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99화 (99/151)

99. 시련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다. 사람의 입보단 짐승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게 더 어울릴 법한 통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털을 곤두서게 했다.

고병갑의 명치에서 빛의 구슬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발광하던 도르마도 멈칫거렸다. 주술사인 그는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것이 로드의 정수임을.

정수가 뽑혀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뽑혀 나온 정수가 단상의 석관까지 뻗어 가는 시간은 그보다 더 짧았다.

고블린 로드의 정수가 석관에 스며들자 사방으로 빛이 번쩍였다. 그 눈부심에 도르마도, 메리린도 눈을 가렸다.

벼락이라도 몰아친 듯 세상이 하얘졌다. 몇 초 뒤, 도르마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상황을 살폈다.

고병갑은 기둥 가운데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메리린은 주저앉은 채 눈물범벅인 얼굴로 석관을 올려 보고 있었다.

「에잇!」

그가 메리린의 손을 거칠게 떨쳐 냈다. 그리고 고병갑이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로드… 시… 여……?」

도르마는 고병갑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머리는 얼른 고병갑을 부축해 안위를 살피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눈앞의 사내, 그러니까 고병갑은 더 이상 자신들의 로드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 사내였다.

도르마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고블린이란 종족의 DNA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타 종족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으윽…….”

고병갑은 당장 죽을 듯 인상을 찌푸렸다. 혈색이 시체마냥 창백하고 식은땀은 비처럼 흘렀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땅을 짚었으나 이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

어떻게 해야 하나? 도르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였다. 일순 등골이 저릿할 만큼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의 출처는 석관이었다.

스르륵!

석관의 뚜껑이 천천히 밀렸다. 벌어진 틈으로 큼직한 손이 튀어나오더니 완전히 열어 버렸다. 잠시 후 한 인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흑발을 치렁치렁하게 기른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도르마는 굳어 버렸다. 아니, 얼어붙었다.

압도적인 권능, 압도적인 공포, 압도적인 위용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사내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도!

「제왕이시여!」

메리린이 환호에 차서 외쳤다.

제왕이라고? 도르마는 그 단어로 사내의 정체를 어림할 수 있었다. 그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제, 제, 제왕 랜드리올?」

역대 로드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며 아스빌람이 멸망하기 전 마지막 로드였다는 사내. 도르마는 전설을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 * *

고병갑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 아?’하는 순간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 고통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이 세상에 없으리라. 그나마 비유를 하자면 산 채로 피가 뽑히고 뼈가 발라지는 기분이었다.

혼절할 듯한 통증이 사라지고 난 뒤는 더 문제였다. 그는 자기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는 감상을 받았다. 정말로 가슴에 구멍이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허한 느낌은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뭘까? 내 안에서 사라진 게 대체 뭘까? 장기가 녹아 없어진 걸까? 심장이 뽑혀 나간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사타구니 아래 알 두 개가 으깨진 건가?

「할라브시타!」

불현듯 메리린이 말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고블린들의 언어 같기는 한데, 도대체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엔 드라마가 말했다.

「하, 하, 할라브 랜드리올?」

이번엔 랜드리올이란 부분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병갑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종잡을 수 없었지만 일단 부축을 좀 받았으면 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도르마… 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고블린들의 언어를 뱉을 수가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모국어처럼 유창히 사용하던 언어였는데, 지금 와서는 간단한 안부조차 묻는 게 불가능했다.

그제야 고병갑은 자신에게서 소실된 부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 없어. 문도, 고대의 상점도 없어졌어.’

고블린 로드의 정수를 취한 뒤 손발처럼 신체 일부가 됐던 두 개의 권능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덧붙여 언어 능력도.

그 끔찍한 박탈감을 음미할 틈도 없이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고병갑은 황급히 몸을 돌리다가 또 무너져 내렸다. 뻣뻣한 고개를 간신히 쳐들고 위를 보는데 커다란 석관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뭐야?’

처음에는 긴 흑발을 보고 여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2미터는 가뿐히 넘을 듯한 신장과 구릿빛 근육질의 몸은 어느 각도로 보나 사내의 것이었다.

아래로 쳐진 뾰족한 귀를 보고는 저자가 사라온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인상은 차가웠고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반듯했다.

고병갑은 좀 전에 도르마가 ‘랜드리올’이라고 말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렇다면 저자가 랜드리올이란 말인가?

1,500년도 전에 죽었다던 그 왕이라고?

랜드리올로 추정되는 사내가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고병갑, 도르마, 메리린을 차례로 훑었다.

그리고 메리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에토가르세 하비 사키오사, 메리리느. 다브데 로이바니르 베오테?」

* * *

「일러둔 대로 나를 깨웠구나, 메리린. 그런데 이 잡것들은 무엇이냐?」

「정수를 품었던 자와 그의 심복입니다.」

랜드리올이 주술진(呪術陣)에 널브러진 고병갑을 응시했다. 그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왕의 기개를 품은 자가 인간이란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별일이로군. 뭐, 닭이든 오리든 알만 똑바로 품으면 그만이다마는.」

랜드리올은 관심 없는 듯한 말투로 대답하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번엔 도르마를 쳐다보았다.

랜드리올과 눈이 마주친 도르마는 몸을 움찔 떨었다. 다리가 절로 후들거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주저앉고 싶어졌다.

「넌 무엇이냐. 참으로 추악하고 형편없이 생겼구나. 내 기억에 없는 생김새인데.」

「저… 저는…….」

「그도 사라온입니다, 제왕이시여.」

「뭐라?」

이제야 랜드리올의 얼굴에 감정이 내비쳤다.

「설명하라.」

「아스빌람의 국세가 기운 이후 우리 사라온들에게 많은 일이 있었던 듯합니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기엔 자리가 적절치 않은 듯하오니 우선은 옥체부터 가다듬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게 좋겠군. 현재 사라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 어딘가.」

「발타드렌입니다.」

「발타드렌이라… 네놈.」

「예, 예!」

도르마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발타드렌까지 이어진 길을 열어라.」

「…예?」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네놈은 주술사가 아니더냐? 네놈에게서 주술의 냄새가 나는데?」

「마, 맞습니다만… 길을 여는 주술은 구사할 줄 모릅니다.」

「모른다고? 이런 쓸모없는!」

랜드리올이 으르렁거리자 도르마는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손발을 덜덜 떠는 와중 눈동자를 굴려 고병갑을 흘겨보았다.

고병갑은 엎드린 자세로 랜드리올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도르마는 그의 신변을 보살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

랜드리올이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멈칫거렸다.

「잠깐, 이게 뭐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열었다. 아스빌람과 지구가 연결된 문이었다.

반구형 포탈 너머로 고병갑의 전셋집이 비추었다. 랜드리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을 쏟아 냈다.

「이건 뭐란 말인가? 저기는 대체… 음!?」

그의 눈이 커지더니 황급히 문을 닫아 버렸다.

「마드무트의 기운이라고? 무슨 영문으로? …아니 도리어 잘됐구나. 수고를 덜었어.」

그가 단상 아래로 완전히 내려왔다.

그 무렵 고병갑은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랜드리올이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정수가 뽑히고도 요절하지 않았나? 인간치고 쓸 만한 생명력이구나. 한데 네놈에게서 마드무트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가 뭐지? 보잘것없이 미약하긴 하다만.」

“…….”

고병갑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언어를 잃었으니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알아듣지도 못했고.

랜드리올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냐? 벙어리냐? 뭐… 벙어리면 어떻고 귀머거리면 어떠랴. 어차피 죽을 목숨이거늘.」

랜드리올의 손으로 가히 무시무시한 내력이 집결했다. 고병갑이 번뜩 정신을 차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제왕이시여!」

그때 메리린이 달려와 고병갑과 랜드리올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이자를 죽이실 생각입니까?」

「문제 있는가?」

「그, 그러지 마시지요. 아니,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랜드리올은 뚱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손을 돌렸다. 손이 향하던 방향이 고병갑에서 메리린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순.

「흐, 흐헉!?」

메리린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랜드리올 쪽으로 끌려갔다. 단박에 목이 잡힌 그녀가 신음을 흘렸다.

「메리린. 못 본 사이 당돌해졌구나. 그래, 내가 저놈을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를 열거해 보아라.」

「끄… 끄윽. 저, 저자는 우리 사라온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제왕께서 부활하시는 일에도 전력으로 혀, 협조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랜드리올이 입을 다물었다. 메리린은 꾸역꾸역 말했다.

「바… 방금 제왕께서 보신 곳은 저 사내의 거처입니다. 이계지요.」

「이계?」

「예… 예.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계인 듯합니다. 저, 저희 세계와는 관련이 없는 곳입니다. 부디 어진 마음으로 그가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 해 주십시오.」

「마, 맞습니다, 제왕시이여! 저분은 저희 고블… 아, 아니, 사라온들의 은인 같은 분―께엑!」

「아악!」

도르마는 무릎까지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그런데 한순간 랜드리올이 메리린을 집어 던졌다. 그녀는 멋진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 도르마를 때려 맞추었고, 둘은 뒤엉켜 바닥에 늘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랜드리올은 고병갑에게 관심을 보였다.

「네가 정녕 이계의 존재란 말인가? 희한하군. 이계의 인간도 생긴 것은 크게 다르지 않구나.」

고병갑은 사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알아듣지는 못했다.

“…나는 네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응? 방금 뭐라고 했지? 네놈 세계의 언어인가? 이쪽 말은 하지 못하는 게냐?」

“젠장, 뭐라는 거야?”

「흠, 하지 못하는가 보군.」

랜드리올이 입맛을 다셨다. 직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럼 딱히 쓸데가 없겠구나. 어차피 모조리 죽여 버리려 했으니.」

별안간 랜드리올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비수를 만들어 고병갑을 향해 찔렀다.

도르마와 메리린이 비명을 질렀다.

척!

예상과 달리 고병갑이 꼬치 신세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 또한 순순히 당해 줄 용의가 없었다. 고병갑은 온 힘을 끌어모아 검을 내질렀다.

곧 칼날과 손날이 맞닿았고 중앙에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랜드리올이 놀란 눈을 치켜떴다.

「막아? 그 몸으로? 이건 좀 놀랍구나!」

“크흑!”

랜드리올이 팔을 넓게 휘두르자 고병갑은 밀려났다. 랜드리올은 여유만만한 태도로 손날 비수를 찔러 댔다.

고병갑은 정신력으로 버티며 쇄도하는 공세를 간신히 막아 냈다.

‘이대로면 죽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음을. 놈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한 방, 한 방을 노려야 해.’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오직 강자만이 부릴 수 있는 여유, 오만. 그 빈틈을 노려 허를 찌른다면 가망이 있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누군가 잠시나마 시선을 끌어 줘야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결심을 굳힌 그가 도르마를 쳐다보며 외쳤다.

“도르마! 도르마아아!!”

그가 눈으로 말했다. ‘나를 도와라!’

도르마는 흠칫 몸을 떨며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 로드시여.」

도르마는 자기도 모르게 힘을 응집시켰다. 암흑 투사체를 만들어 랜드리올을 겨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끝내 그것을 쏘아 보낼 수 없었다. 태생적인 본능이 그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도르마가 망연자실해서 중얼거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도르마가 암흑 투사체를 거두며 눈을 내리깔았다. 고병갑은 그 모습을 보고 절망했다.

「용케도 버티는구나. 그런데 이런 장난질도 슬슬 질리는군.」

찰나. 랜드리올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심장을 향해 비수가 날아들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으아아아! 염병할!”

고병갑이 고성을 지르며 내력을 집중시켰다. 그의 검으로 모인 가공할 힘이 회오리쳤다.

랜드리올이 깜짝 놀랐다.

「분쇄!?」

“같이 죽자!”

랜드리올의 비수가, 고병갑의 검이 교차했다. 이윽고 서로가 서로를 꿰뚫었다.

왈칵! 고병갑이 피를 토해 냈다. 흘끔 아래를 보는데 자신의 왼쪽 가슴이 멋들어지게 박살 나 있었다.

‘괜찮아… 나도… 나도 한 방 먹였어…….’

분쇄를 맞았으니 놈도 멀쩡하진 않으리라. 그가 조소를 흘리며 랜드리올을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놈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검은 분명히 복부를 찔렀다. 상반신이 통째로 찢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공격일진대 어째서?

「만다라 기사단의 검법으로 짐을 상대하려 들다니, 만용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랜드리올의 복부에서 정확히 역방향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것은 검에 실린 내력을 완벽하게 상쇄시켰다.

고병갑이 내지른 회심의 일격이 평범한 찌르기가 된 것이다.

랜드리올이 고병갑을 걷어찼다. 고병갑은 꼼짝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가 축 늘어졌다.

랜드리올은 담담하게 복부에 꽂힌 검을 뽑아냈다.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도르마와 메리린이 멍한 얼굴로 고병갑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도르마가 못 참고 고병갑에게 달려가려던 순간 랜드리올이 일갈했다.

「발타드렌이라고 했나, 메리린?」

「그, 그렇, 습… 히끅.」

「가자! 할 일이 많다.」

랜드리올이 허공에 두 손을 뻗었다. 잠시 후 공간이 일그러지며 큼직한 포탈이 열렸다. 그 너머로 발타드렌의 성벽이 보였다.

랜드리올은 뒤도 안 돌아보고 포탈을 넘었다. 남겨진 두 사라온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포탈 너머로 버럭 고함이 들려왔다. 메리린이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를 절대 용서치 마세요.」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도망치듯 포탈을 넘었다.

도르마는 고병갑이 처박힌 벽을 한참 쳐다보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죄송합니다, 로드시여.」

그도 포탈을 넘었다. 포탈은 이윽고 사라졌다.

폐허가 된 베르보니아의 궁정 깊숙한 곳. 고병갑은 홀로 남게 되었다.

“…….”

‘개 같네.’

고병갑은 의식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뿌연 시야로 붉은 것들이 잔뜩 보였다. 가슴에서 쏟아져 내린 피였다.

‘뭐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담.’

의외로 그는 평온했다. 죽음을 앞둬서일까? 모를 일이다.

그저 허탈감이 몸을 감쌌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했다는 것도, 자신의 전력을 받아 내고도 멀쩡한 적이 있다는 것도.

‘큰일인데. 이번엔 정말로 죽겠어.’

이제껏 죽을 위기는 많았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정말로 살아날 길이 없었다.

이젠 더는 로드의 권능도 없다. 지구로 넘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운기조식을 할까? 아니. 어림도 없지. 심장이 아예 박살이 났다. 운기조식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처였다. 애당초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고병갑은 시야가 어둑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동자만 굴려 위를 보는데 무언가 검은 게 앞에 서 있었다.

‘저승사자인가? 기가 막히게 찾아오는군.’

스르륵. 그의 몸이 미끄러졌다.

끝이다.

정말로 끝…….

-꺄르륵! 넌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일어나렴. 꺄르르륵!

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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