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각자의 사정
“흐흥.”
고병갑은 웬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손은 바삐 움직이며 짐을 쌌다. 커다란 더플백에 여분의 옷가지와 이런저런 비상용품을 담는다. 그 뒤엔 차림새를 살폈다. 허리 혁대와 전투 조끼에는 적재적소에 써먹을 유용한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채비를 갖춘 그가 현관에 섰다. 텅 빈 집을 둘러보려니 어쩐지 씁쓸해졌다. 고병갑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꼭 다시 보자, 집아.”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에는 픽업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사흘 전 중고로 급히 한 대 뽑은 것이다. 싼값에 데리고 온 놈인지라 외견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도 바퀴는 잘 굴린다.
그는 짐칸에 실린 경유 말통과 보존 식량을 재차 확인했다. 이상 무.
“좋아.”
그는 더플백을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올랐다.
“짜식들, 기다리고 있어라. 형 간다.”
차가 부드럽게 내 달렸다.
* * *
집을 나선 그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카페였다. 평일 아침인데도 사람이 꽤 많다. 고병갑은 2층 플로어 구석에서 약속했던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복 차림의 여인이다.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둥근 챙모자에 마스크에…….
“나 참, 선글라스는 왜 꼈대?”
“그럼 나 같은 유명인이 얼굴 훤히 드러내고 다니리?”
“그러고 다니는 게 더 수상해.”
정선경이 피식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 꼴이 우습긴 했다.
고병갑은 뜸 들일 것도 없이 준비했던 물품을 내밀었다. 통장, 재산 서류, 인장 등이었다.
정선경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스크와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다.
“말했던 그대로야. 내가 3주 넘게 연락이 안 되면 그것들 전부 우리 엄마한테 전해 줘.”
“야, 병갑아……. 내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건데, 이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말했잖아, 마땅히 믿고 맡길 사람이 누나뿐이라고.”
“아니,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정선경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어 말했다.
“네가 미리 전해 드리고 가도 되잖아.”
“그건 싫어. 엄마한테 죽을 수도 있다고 어떻게 말해?”
“지랄하네. 죽고 나서 통보하는 건 괜찮고?”
“그게 낫지.”
“진짜 넌 상상 이상의 미친놈이다.”
고병갑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반면 정선경은 기가 찬다는 반응이었다. 그녀가 서류철을 챙기며 물었다.
“내가 이거 들고 나르면 어쩌려고 그러냐?”
“누나 돈 많잖아. 누나 재산에 비하면 푼돈일 텐데 뭐하러.”
고병갑은 그렇게 대답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조금 불안해졌다.
“들고 나르지 마. 우리 엄마한테 꼭 전해 줘.”
“아이고, 예예. 네가 귀신 돼서 나 저주할까 봐 겁나서 못째겠다.”
정선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한순간 그녀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야, 그런데 병갑아.”
“어.”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길래 이 난리를 벌이는 거냐고. 아니, 섣부르게 대답하지 말고 들어. 너야 이렇게 던져 놓고 가도 마음이 태평한지 모르지만 남겨질 사람은 생각 안 해? 이 돈 건네받고 너 죽었다는 이야기 들을 어머니 생각은 안 하냐고? 그리고 그걸 말해야 하는 내 입장은 또 어떻고?”
“…미안.”
“미안? 시발, 그게 다야?”
“무리한 부탁인 줄 알아.”
“어휴! 진짜 이 등신 새끼!”
정선경이 버럭 고함쳤다. 주변 시선이 잠시 이쪽으로 쏠렸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 뭔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준다니까?”
“말했잖아. 나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염병하네!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어? 네가 무슨 다크 나이트야? 너 혼자 세상이랑 맞서 싸우기라도 하는 거냐고!”
고병갑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선경은 씩씩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안 가면 안 돼?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거 안 하면 안 되냐? 응?”
“…….”
뭔가 멋진 대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다.
-평생을 찝찝한 기분으로 사느니 소명을 위해 죽는 게 낫다.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건 자신과 맞지 않았다. 고병갑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가야지.”
“어휴…….”
“그리고 나 죽으려는 거 아니야. 반드시 돌아올 거야.”
“…하여간 너 죽기만 해 봐. 내가 가만 안 둬.”
“그래, 이제 가야겠다.”
고병갑이 몸을 일으켰다.
“일이 잘 풀리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들려줄게.”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몸조리나 잘해.”
“알았어.”
고병갑이 카페를 떠났다. 정선경은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그가 떠나간 자리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차에 오른 고병갑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앞으로 꽤 오래 달려야 한다.
“가자, 지리산으로.”
* * *
고병갑은 로드의 권능을 빼앗겼다. 왜 그런 엿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는 일단 차치하자. 중요한 건 그 이후 아스빌람을 넘나들 수 없게 됐다는 부분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아스빌람에 돌아갈 수 있을까? 실토하자면 답이 보이지 않았다.
밭을 갈려면 괭이부터 잡아야 하는데, 괭이를 잃어버렸으니 이건 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막연히 기다렸다. 랜드리올이 지구와 이어진 문을 열 때까지 하염없이 대기했다. 그런데 이놈은 대체 뭘 하는지 지난 2주간 한 번을 열지 않았다.
사실 놈이 문을 연 틈을 노려 넘어간다 쳐도 문제다. 인정하긴 싫지만 랜드리올은 강했다. 정면 승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상대방의 허를 찔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빈틈을 노리는 게 기본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아스빌람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없었다. 아무리 찾고 생각해도 없었다.
애당초 이 세상에서 자신만이 지녔던 능력…….
-나 혼자가 아니라면?
본인이 유일하다는 관념을 깨부쉈을 때야 비로소 길이 보였다.
그리고 고병갑은 자신과 아주 흡사한 능력을 보여 주었던 인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발전 단지 습격 사건의 주범, 김하나. 그녀는 분명 남과 다른 무엇이 있다.
‘아니면 어쩌지?’
아니면 아닌 거다. 그때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면 될 일. 당장은 별 볼 일 없는 가능성이라도 걸어 봐야 한다.
오후 2시가 거의 되었을 무렵, 고병갑은 지리산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기슭에 차를 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하나가 알려 준 좌표는 등산로조차 없는 험지였다. 일반인이 섣불리 나섰다간 객사하기 딱 좋다. 그러나 고병갑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조깅이라도 하듯 가뿐히 산을 올랐다. 이따금 암벽이나 넝쿨 따위가 앞을 가로막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 산행했을까? 일반인은 한나절 걸려도 못 올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산 중턱의 작은 개울. 온 사방은 언제나 그랬듯 활엽수로 빽빽했다. 그는 개울물로 목을 축인 후 사위를 훑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다.
“GPS상으로는 여기가 맞는데.”
나무로 만든 으슥한 오두막. 혹은 자연 동굴에 마련된 비밀 아지트.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주변을 낱낱이 살펴도 온통 나무뿐이었다.
“아, 망할. 나 진짜 등신인가?”
그제야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만납시다.’하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잖은가?
김하나가 자신이 올 줄 어떻게 알고…….
“좀 당황스럽네요.”
나타났다!
고병갑이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거늘, 그 자리에 김하나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서 있었다.
적대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차림새도 해진 원피스에 무기는 소지하지도 않았다.
“그거 뽑지 않았으면 하는데요.”
김하나가 고병갑의 오른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움켜쥐었던 칼자루를 놓으며 대답했다.
“그러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런 것치고는 무장 상태가 요란하군요.”
“여기서 쓸 게 아니야.”
김하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설명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 날 찾아오라고 한 지 꽤 됐는데 이제야 왔군요. 사실 당신이 너무 안 찾아오길래 얼마 전에는 우리 쪽에서 당신을 찾기도 했어요. …그런데 안 보이더군요.”
“한동안 바빴거든. 그나저나 당신이 데리고 다니는 애들은 어디 있지? 웬일로 안 보이는군.”
“…….”
김하나는 답변 대신 눈썹을 찌푸렸다.
“왜 반말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딴죽에 고병갑은 말을 잃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조금 추하게 답했다.
“그쪽도 반말하든가.”
“별로 그러고 싶진 않네요. 사실 지금 와서 겉치레 따지는 것도 웃기기는 하죠. 나이를 먹으니 나도 좀 이상해졌군요.”
“그런 말 할 연배는 아닌 것 같은데.”
김하나는 아무리 높게 쳐도 고병갑 또래였다. 물론 김하나급의 각성자면 외관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다. S급부터는 불로(不老)의 영역에 도달하니까.
“나는 고병갑 씨보다 두 배는 나이가 많아요. 살아온 일수를 따지면 네 배도 넘고요. 어쩌면 수백 …아, 아니에요. 금방 한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김하나는 작게 한숨 쉬고 이어 말했다.
“날 찾아왔다는 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의미겠죠. 들려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약속 먼저…….”
“아니, 오늘 당신을 찾아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야.”
고병갑이 김하나의 말을 끊었다. 김하나는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물었다.
“다른 이유?”
“그래, 나를 아스빌람으로 보내 줘. 이야기를 듣는 건 그다음이다.”
“아스빌람?”
그녀가 반문했다.
“그게 뭔데요?”
“아스빌람 몰라?”
“사람 이름 같지는 않고,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어떤 장소 같은데 내가 아는 국가나 도시 중엔 그런 이름이 없네요. 다 떠나서 왜 내게 그걸 부탁하죠?”
고병갑은 얼마간 입을 다물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건가 싶었다.
‘아니, 아니야. 그때 내가 본 것을 믿어.’
그가 생각을 고쳐먹고 재차 질문했다.
“당신,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로 넘나들 수 있지 않아?”
“……!?”
김하나의 눈동자가 커졌다. 입도 저절로 벌어졌다. 고병갑은 자신이 핵심을 찔렀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녀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나도 댁이랑 동류였으니까. 뭐, 지금은 아니지만.”
“동류라고요?”
“흠, 그렇구먼. 굳이 이런 데 아지트를 만들 필요가 없겠어. 저쪽 세계에 근사한 게 있을 테니까.”
고병갑은 어서 가자는 듯 그녀를 재촉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넘어가지?”
김하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그녀가 왼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다음 순간, 공간이 네 갈래로 찢어지며 벌어졌다. 안쪽에선 시커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내 거랑은 몽타주가 좀 다른데?’
아무렴 어떤가. 고병갑은 아무 생각 없이 안으로 들어서려 다 직전에야 간신히 멈춰 섰다.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산 아래에 차 대 놨는데, 그것도 좀 가지고 가면 안 될까?”
“…….”
* * *
「께엑!」
「허억, 허억, 허억!」
홉 고블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주위에는 네 명의 노멀 고블린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만신창이였다.
「께르륵…….」
「아으아… 아프다…….」
널브러진 노멀 고블린들이 신음했다. 날이 서지 않은 훈련용 검이라지만 그렇다고 솜방망이인 것은 아니었다.
「…….」
홉 고블린이 검을 놓았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다 아릿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온 사방에서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동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무기를 휘둘러 댔다.
홉 고블린은 그 광경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쓰러진 것들은 광산으로 보내라. 강인한 놈들만 남겨라.」
그때 투기장에 랜드리올이 나타났다. 대련 중이던 고블린들은 즉시 절을 올렸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랜드리올은 투기장을 쓱 둘러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하던 거나 마저 해라.」
그 호령에 고블린들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무기를 휘둘러 댔다. 벌써 한나절째였다.
「제왕이시여…….」
「뭐냐, 메리린.」
「다들… 많이 지친 듯하옵니다. 날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메리린.」
「예.」
「그놈들, 신성군 놈들은 우리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해가 저물든, 폭우가 쏟아지든. 놈들은 쉬지 않고 진격해 올 뿐이다.」
메리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랜드리올이 고블린들을 돌아보았다.
「이 한심한 꼴을 보라.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사라온이 이리도 나약해지지 않았나. 이런 상태로는 다시 붙어도 신성군에게 짓밟힐 뿐이다.」
「맞는… 말씀이옵니다.」
랜드리올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었다. 투기장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제왕이시여.」
「말하라.」
「소녀가 감히 제왕의 뜻에 의혹을 품는 것은 아니나, 제왕께서 재림하신 이후 행적을 살펴보니―」
「늘어뜨리지 말고 본론만 말하라.」
메리린은 얼마간 뜸 들이다 물었다.
「혹 전쟁을 준비하시는 건지요?」
「그렇다.」
랜드리올이 즉답했다. 메리린의 눈이 커졌다.
「누, 누구와 말입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당연히 마드무트를 비롯한 어리석은 우민을 벌하려는 것이다.」
「하오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 대륙에는 저희뿐입니다. 마드무트는커녕 사라온을 제외한 아인들은…….」
「저쪽 세계를 침공할 것이다. 마드무트는 그곳에 있다.」
메리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다. 랜드리올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다가 미간을 구겼다.
「그건 못마땅하단 듯한 표정이구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메리린.」
「예, 제왕이시여.」
「나는 지상의 평화를 바랐다. 사사로운 것을 차지하려 혈투를 벌이는 우매한 것들이 더는 그러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지상을 통합해 규칙과 규율을 두고 우민들을 다스렸다. 그들은 더는 땅과 음식 때문에 싸우지 않았다.」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평화의 세대였던 메리린은 당시의 상황을 기억했다. 사라온의 통치 아래 아인들은 화합하며 지냈다.
종족적 편향을 제쳐 두고 객관적 사실만 보더라도 그 시대는 풍요로웠다. 지상의 누구라도 배 곪지 않고 등 따습게 잘 수 있었다.
랜드리올이 ‘지상의 신’으로 추앙받을 정도였으니.
「한데.」
랜드리올이 주먹을 쥐었다. 팔뚝으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한데 심성이 꼬인 마드무트는 그 꼴을 두고 보지 못하더구나. 내가 지상의 신이라고 불리는 것을 두고 오만하다고 하더란 말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라온을 멸족시킨다니! 그것이 정녕 고귀한 신의 잣대란 말이더냐?」
「…….」
「더 기막힌 것은 공포에 굴복한 우민들의 행태다. 놈들은 거두어 준 은혜도 모르고 우릴 배신했다. 의기투합해 신과 대적해도 모자란 마당에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것이 어버이에게 창칼을 겨눈 것과 무엇이 다르더냐?」
파각!
땅바닥이 랜드리올의 기세를 버티지 못하고 갈라졌다. 메리린이 얼른 그를 달랬다.
「제, 제왕이시여. 고정하시지요.」
「후우… 나는 바린을 잃고야 깨달았다.」
바린이란 이름이 나오자 메리린이 움찔 떨었다. 바린은 왕후의 이름이다. 제왕 랜드리올이 정을 준 유일한 여인.
메리린은 일곱 첩 중 하나로 지내면서도 바린에겐 말도 붙이지 못했었다.
「무… 무엇을 깨달으신 건지요?」
「내가 왜 자연의 섭리마저 거슬러 가며 이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그야 아스빌람을 재건하여 다시금 사라온에 번영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까?」
「아스빌람의 재건?」
랜드리올은 코웃음 쳤다.
「이미 땅속에 묻힌 아스빌람을 무슨 수로 재건한단 말이더냐?」
「예?」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케 했던 놈들에게 똑같은 절망을 안겨 주기 위함이다. 나는 마드무트의 목을 베기 전에는 눈조차 감을 수 없다. 그게 내가 깨달은 것이다!」
메리린은 멍한 눈으로 제왕을 올려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기합과 신음은 여전히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몇 명의 고블린은 탈진하여 쓰러졌다. 메리린은 동태 같은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한데 제왕이시여, 신과 전쟁을 벌이기엔 병사의 숫자가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닌지요.」
그녀의 지적에 랜드리올이 끙 앓았다.
「그렇긴 하다. 고작 천오백이라니……. 하나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장수의 몫, 나머지는 화살받이에 지나지 않는다. 제기랄, 악마 놈들이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거라곤 나도 예상하지 못했군.」
「……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늦지 않게 계몽의 씨앗을 심어 두었더구나. 싹도 텄고.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조금 더 지나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고대의 상점에서 여기사도 사들이면―」
「제, 제왕이시여!」
메리린이 랜드리올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랜드리올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내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리린이 물었다.
「제, 제왕께서는 악마들이 지상을 침공할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
랜드리올이 메리린을 빤히 보았다. 메리린은 오금이 저렸지만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랜드리올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다. 악마를 지상계로 끌어들인 것이 바로 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