별소릴 다 지껄이는군.」
「흐흐…… 그런지도 모르지. 참으로 기나긴 생이었다. 종장을 펼치고야 그곳에 적힌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는 참으로 어리석도다. 마드무트가 나를 오만하다고 한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하구나.」
랜드리올의 입에서 꿀렁이며 피가 흘렀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좀 잠겼다.
「나는 태양이었다. 낮을 밝힐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별을 품을 수는 없었던 게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나를 보고 과거의 망령으로 남았어야 했다고 말했던가? 맞는 말이로다. 나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났어야 했다. 세상 모든 일이 희극일 수는 없는 게야. 그걸 애써 부정한 말로가 다시금 비극이라니. 이거야말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각본이 아니던가!」
랜드리올이 킥킥거렸다. 고병갑은 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랜드리올은 저항하려고 하지도,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제 고병갑이 힘만 주면 과거의 영광은 죽는다.
「있어 보아라. 나의 죽음을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제 와서 목숨이라도 구걸할 셈이냐?」
「흐하하하! 구걸이라니! 본좌는 대륙의 정복자이자 희대의 탐험가, 제왕 랜드리올이다! 신성군에게 열두 충신을 잃었을 때도 그들에게 자비를 바란 적이 없다!」
「허면, 지금 네 꼴에 죽음을 미룰 이유가 뭐지?」
「빛을 잃은 태양은 암흑만 내뿜을뿐더러 하늘의 한 부분을 꿰찬들 추할 뿐이지. 하지만 새로 뜰 태양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랜드리올이 걸레짝이 된 팔을 꿈틀거렸다.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목을 갈라버리려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그가 손을 자기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손이라고 부르기도 처참한 것에 빚 응어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로드의 정수였다.
랜드리올은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도 꾸역꾸역 정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마치 봄 감자가 맛있다는 점순이처럼 그것을 내밀었다.
「나의 영광도 그리고 절망도 결국 한 줌 주먹에 쥐어지는구나. 이것을 네게 주마.」
「필요 없다. 네놈에게서 나온 것을 내게 들이고 싶지 않아.」
「깐깐히 굴지 마라. 이것은 네 승리에 대한 전리품이다. 기쁜 마음으로 취하라. 분명 도움이 될지니.」
「…….」
빛 응어리가 서서히 떠올라 고병갑에게 다가왔다. 고병갑은 끝내 그것을 받아들였다.
꺼림칙함보다 호기심과 기대감이 컸다.
랜드리올의 정수를 취하자마자 급진적인 변화가 시작됐다. 방대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
‘이건?’
그건 랜드리올의 생애였다. 탄생에서 현시점에 이르는 모든 순간이 정수에 담겨 있었다.
고병갑은 자신의 머릿속에 거대한 도서관이 하나 생겼다는 감상을 받았다.
「이제 어서 나를 죽여라. 내가 스스로 죽어버리기 전에.」
랜드리올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듯했다.
고병갑은 검을 고쳐잡고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너는 죽어서도 편치는 못할 것이다.」
「거, 죽기 전에 듣기 좋은 말이로고.」
칼날이 반듯한 궤적을 그렸다.
제8대 로드이자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자, 제왕 랜드리올의 생은 이날 완전한 종지부를 찍었다.
* * *
「저를 죽여주십시오!」
도르마가 엎드려 목을 내보였다.
고병갑은 퍼질러 앉은 채 담배만 연거푸 피우다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왜?」
「저는 한 번 로드를 배신했습니다. 인제 와서 구차히 변명하거나 몰염치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베어 넘기시고 조금이라도 노여움을 푸십시오.」
「네 목을 베서 노여움을 푼다라…….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네. 아이고 다리야.」
고병갑이 몸을 일으켜 도르마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고블린들의 얼굴에 짙은 걱정이 깔렸다.
로드가 정말로 도르마를 죽일까 걱정되는 것이다.
고병갑이 도르마의 목에 검을 대며 말했다.
「그래.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부디 아스빌람을 다시 세우시고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려주십시오.」
「오냐. 그렇게 하마.」
고병갑이 검을 내리쳤다. 몇몇 고블린은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허나 선혈이 낭자한 끔찍한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다. 그가 휘두른 검은 그냥 땅바닥에 박혔다.
도르마가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고병갑을 올려보았다.
「로드시여……?」
「내가 너를 죽이면 기분이 막 좋아져서 춤이라도 출 줄 알았냐? 네가 나를 그런 무지막지한 놈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그, 그치만 저는―!」
「됐다. 사자무리가 더 강한 우두머리를 좇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이제 구질구질한 과거 얘기는 관두자. 무엇보다 나는 아직 네가 필요해.」
「흑! 흐윽…….」
도르마가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고병갑이 사위를 훑었다. 이 자리엔 처참한 전투의 흔적이 만연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너무 많은 것들이 흐트러졌다. 이제 자신이 제 자리를 찾았으니 아스빌람의 모습도 제 자리를 찾아갈 때다.
고병갑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솜니움도 발타드렌도, 너희도 그리고 나도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모두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 맞냐 틀리냐!」
「맞습니다!」
「앞으로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거다. 그러니 각오 단단히 해. 하기 싫은 놈은 지금 말하고!」
「없습니다!」
「그래. 돌아가는 거다. 제자리로.」
폭풍의 후에.
고병갑과 고블린들은 아스빌람 복구를 위해 밤낮없이 몸을 굴렸다. 덕분에 아스빌람은 빠르게 예전 모습을 되찾아갔다.
고병갑이 자리를 비웠던 2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아스빌람은 참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개중엔 나쁜 면도 있었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비약적인 농경지 확대 같은 것들이 그랬다.
‘랜드리올 자식. 일 벌이는 거 하나는 화끈하게 했네.’
밭의 평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심지어 꽤 잘 가꾸어져 있기까지 했다.
그가 만들어낸 농기구와 무기는 모두 일등품이었다. 고블린들의 전투 능력 역시 단시간 안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상태였다.
인정하긴 싫지만, 영지를 발전시키고 군사를 꾸리는 방면에서는 랜드리올이 자신보다 나았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다 이건가.’
고병갑은 랜드리올이 주고 간 경험과 지식, 그리고 요령을 십분 활용키로 했다. 이왕 받은 거 썩혀둘 이유가 없다.
성을 재정비하는 참에 농경지와 축사도 크게 확장했다. 또한 발타드렌과 이어지도록 하여 새로이 성벽을 세웠다.
「로드시여. 이곳에 성벽은 왜 세우시는 겁니까?」
「치토산에 있는 정령들을 이리로 불러들일 거야. 여긴 걔들 보금자리고.」
「아!」
정령들의 이주 계획도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로 정령들을 데리고 올 생각이었다. 농경지와 축사를 확대한 만큼 일손이 부족해졌으니 팔백 정령의 노동력이 절실했다.
‘정신이 없구먼.’
아스빌람의 정사를 돌보는 것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했다. 애석하게도 지구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고병갑의 어머니는 퇴원 절차를 밟았다. 한 달여간 이런저런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환마병의 재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고병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실 수 있었다.
정선경에겐 이래저래 고마운 일이 많았다. 그래서 정말 근사하게 대접할 생각이었다. 허나 지리산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 고병갑은 단 한 차례도 정선경을 만나볼 수 없었다.
그녀가 이북 지역으로 파견을 나갔기 때문이다.
‘또 몬스터 웨이브라니.’
아스빌람에 가 있는 동안 꽤 무지막지한 일이 벌어졌다.
원정단이 나가 있는 휴전선 이북 지역에서 대규모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것이다.
현재 군대와 헌터가 몬스터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 지역에 집결한 상태였다.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지역이 이북 지역으로 국한돼있었기에 재산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공기는 삼엄하게 얼어붙었다.
난리가 난 곳은 대한민국뿐만이 아니었다.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그곳에선 한국과 비교도 안 될 초대규모의 몬스터 웨이브가 벌어졌다.
그곳은 이미 국제적으로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다. 또한 많은 전문가가 남아메리카 대륙이 아프리카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견했다. 한마디로 대륙 전체가 불모지가 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분위기가 특히나 싸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다음은 한국일 거라는 불안감이 사회에 만연했다.
고병갑 입장에선 워낙 황당한 소식이라 쉽게 와닿지 않았다.
허나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한다는 강렬한 예감은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시 지리산을 찾았다.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겠다는 김하나를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