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다시 제자리로
타칵! 타칵!
“에라이. 터보 라이터로 들고 오는 건데.”
고병갑은 라이터 불을 연초로 옮기려 안간힘 썼다. 그러나 매서운 칼바람이 그의 작은 소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는 십수 번의 시도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연거푸 담배 연기를 뿜으며 앞의 절경을 감상했다. 눈과 정신이 황홀해지는, 멋진 경치였다. 하나 동시에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경치이기도 했다.
“후우… 이런 데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곳은 만년설과 만년빙으로 둘러싸인 초대규모의 산맥이었다. 특히 그가 딛고 선 장소는 다른 곳보다 세 배 이상 높은 산의 정상이었다. 그래서 머리 하얀 산들이 발아래로 넓게 보였다.
휘이잉!
“스으읍.”
그가 두꺼운 외투를 단단히 여몄다. 이곳으로 넘어오자마자 김하나가 건네준 것이었다. 하지만 거의 전신을 가리다시피 했음에도 추운 건 여전했다. 아마 영하 30~40도는 가뿐히 넘기리라.
고병갑은 조용히 연초 한 개비를 다 태웠다. 머리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가 몸을 돌리고 통나무집을 향해 걸어갔다.
“아스빌람이 맞아.”
누구도 이곳이 아스빌람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고병갑은 공기 냄새만 맡아도, 하늘 색깔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아스빌람이라는 것을.
끼익.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섰다.
냉골인 바깥과 달리 실내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벽난로에 장작을 밀어 넣던 김하나가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생각은 좀 정리가 되셨나요.”
“어느 정도는.”
“문은 닫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찬바람을 싫어해서.”
고병갑은 순순히 문을 닫았다. 그 후 외투를 벗고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김하나는 화로에 얹힌 주전자를 들고 다가와선 차를 한 잔 따라 주었다.
그는 별 의심 없이 차를 들이켰다. 뒷맛이 씁쓸한 게 그다지 본인 취향은 아닌지라 한 입 먹고 말기는 했지만.
“애들은 왜 이렇게 안 오지? 나무를 패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김하나는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닌다. 셋 다 중학생이나 됐을 법한 핏덩이들인데 강함은 어지간한 S급 헌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고병갑은 그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게 은근히 거슬렸다. 반대로 김하나는 태연했다.
“때가 되면 오겠죠.”
그녀도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줄곧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흠.”
고병갑은 통나무집 내부를 천천히 둘렀다. 집 안을 채우고 있는 가구는 모두 현대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보였다. 당장 코앞의 테이블만 봐도 공산품의 냄새가 났다.
꽤 잘 꾸며 놓았구나, 같은 시답잖은 감상을 느낄 무렵. 다른 가구들과 분위기가 다른 장식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투박한 석판이었다. 닳아 없어진 가장자리에선 꽤 많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 석판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낀 고병갑이 그리로 다가갔다. 직후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이걸 어디서 났지?”
“근방에 파묻혀 있던 걸 가지고 온 거예요. 왜 그러죠?”
“…….”
‘지도다!’
그건 누가 뭐래도 지도였다. 그것도 꽤 정교하게 제작된 지도. 더구나 만듦새가 몹시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메리린의 몸에 새겨진 것과 99% 일치했다.
석판의 뒷면에는 글자 무더기가 오밀조밀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아쉽게도 그것까진 읽을 수 없었다.
‘로드의 권능이 있었다면 읽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지도에 집중했다. 풍화가 꽤 이루어지긴 했다만 주요한 몇 개 포인트는 알아먹을 수 있었다.
‘이곳은 역시 최북단이었어. 잠깐, 여기 이건 베르보니아인건가? 그럼 동쪽으로 타고 가다 보면… 있어! 발타드렌이야!’
지도에서 발타드렌을 발견하곤 쾌재를 부르짖었다. 그때 모르는 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김하나가 의문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옛 문명인들이 남긴 지도인 모양이에요. 하지만 찾아가 봤자 헛수고죠.”
“헛수고라고?”
“근처의 몇 군데를 가 봤어요. 하지만 모조리 폐허가 되었더군요.”
김하나는 그렇게 말하며 석판 몇 곳을 손으로 짚었다. 산맥과 인접한 성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가 본 게 언제지?”
“꽤 됐어요. 오륙 년쯤.”
‘오륙 년이라……. 내가 오기 한참 전이군.’
“최근에는 왜 안 나가 봤어?”
“전부 폐허라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봤다시피 이곳의 지형은 험난해요. 모험심 하나로 길을 나서기엔 위험부담이 크죠.”
“그렇긴 하더군.”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며 석판을 번쩍 들었다.
“이거, 내가 좀 가져가도 될까? 값은 원하는 대로 쳐줄게.”
“원한다면 가져가세요. 돈은 됐어요.”
고병갑은 횡재다 싶어 얼른 차에 가져가 실었다.
다시 돌아왔을 땐 김하나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도 그 옆에 앉아 서두를 텄다.
“나 말고 더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그래서 당신은 무슨 로드지?”
김하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차를 홀짝이다가 도리어 물었다.
“글쎄요, 그러는 병갑 씨야말로 무슨 로드죠?”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주는 거 없이 너무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는군요.”
내 정체를 알고 싶으면 네 정체부터 밝혀라.
김하나의 말뜻을 알아챈 고병갑은 쩝 입맛을 다셨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더 감출 게 어디 있겠어?
“난 고블린 로드다. 지금은 아니지만.”
“고블린?”
그녀의 눈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고병갑은 그 작은 변화를 눈치챘으나 모른 체했다.
“내가 아는 그 고블린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죠?”
“이것저것 할 수 있었지. 이쪽 세계와 지구를 넘나들기도 하고, 신묘한 기물을 얻기도 했어. 고블린들의 협조를 구할 수도 있고 말이야. 당신도 비슷하지 않나?”
“…글쎄요.”
김하나는 교묘하게 말을 흘리며 다른 것을 물었다.
“병갑 씨의 빠른 성장은 로드의 힘 덕분이군요.”
“부정하진 못하지.”
“아까 ‘지금은 아니다’라고 한 건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야. 지금은 로드의 힘을 잃었거든.”
“어째서요?”
“사고가 좀 있었지. 세세한 것까지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고병갑은 그렇게 말한 뒤 팔짱을 꼈다. 자신에 대해선 말할 만큼 했다는 뉘앙스였다.
“그래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은? 당신은 무슨 로드지?”
“나는…….”
그녀의 입술이 막 벌어졌을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가 창가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이 왔군요. 아이들이 당신을 보면 놀랄 수도 있으니 먼저 얘기를 해야겠어요.”
고병갑은 탐탁지 않았지만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석판까지 공짜로 주지 않았던가?
그녀는 외투를 걸친 뒤에 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고병갑은 목을 죽 빼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하늘인지 뭔지 모를 희뿌연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들. 김하나를 마스터라고 부르며 따랐더랬지. 그럼 혹시 인간이 아닌 건가?’
자신이 거느렸던 고블린처럼 김하나가 거느리는 ‘무언가’가 아닐까?
‘생긴 건 영락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의 정체를 유추하는 사이 김하나가 돌아왔다. 아이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패온 장작을 쌓고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으나 묵언 수행이라도 하듯 입을 다물었다. 뭔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얼마 뒤. 나무문을 열고 세 아이가 들어왔다.
치렁치렁한 금발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하나.
동자승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소년이 하나.
셋 중 그나마 머리가 굵어 보이는 소년이 다시 하나.
세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고병갑을 째려보았다. 지난번 영월에서의 앙금이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닥불로 몰려가더니 불을 쬐기 시작했다.
‘역시 인간인데.’
그가 턱을 쓰다듬으며 아이들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쩝 입맛을 다시며 김하나를 보았다.
“그만 뜸 들이고 슬슬 알려 주시지?”
“그러는 게 좋겠네요.”
김하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병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또박또박 말했다.
“난 고병갑 씨가 말하는 로드인지 뭔지가 아녜요. 실토하자면 그게 뭔지 감도 안 잡히는군요.”
* * *
갑자기 눈이 쏟아져 내렸다. 정말 미친 듯이 퍼부었다. 한 걸음 내디디면 무릎까지 파묻혔다.
“어딜 간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서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따라 나온 김하나가 옆에서 쫑알거렸다. 고병갑은 치솟는 짜증에 인상을 구겼다. 딱히 그녀 때문에 짜증이 난 건 아니었다.
‘제길, 이래서는 차를 타고 가는 게 아니라 끌고 가야겠는데? 어쨌든 눈이 더 쌓이기 전에 나서야 해.’
고병갑은 급한 대로 스노체인을 꺼내 체결했다.
“저기요, 내 말 듣고 있나요?”
“뭐라고 했지? 미안한데 난 지금 바빠.”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죠?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온통 눈 덮인 산뿐이란 말이에요. 거길 넘어도 있는 건 폐허뿐이고요.”
“폐허만 있는 것은 아니야.”
“…네?”
“남쪽으로 계속 가면 도시가 있어.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김하나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윽고 작게 탄식하며 덧붙였다.
“좋아요. 그렇다 치죠. 그래서 이 눈보라를 뚫고 남쪽으로 가겠다고요? 자살이 목적이라면 차라리 목을 매지 그래요?”
“…도와줄 생각 없으면 그냥 들어가지?”
기어코 마지막 바퀴까지 체인을 연결했다.
채비를 마친 그가 광활한 산맥을 내려보았다. 이실직고하자면 김하나 말마따나 무모했다. 저 냉혹의 지대를 헤치고 언제 따뜻한 땅에 닿을 수 있을까?
그래도 가야 했다. 아스빌람까지 와서 지레 겁먹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밀린 얘기는 나중에 와서 듣도록 하지.”
“글쎄요. 이대로 당신을 보내면 나는 시체랑 대화하게 될 것 같은데요.”
“부두술이라도 배워 두던가.”
고병갑은 무시하며 차에 올랐다. 하나 그새 차가 얼었는지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예열하며 기다리고 있노라니 김하나가 창문을 두들겼다.
“잠깐 내려봐요.”
“아, 글쎄, 나는 가야 한대도? 얘기는 나중에 듣겠다고 했잖아.”
“하아… 알겠으니까 일단 내려보라고요.”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차에서 내렸다.
김하나는 이마를 짚더니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이내 뭔가를 결심했는지 말했다.
“산맥이 끝나는 곳까진 데려다줄게요.”
“데려다주겠다니? 어떻게?”
그녀는 대답 대신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해진 원피스와 맨살이 드러났다.
저 여편네가 뭘 하는 거람?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이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뒤돌아 있으세요. 보지 말고 놀라지도 마세요.”
고병갑은 순순히 따랐다. 그러자 아이들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스터 설마?”
“하루 정도 걸릴 거란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렴.”
“마스터 안 돼요! 몸도 안 좋으시잖아요!”
금발 머리 소녀, 알파가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김하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괜찮아.”
“왜 저 남자 때문에…….”
“우리에겐 저 사람이 필요해.”
그녀가 그렇게 말한 순간, 고병갑은 가히 어마어마한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보지 말라는 경고에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김하나의 몸이 울긋불긋해지더니 변태를 시작한 것이다.
구우우!
변화는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 끝났다.
그리고 새로워진 그녀는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기다란 목, 거대한 날개, 잿빛 몸통, 몸을 채운 비늘……. 그건 흡사 ‘날개 달린 도마뱀’이 거대화한 모양새였다.
“아… 아니. 이게 뭔…….”
언뜻 와이번과 비슷했다. 하지만 생물로서 완성도는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내풍기는 기운 역시 비교가 안 됐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칼을 뽑았다. 어깨높이만 10미터에 이르는 저 미지의 생물체가 김하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검을 거두세요. 그런 것을 쥐고 있으면 등에 태울 수 없으니까.>
그녀의 목소리엔 묘한 강제성이 있었다. 고병갑은 홀린 듯 검을 회수했다.
그녀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몸을 수그렸다. 올라타라는 신호였다.
<당신의 차를 내 등에 실으세요. 얘들아, 저분을 도와드리렴.>
“예 마스터.”
고병갑과 세 아이는 힘을 합쳐 차를 옮겼다. 상위 각성자 넷이면 그런 일쯤 일도 아니었다.
김하나의 등판은 축구는 몰라도 농구는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차 한 대쯤 가볍게 수용했다.
고병갑은 얼떨떨한 기분을 달래며 그녀의 등에 올랐다.
<비행하는 중에는 당신 말을 듣지 못해요. 떨어질 일은 없을 테니 괜한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아, 응. 알겠어.”
<갔다 오마.>
“제발 무리하지 마세요, 마스터.”
김하나가 두 쌍의 날개를 퍼덕였다. 이윽고 거대한 몸이 떠올랐다. 고병갑은 현실 감각이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하나는 구름에 닿을 듯 날아오른 뒤 남쪽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 * *
김하나는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비행했다. 때때로 한 번씩 멈춰 서긴 했는데 방향을 살피는 것 같았다.
멍하니 땅을 내려보고 있으려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길 뚫고 가려 했다니.’
산맥은 광활하고 험난했다. 만약 자신이 계속 오기를 부렸다면 김하나의 말마따나 시체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고병갑은 널찍한 등판에 퍼질러 앉아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본들 최선의 행동 지침은 떠오르지 않았다.
“쉽지 않네.”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해가 저무는가 싶더니 세상이 온통 깜깜해졌다.
꾸벅꾸벅 졸던 고병갑은 들썩거림에 깨어났다. 그들은 더는 하늘에 있지 않았다. 땅이었다.
그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김하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입에서 가쁜 숨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봐 당신 괜찮아?”
<차… 차를 내려요. 어서.>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고병갑은 픽업트럭을 번쩍 들고 땅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김하나가 인간 형상으로 돌아갔다.
“보지… 마세요.”
그녀는 나신이었다. 고병갑은 머쓱함에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져 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어디 안 좋은 거냐?”
“너무 멀리까지 나왔어요. …좀 쉬다 돌아가야겠어요.”
김하나가 고르며 물었다.
“내가 언제 데리러 오면 되죠?”
“날 데리러 올 필요는 없어. 일이 잘 풀리면 내가 다시 지리산으로 찾아가지.”
“일이 못 풀리면요?”
고병갑은 무심결에 대답하려 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얼마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서. 아무튼 지리산에서 다시 보는 거로 하자고.”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조심히 돌아가도록 해.”
고병갑은 널브러진 김하나를 두고 차에 올랐다. 비행 중에 틈틈이 예열해 놓았기에 무리 없이 시동이 걸렸다.
벌써 새벽이었지만 지체 않고 차 바퀴를 굴렸다. 앞으로 며칠간은 밤낮없이 달릴 생각이었다.
석판에 새겨진 지도에 의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적이 하나 있을 터다. 우선은 그곳부터 찾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