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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104화 (104/151)

104화

정적.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정적이다.

에올라와 도란의 싸움을 뜯어말려야 할지, 아니면 동굴로 들어가 작업해야 할지 고민하던 고블린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란은 입을 헤 벌린 채 위를 응시했다. 에올라는 다만 오만상을 찌푸렸다.

「인간? 어떻게?」

“묻잖아. 왜 애를 잡고 지랄이냐고.”

「뭐라는 거냐? 꼭 짐승 울음소리 같구나.」

에올라는 붙잡힌 검집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엄청난 힘이다. 그녀가 긴장했다.

「언제부터……. 아니 의미 없겠군. 경계를 이따위로 하다니.」

「로드!」

「로드시여!」

도란과 고붕이가 동시에 외쳤다.

‘로드시여.’ 그 말만큼은 권능을 잃은 고병갑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말이 아니던가.

로드라는 말은 들은 에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황급히 검집을 놓고 몸을 뺐다. 그 뒤 바닥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로드라고? 설마 네놈이 제왕 이전에 이곳을 관리했다던 인간이냐? 죽었다고 들었는데?」

“칼 거둬라.”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면서 같은 의미를 담은 몸짓을 취했다.

에올라는 그 뜻을 알아먹었다. 하지만 검을 놓긴커녕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말을 늘어놓았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모르겠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제왕께선 이르시길 사라온을 제외한 모든 아인은 이 땅에 발붙일 자격이 없다고 하셨다. 하여 나는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네놈을 단죄하겠다.」

에올라가 눈동자를 굴렸다. 하필 부하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현재 다른 곳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성벽에 3명이나 보냈는데 그 감시망을 어떻게 뚫고 온 거람?

‘저 사내 강하다. 나 혼자 대적할 수 없어.’

그녀는 짧게 고민한 후 별안간 소리쳤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협공해서 저놈을 치는 거다!」

앙칼진 고함이 낭랑히 울렸다.

고블린들은 그녀의 명령을 받들어 즉시 전투태세를 취하긴 개뿔.

「뭐, 뭣들 하는 거냐! 뭘 병신처럼 서 있는 게야!」

「…….」

「저 인간을 둘러싸라! 곡괭이라도 쥐란 말이다!」

「…….」

「이, 이것들이 그래도!」

“도란. 고붕아. 오랜만이다. 그런데 너희 왜 얼굴이 반쪽이 됐냐?”

고병갑은 손을 흔들며 장난스레 말했다. 도란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빈틈!’

에올라는 당황하는 와중에도 고병갑의 빈틈을 노렸다.

그녀가 벼락처럼 달려들었다. 무방비하게 팔이나 흐느적거리고 있는 고병갑에게 날카로운 베기를 선사…….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

-쩍!

「커헑!」

그의 팔은 보이지도 않았다. 에올라는 검집에 따귀를 얻어맞고 저만치 날아갔다.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으으…… 윽.」

에올라가 돌 맞은 개구리처럼 푹 퍼졌다.

「로드! 흐아앙!」

도란이 달려오더니 고병갑에게 덥석 안겼다. 얼굴에는 서러움이 잔뜩 껴있었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

반면 다른 고블린들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그들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남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생긴 건 분명 로드인데 로드가 아니다. 머리와 심장이 보내는 각기 다른 메시지는 괴리감으로 작용해 그들을 혼란케 했다.

「로… 로드가 맞으십니까?」

고붕이가 간신히 말했다. 고병갑은 ‘로드’까지만 알아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게 이리도 불편할 줄이야.

그가 도란을 품에서 떼며 말했다.

“에아.”

「네?」

“에아. 에아 어딨어? 에아.”

「에아? 에아 말하는 거예요?」

“어어, 맞아, 에아. 에아 어딨어?”

「에아가 왜요?」

도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병갑은 손가락으로 허공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에아 여기로. 에아 데리고 와. 에아 좀 불러줘.”

「로드 왜 그러세요? 나 못 알아듣겠어요.」

“에! 아! 여기로! 에아! ……에라 썅. 돌겠네.”

그때 고붕이가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

「도란! 에아를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 같다.」

「아! 에아를 여기로? 에아 불러오라고요? 맞아요?」

도란이 고병갑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며 물었다. 고병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에아 여기로 데리고 와!”

「아, 알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도란이 퍼뜩 달려갔다. 고병갑은 담배를 입에 물며 한숨 쉬었다.

“에휴. 부탁 한 번 하기 더럽게 힘드네.”

그가 고블린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고병갑을 살폈다. 가까이 오려고 하지도, 그렇다고 더 멀어지려 하지도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왔을 텐데. 고병갑이 쓰게 웃었다. 그가 손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어이 고붕! 이리 와봐.”

「어어…….」

“와보라고 짜식아.”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의중은 통했다. 고붕이가 주뼛거리며 다가갔다. 녀석에게서 경계의 기색이 느껴졌다. 마치 겁먹은 강아지처럼.

고병갑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붕이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었다. 녀석은 조금 움츠러들었으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도란이 에아를 등에 업고 돌아왔다.

에아는 고병갑을 발견하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바닥에 내려온 뒤에는 손을 덥석 잡고 반가워했다.

그녀는 한동안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냈다. 물론 고병갑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적당할 때 말을 끊었다.

“에아.”

「아, 네네!」

“나. 말. 아아아. 어어어. 말하는 거. 네 도움 필요해.”

「……네? 뭐라고요? 당신 왜 그래요?」

「에아. 로드께서 우리 말을 못 하시는 것 같아.」

「말을 못 한다고요?」

그녀가 끙 앓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아! 그래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군요?」

고병갑은 온갖 동작을 취하며 의미가 전달하려 노력했다. 한순간 에아가 고병갑의 양팔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도와줄게요. 다행히 나는 이런 부분에 쓸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죠. 수명은 좀 깎이겠지만……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요.」

에아의 몸이 은은하게 발광했다. 그 빛은 서서히 고병갑으로 옮겨갔다. 의식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발광하던 두 사람이 제 빛깔을 되찾고, 에아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즈음 고병갑은 꽉 막혔던 귀가 트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얼른 에아를 부축했다.

「에헤헤…… 이젠 내 말을 알아듣겠나요?」

고병갑이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 잘 들린다. 고마워 에아.」

「헤헤. 별말씀을.」

「어, 어떻게 한 거야?」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렸어요. 그리 대단한 법칙은 아닌데 그래도 힘이 좀 빠지네요. 나를 좀 놔줄래요? 눕고 싶어요.」

고병갑은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는 몸을 일으킨 뒤 고블린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전했다. 선을 그어두고 그 안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두런두런 모여앉아 밀린 잡담을 떠들고 싶기도 했고, 시급한 사안에 대해 회의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고병갑은 그 모든 감정을 함축해 말했다.

「너희는 내가 뭐로 보이냐? 너희도 더는 내가 로드로 보이지 않는 거냐?」

「…….」

「고붕아.」

「아, 예옙!」

「너는 어때? 내가 무서우냐? 내가 적처럼 느껴져?」

「그, 그게…….」

「야 이 바보 천치들아!」

도란이 버럭 고함치더니 한 발짝 나섰다.

「뭘 웅얼거리는 거야! 로드잖아! 우리 로드라고! 멍청한 바보들이라서 그새 까먹은 거냐고!」

「도란. 너는 내가 로드로 보이냐?」

「당연하죠!」

그녀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더이상 로드의 정수가 없는데도?」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로드가 예전의 로드 같지 않긴 해요.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다고요. 나는 그냥 병갑 로드가 좋은 거니까!」

고병갑은 희미하게 웃으며 도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블린 무리로 다가갔다.

녀석들은 아주 미세하게 뒷걸음질 쳤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한 켠에 쌓인 감자 한 덩이를 집어 들었다. 그가 처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런 거나 먹고 있었던 거냐. 너희도 참 기구…….」

「이 배신자들! 움직이지 마!」

「께에엑!」

그때였다. 난데없이 고함이 들려왔다. 다들 놀라 소리 난 곳을 보았다. 기절한 줄 알았던 에올라가 한 쪼꼬미의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볼기짝이 파랗게 부어오른 꼴이 우스워서 고병갑은 좀 웃었다.

「감히… 감히 제왕께 권한을 이임 받은 내 명령을 불복해? 이것은 곧 제왕에 대한 반역이다! 이 일을 제왕께 고하면 네놈들은 싹 죽은 목숨이야!」

그녀가 악에 받쳐 으르렁거렸다. 고블린들이 두려움에 어깨를 떨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저 인간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이번 일만큼은 내가 눈감고 넘어가 주마.」

「아, 아아…….」

「뭘 망설이는 거냐! 냉큼 죽이래도!」

고병갑의 눈빛이 차갑다. 그가 날카롭게 벼른 살기를 에올라에게 쏘아 보냈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질렸다.

그러나 단순히 겁을 준 것만으로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악바리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고병갑은 한숨을 쉬며 읊조렸다.

「고블린은 좀 어리석을지언정 동족을 끔찍이 아낀다. 나는 그런 모습이 좋았지. 한데…… 네년은 지금 동족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하는구나. 아니면 동족이라고 생각지도 않는 것이냐?」

「닥쳐라! 더러운 인간 따위가 뭘 안다고!」

「얘들아. 나를 공격해라.」

그가 말했다. 고블린들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고들이 뜸을 들이자 고병갑은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뭘 병신들처럼 주뼛거려? 나를 공격하래도!」

「아, 아니 로드시여…….」

「야. 고붕이.」

「예…….」

「와서 나를 공격해라. 물든 찌르든 할퀴든 마음대로 해. 어서!」

고붕이는 거의 울려고 했다. 녀석이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고병갑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입을 가져대 댔다.

「흐으윽. 흐윽……. 죄송합니다.」

고붕이가 입을 앙다물었다. 찌릿한 고통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고병갑은 이어서 몇몇 고블린을 지목해 자신을 공격하게 했다. 지목당한 녀석들도 거의 울며 고병갑을 공격했다.

그의 몸 곳곳에 상처가 새겨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흐헝헝! 못하겠습니다. 못하겠습니다, 로드시여!」

「제발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로드시여!」

고블린들이 울며 떨어졌다. 고병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고생들 했다. 이제 잘 봐둬라.」

「저, 저것들이! 떨어지지 마! 계속 공격해! 죽여버리라고!」

「수틀리면 동족 모가지에 칼 들이미는 게 네놈들 사라온의 본성이라면.」

「다가오지―꺅!」

눈 깜짝할 사이.

아니. 그것의 반의반도 안 되는 짧은 틈에 일이 벌어졌다.

고병갑이 손에 들린 감자를 던졌다. 그것은 에올라의 눈을 정확히 때려 맞추었다.

에올라가 벌러덩 자빠졌다. 그녀가 눈을 비비며 일어서기도 전에 고병갑이 목을 잡아버렸다. 그녀가 겁에 질려 버둥거렸다.

「케… 케켉!」

「그런 거라면 나는 저 아이들이 사라온으로 변하게 두지 않겠다.」

「커컭…… 무, 무슨 헛소릴…….」

「모두 들어라!」

그가 외쳤다. 세상이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너희는 동족을 개밥쯤으로 여기고, 로드 등에 칼을 꽂는 사라온이냐 아니면 우애 깊은 고블린이냐!」

「고블린이요! 나는 고블린이에요!」

도란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녀가 서두를 트자 다른 고블린들도 동조했다.

「고블린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고블린입니다!」

「나는 고블린이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는 사라온의 왕을 따르겠는가 고블린의 왕을 따르겠는가!」

「고블린의 왕을 따르겠습니다!」

「로드를 따르겠습니다!」

「좋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고블린의 왕이다. 누구 이의 있는 놈 있냐!」

「없습니다!!!」

고블린들의 함성에 바위산이 떠나갈 듯했다.

잠시 후 고블린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의 가슴에서 작은 빛 덩이가 뽑혀 나오더니 일제히 고병갑에게 스며들었다.

고병갑의 눈앞으로 익숙한 듯 새로운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고블린 로드가 되셨습니다.]

[고블린 로드의 숙명…… 숙… ㅅ@^&@[email protected]#^&!]

홀로그램이 지지직거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문자를 바꾸었다.

[선대 로드가 부여한 숙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멸망한 고블린 왕국 ‘아스빌람’이 개방되었습니다.]

[제왕으로서 만백성을 굽어살피십시오.]

「사… 살려…… 제발.」

에올라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고병갑의 모든 부분에서 일말의 자비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네년은 사라온이냐 고블린이냐.」

「나… 나는…….」

「미안하지만 내 아스빌람에 사라온이 디딜 땅은 없다.」

「켉!」

고병갑은 망설임 없이 에올라의 목을 분질렀다. 그녀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축 늘어졌다.

「이게 무슨 소란…….」

「헉!」

어수선함에 놀라 달려온 파트라와 나이아드가 앞의 광경을 보고 숨을 집어삼켰다. 두 여인은 이곳에 만연한 살기에 그만 질식할 뻔했다.

그때 고병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둘을 보았다.

「너희는 사라온이냐 고블린이냐?」

「뭐라고? 그, 그야 당연히 사라…….」

「죽여라.」

「케르륵!」

「캬아아악!」

「꺄악!」

이날 솜니움의 다섯 사라온은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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