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
가전제품들이 저마다 작동음을 뱉어 낸다. 그 외에 이렇다 할 소음은 없었다. 오히려 고요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과 차가 돌아다녔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오피스텔 꼭대기 층에 닿지 못했다.
고병갑을 깨운 것은 끔찍한 더위였다. 문이란 문은 다 걸어 잠그고 냉방도 하지 않았으니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으, 으으…….”
그의 눈꺼풀이 반 틈 정도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누군가 눈에 시멘트를 부어 놓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풀칠을 해 놨던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눈덩이가 무거울 리 만무했다.
그는 다시 잠들려 했다. 아니. 정신을 놓으려 했다. 이 끔찍한 더위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으리라.
온몸에 땀이 흘러 끈적했다. 끈적한 몸은 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다. 갈증은 또 어떻고? 목에 가뭄이라도 든 듯했다.
‘배고파…….’
갈증을 인지하니 이제 허기짐까지 밀려왔다. 고병갑은 여러 지독한 고초에 시달렸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깨어났으면서도 반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저 좀비처럼 바닥을 기며 냉장고로 향했다. 2리터들이 생수 한 통을 통째로 들이켠다. 반 정도 비웠을 땐 얼굴에 부어 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이제야 정신이 30% 정도 드는 기분이었다.
‘에어컨… 에어컨…….’
남은 70%를 일깨우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 이어졌다. 그는 가까스로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낸 뒤 에어컨 온도를 최하로 낮추었다. 후덥지근했던 내부 온도가 서서히 식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있었다. 머리가 먹구름처럼 뿌옇다. 분명 뭔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내야 할진대 지금 몸 상태로는 때려죽여도 무리였다.
일단은 달구어진 몸을 식히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대략 30분 정도 흘렀다. 32도였던 실내 온도가 23도까지 떨어지니 그제야 심신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했다.
그래도 허기짐은 여전했다. 고병갑은 쟁여 둔 주전부리 따위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다 문득 제 꼴을 보았다.
“…….”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떼가 끼고 해진 옷가지. 심지어 흰색 면티는 넝마마냥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집 안인데 신발은 또 왜 신고 있는 거람?
“…시발.”
지난날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머릿속 안개가 걷히고, 기억의 편린들은 순식간에 결집하며 퍼즐을 완성했다.
메리린의 배신, 랜드리올의 부활, 고블린 로드의 권능을 빼앗기고 살해당함. 그 일련의 사건이 주마등처럼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분노나 분함보다도 우선해서 찾아오는 감정은 의문이었다. 고병갑은 고대의 저명한 철학자나 했을 법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나는 왜 살아 있나?’
심장이 꿰뚫렸다. 운기를 취할 수 없을 만큼 치명상이었다. 설상가상 자신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었고, 도움을 청할 방도 역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는 것도 용한데 하물며 지구에 있는 집에 있다니?
그는 기억을 조금 더 면밀하게 들여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 뭔가 거뭇한 것을 봤던 것 같은데…….
‘젠장, 모르겠어. 랜드리올이 날 살려 준 건가?’
지금 세울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그러했다. 랜드리올이 마음을 고쳐먹고 자신을 치료해 준 뒤 지구로 돌려보냈다.
알아먹진 못했지만 도르마와 메리린이 보였던 행동들을 보면 그들이 랜드리올을 설득했을지도 몰랐다.
‘메리린… 제길!’
메리린을 떠올리니 분노가 치솟았다. 인제 와서 깨달아 봤자 의미 없다만 그녀는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으리라.
베르보니아에 숨겨진 게 무엇인지. 제왕을 되살리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렇다. 고병갑은 처음부터 제물이었던 것이다.
막판에 그녀가 보인 태도가 다소 의아하긴 했다. 베르보니아에 도착한 직후 발타드렌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둥, 여행 내내 뚱한 표정을 짓는 둥, 눈물을 보이며 사죄하는 둥…….
‘나를 팔아넘긴 건 변함 없지만.’
배신감, 분노, 허탈감에 고병갑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믿었던 도르마마저 권능을 빼앗긴 자신을 위해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게 너무나도 마음 아팠다.
“하아… 모르겠다, 시발.”
고병갑은 그저 옷을 벗어 던졌다. 욕실로 가서는 찬물을 끼얹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샤워하며 몸을 살폈다. 몸은 말끔히 회복된 상태였다. 하지만 고블린 로드의 권능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체감하기론 다리라도 하나 절단된 양 상실감이 느껴졌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우웅! 우웅!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짧게 울린 것을 보아 문자 메시지가 온 모양이다.
핸드폰은 벗어 둔 바지 주머니에 있었다. 제기랄. 액정이 박살 났다. 배터리는 3%뿐 남지 않아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굴었다.
충전기부터 꽂은 뒤 재차 핸드폰을 들었다. 고병갑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치, 칠월 삼 일이라고?”
핸드폰이 띄우는 날짜는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다만 그가 죽었던 날은 6월 18일이었다. 무려 보름 전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자신이 15일이나 기절해 있었단 말인가?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는데 보름쯤 잘 수도 있겠지. 염병, 어쩐지 목이 더럽게 마르더라니.’
그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난리가 아니었다. 부재중 전화며 부재중 문자며 수십 통이 와 있었다.
자신을 찾을 이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그가 의구심을 느끼며 부재중 문자를 확인했다.
다음 순간. 그는 벼락 같은 속도로 집을 뛰쳐나갔다.
* * *
“이런 썅!”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고병갑은 비명을 질렀다. 항상 주차해 놓는 자리엔 남의 차가 버젓이 있었다. 지하 주차장 어디에도 그의 SUV는 없었다.
당연하지! 그 차는 지금 베르보니아에 있다.
그는 즉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택시를 잡아탈까 싶다가 그 시간마저 아까워 내달리기 시작했다. 병원과 집 사이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엄마얏!”
“저, 저 사람 뭐야!”
고병갑은 웬만한 차보다 빠르게 달렸다. 담이나 펜스는 그에게 아무런 제약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행인들은 아주 질겁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용산구에 위치한 모 병원에 도착했다. 그는 1층 홀을 지나쳐 비상구 계단을 타고 4층으로 올라갔다.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결코 숨이 차서 그런 건 아니었다.
마침내 병실 앞에 섰다. 그의 어머니인 박영옥이 입원 중인 병실이었다. 문고리를 향해 나아가던 손이 멈칫거렸다.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손이 떨렸다.
그때였다. 옆에서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메! 병갑 총각!”
어머니의 간병인인 최지옥 여사다. 그녀의 손에는 주전자가 들려 있었는데, 최지옥은 어찌나 놀랐는지 주전자를 떨군 것도 몰랐다.
“아이고, 왜 이제 왔대! 내가 하루에도 전화를 백 통은 넘게 했는데 받지도 않고 말이여! 나는 병갑 총각이 어? 어디 가서 그만… 그만 깨꼬닥해 버린 줄 알고 말이여!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기나 해?”
“…죄송해요, 아주머니. 일이 바빠서요.”
“육시럴! 무슨 일이 얼마나 바쁘면 전화 한 통 받을 시간도 없대? 엄마야? 이건 왜 또 이 지랄이여?”
그녀가 그제야 바닥에 나동그라진 주전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주전자를 주워 들며 슬그머니 말했다.
“언능 들어가 봐.”
“…안에 계시나요?”
“그려, 꼼짝 않고 자네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디 가긴 어딜 가겠어? 어서 들어가 보드라고.”
“네.”
고병갑이 병실 문을 열었다. 너무나도 야윈 중년 여인이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이 들렸던 모양이다.
고병갑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본래 어머니란 그렇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 존재가 어머니 아니던가.
“엄… 마…….”
고병갑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침상으로 다가갔다. 박영옥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고병갑은 아기처럼 그 안에 안겼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박영옥은 은근하게 미소 지으며 장난스레 말할 뿐이었다.
“아들, 너 몸이 좋아진 것 같다. 요새 운동하니?”
* * *
“그래서 이제 다 나은 거야?”
“그렇다네. 의사 선생님은 한 달 정도 검사하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던데 별문제 없을 거라나 뭐라나?”
고병갑과 박영옥, 그리고 최지옥은 두런두런 앉아 사과를 깎아 먹었다.
고병갑의 눈시울은 아직도 붉었다. 이렇게 울어 본 건 최근 5년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박영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소연했다.
“그제는 웬 기자들이 떼거리로 몰려오더라고.”
“기자가 왜?”
고병갑의 질문에 대답해 준 것은 최지옥이었다.
“영옥 씨가 국내 환마병 환자 중 유일한 완치 사례랴. 그래서 취재한다고 이 기자 놈의 새끼들이 몰려오는데… 에잉, 쯔쯧!”
“지옥 씨가 고생 많이 해 주셨어. 기자들 막느라고.”
“아유, 고생은 무슨 고생이어유. 그냥 괘씸하니께 욕 한 사발 해 준 거지.”
“아주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고병갑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최지옥은 멋쩍은 표정으로 손사래 쳤다.
“그나저나 아들.”
“어?”
“너 말이야, 정말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니? 연락도 닷새나 안 되고.”
고병갑이 입을 어물거렸다. 차마 죽었다 살아난 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최지옥도 박영옥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박영옥은 못마땅하단 듯이 팔짱을 끼고 이어 말했다.
“사실 잠깐잠깐 깨어날 때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 비싼 치료비를 다 대는지 말이야. 아들… 뭐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에, 에이, 무슨 나쁜 짓이야? 그냥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돈으로 병원비 댄 거야.”
“엄마 바보 아니다. 너희 아빠 사망 보험금 해 봤자 몇 푼이나 된다고?”
고병갑의 아버지 고희성은 짐꾼이었다. 그리고 고병갑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박영옥은 변변찮은 직업은 없었지만 고희성이 남기고 간 재산으로 아들을 키웠다. 딱히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 남들 사는 것만큼은 살았다.
가세가 기운 건 고병갑이 22살이던 때였다. 그가 전역을 4개월 정도 앞두었을 때 박영옥이 환마병에 걸려 쓰러졌으니.
고병갑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집 팔았어.”
“지, 집을 팔았다고? 그, 그럼 너는 어디서 지내고?”
“세 들어 살았지, 뭐.”
“아이고… 반푼이야, 반푼이야.”
박영옥이 이마를 턱 짚었다.
“그거 가지고도 안됐을 텐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치료비가 지금껏 15억은 족히 넘게 들었음을.
경기 변두리 아파트 한 채 팔아 치운다고 해결될 돈이 아니었다.
“나도 돈 벌었지.”
“네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돈을 버니? 너 대학은 졸업한 거야?”
고병갑은 이쯤에서 어머니의 걱정을 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는 법이니까 가만히 두면 밤새도록 시달릴 게 분명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 불법적이거나 나쁜 짓으로 돈 번 거 아니니까. 그리고 집도 새로 샀어. 나 돈 많아.”
“그러니까 네가 무슨 재주로…….”
고병갑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박영옥은 아들과 손을 마주 잡자 깜짝 놀랐다. 몹시 크고 거칠다. 본인 기억 속 아들과는 영 딴판이었다.
“엄마, 시골로 이사 가자.”
“응?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소리니?”
“엄마 시골 좋아하잖아.”
“아니, 좋아하기야 하지만…….”
“같이 시골 가서 둘이 조용히 살자. 텃밭도 가꾸는 거야. 고구마랑 감자 심고 고추랑 토마토도 심자. 나 농사지을 줄 알아. 공부 많이 했거든. 아, 가축도 몇 마리 키우면 좋겠다. 닭도 좋고 토끼도 괜찮겠네. 축사도 내가 만들면 돼. 많이 만들어 봤거든. 그러니까…….”
“아들.”
“응, 엄마. 왜?”
“아들 왜 또 울어?”
“어?”
고병갑이 자기 눈가를 훔쳤다. 축축한 눈물이 묻어나왔다. 내가 왜 이러지?
그때 박영옥이 고병갑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추었다.
“아들, 너 무슨 일 있구나? 그런 거지? 뭔데. 엄마한테 말해 봐.”
“아… 아냐. 일은 무슨.”
고병갑은 눈물을 벅벅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
그는 병원 화장실로 갔다. 냉수를 얼굴에 끼얹으며 자책했다. 엄마 앞에서 칠칠치 못하게 무슨 꼴이람?
그가 거울을 보았다. 충혈된 눈 때문일까. 짙은 다크서클이 더욱 돋보였다. 고병갑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됐어. 이제 아스빌람은 생각하지 말자. 할 만큼 했잖아. 나더러 뭘 더하라는 거야? 부하한테 뒤통수까지 맞았는데!”
비록 그 끝이 깔끔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고블린들이 적어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도록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가 없어도 고블린들이 굶어 죽는 일은 없을 터다.
더구나 고블린 로드가 공석인 것도 아니다. 랜드리올이 자신의 정수를 빼앗아 부활했잖은가. 이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신나게…….
“망할!”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했다.
“아스빌람을… 내가 만든 아스빌람을…….”
고병갑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아스빌람에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그것을 깨달으니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자신이 이제껏 쌓아 온 여러 유대가 한순간 단절됐음이 실감됐다.
고붕이, 도르마, 도란, 키리얀, 창식이 태식이, 투르카 오르카, 에아, 쪼꼬미들. 솜니움 바위산의 절경, 발타드렌의 석양. 이제 그것들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먼 훗날, 고블린들의 기억 한편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영영 없어지는 것인가?
솔직히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작별하더라도 이런 식은 싫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찮다고만 생각했던 로드의 자리였다. 그런데 모르는 사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뭐해, 나는 이제 로드도 뭣도 아닌데. 아스빌람으로 갈 수도 없다고.”
하지만 현신은 냉혹했다. 아스빌람은 이미 손을 델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고병갑은 웃옷을 끌어 얼굴을 벅벅 닦은 뒤 엄마의 병실로 돌아갔다. 최지옥은 어딜 갔는지 없었다. 박영옥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아들.”
“응. 아 참, 엄마. 혹시 외식은 안 된대? 엄마 고기를 좀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병원 밥은 부실하잖아. 내가 의사 선생님께 한 번 물어볼까?”
“아들.”
“…응, 말해.”
박영옥이 몸을 일으키다가 잠깐 비틀거렸다. 지난 몇 년간 줄곧 누워만 있었으니 그 간단한 동작조차 아직은 어려운 것이다.
고병갑이 얼른 엄마를 부축하려 들었다. 하지만 박영옥이 그 손길을 거두어 냈다.
“엄마?”
“아들, 내 아들 병갑아.”
“왜 자꾸 불러? 듣고 있잖아. 할 말 있으면 해.”
“내가 너무 오래 누워 있었어. 내가 널 뒷바라지해야 하는데 네가 날 뒷바라지했구나. 나는 정말 몹쓸 엄마야.”
“엄마! 뭘 그런 말을 해? 가족인데 당연하잖아.”
“엄마가 만날 자느라 모자 사이에 많은 얘기가 밀린 줄 알아. 엄마로서 부끄럽지만 나는 네가 무슨 일로 고민하는지도 잘 모르겠구나.”
“아니, 글쎄, 고민 같은 거 없대도.”
“거짓말하네. 아무리 그래도 어미가 제 새끼 표정 하나 못 읽을까 봐?”
고병갑은 뜨끔함에 입을 다물었다.
박영옥은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들, 나는 너랑 시골로 가서 살지 않을 거야.”
“뭐? 왜?”
“이제 이 못난 엄마를 위해 살지 마. 네 인생을 살렴. 엄마가 머리칼을 잘라 파는 한이 있어도 도와줄 테니까.”
고병갑이 눈을 끔뻑거렸다. 뭔가 말하려는 순간 박영옥이 선수 쳤다.
“더는 나를 아들 앞길 막는 못난 아줌마로 만들지 말아 줘.”
“…….”
박영옥이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오직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말을 했다.
“너를 슬프게 하는 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말끔히 해결하고 오렴. 네가 하고픈 일을 해. 그게 엄마가 원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