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시련
고병갑은 노크하듯 투명막을 몇 번 두들겼다. 수면에 돌을 던진 양 둥근 파문이 일었다.
이어서 눈을 바짝 붙여 안쪽을 들여 본다. 당연히 보이는 거라곤 희뿌연 안개뿐이었다.
「이… 이건 대체 뭐죠?」
메리린이 심각한 투로 물었다.
고병갑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내력으로 도포된 칼날을 벼락같이 찌른다. 하나 투명막에 어떠한 손상도 줄 수 없었다.
그가 입맛을 다시며 검을 회수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무력으론 깨트릴 수 없나 보네.’
그가 대답을 안 해 주자 메리린은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가 대상을 바꿔 도르마에게 물었다.
「도르마, 자네는 알고 있나?」
「흠, 나도 정확한 정체는 모르오만 일종의 결계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요.」
「결계?」
「그렇소. 지정되지 않은 대상의 출입과 퇴장을 막소. 봤다시피 때려 부술 수도 없고.」
「그러면 저걸 뚫을 방법이 없단 말인가?」
「뭐, 어지간해서는 그렇소.」
「…….」
메리린이 상념에 잠겼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복잡미묘하다. 불안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안도하고, 낙담하는 듯하면서도 어느 구석에선 기뻐했다.
그녀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고병갑 역시 생각에 잠겼다.
‘왜 안개로 막혀 있는 거지? 괜히 찜찜하시리.’
지나쳐 온 곳들은 이러지 않았다. 무릇 사람은 일관적이지 않은 패턴에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발을 동동 구르는 애송이가 아니다. 이래 봬도 살아오며 온갖 거지 같은 일은 다 겪지 않았던가? 이 정도 돌발 상황은 애교 축에도 못 꼈다.
‘안개로 막혀 있다는 건 확실히 안쪽에 뭔가 있다는 것이겠지. 문제는 그게 이쪽에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건데.’
안개를 걷어 내고 솜니움 밖으로 진출했을 때를 떠올려 보라. 새 보금자리를 얻었지만 동시에 그러글의 위협에 노출되기도 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저 안개를 걷어 냄으로써 생각지도 못한 불이익을 떠안을 수도 있다. 그게 고병갑이 망설이는 이유였다.
‘뭐… 그렇긴 해도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웃기는 일이지.’
사실 그의 마음은 진즉 안개를 걷어 내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냥 괜히 한 번 뜸 들여봤다는 말이다.
기름값 아까워서라도 그냥은 못 돌아가지.
그런데 메리린은 또 아니었나 보다.
「로드시여,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지금은 돌아가는 게…….」
「엥? 뭐라고?」
「발타드렌으로 돌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뭔 소리야? 여기까지 와서 왜 그냥 돌아가?」
「예? 하지만 결계를 넘을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있어. 돈 주고 티켓 끊으면 돼.」
메리린은 고병갑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녀는 도르마를 향해 말했다.
「결계를 넘을 방도가 있는 건가? 아까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언제 그랬소? 어지간해선 없다 했지.」
「…….」
「로드께서 저 안개를 걷어 낼 수 있으시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고병갑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대의 상점을 열었다.
무려 50만 수정이나 지불하고 ‘탐험자의 깃발’을 사들였다. 요새는 수정 쓸 일이 딱히 없어 쌓인 양이 많았으나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까운 거였다.
「…어? 그건?」
메리린이 깃발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그 깃발에 그려진 표식, 저희 만다라 기사단의 징표입니다.」
삼각형 천에는 날개 달린 검이 그려져 있었다. 고병갑은 ‘그런가 보다.’ 하며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번뜩 뭔가 떠올랐는지 들뜬 말투로 말했다.
「메리린.」
「예, 로드.」
「너, 앞으로 만다라 기사단 단장 해라.」
「…네?」
「과거는 몰라도 지금은 단장 자리가 공석이잖아. 그러니까 네가 단장을 하라고. 승진이다, 이 말이야.」
메리린이 어안이 벙벙해서 대답도 못했다.
고병갑은 신나서 손가락까지 튕기며 이어 말했다.
「그거 괜찮겠네. 신아스빌람 정규군 명칭을 만다라라고 명명하는 거야. 이까짓 깃발도 하나 만들지, 뭐. 그림도 똑같이 그려 넣고.」
「…….」
「너도 솔직히 부단장으로 만족하진 못했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참에 기분이라도 내라고.」
고병갑은 뭔가 웃겨서 킥킥댔다. 흡사 소규모 사업장 운영하면서 전무니 이사니 직책 부여하는 느낌이었다.
뭐 어떻담?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반쯤 우스개로 한 말인데도 메리린은 진지했다. 그녀가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대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녀 메리린, 로드께서 주신 과분한 영광을 기쁜 마음으로 떠받들겠나이다.」
「야야! 그런 것 좀 하지 마. 난 너희가 그럴 때마다 소름 돋더라.」
고병갑이 치를 떨었다. 그런데도 메리린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고 어리석은 저이지만 로드께서 주신 믿음에 부합하도록 몸이 부서지라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고……. 」
고병갑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몸이 부서지라는 무슨……. 됐으니까 빨리 일어나. 누가 볼까 겁난다.」
「…네.」
그는 메리린을 일으킨 뒤 안개로 다가갔다. 그리고 망설이는 척도 않고 투명막에 깃발을 꽂았다.
* * *
안개는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시에 가히 압도적인 규모의 성벽이 나타났다.
그 장엄한 자태에 고병갑 일행은 절로 감탄사를 흘렸다.
‘여기가 베르보니아.’
베르보니아는 워낙 방대해서 한눈에 담을 수도 없었다. 일렬로 줄지은 성벽이 시야 끝까지 뻗어 있었다.
‘발타드렌도 꽤 넓은데 여기랑 비교하면 시골 깡촌 수준이구먼.’
베르보니아는 성보단 도시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할 듯했다. 이런 초대규모 건축물이 1,000년도 전에 지어졌다는 게 기막힐 노릇이다.
「둘 다 차에 타. 안으로 들어가자.」
「예.」
고병갑은 차를 몰고 성벽을 빙 둘렀다. 성벽은 멀쩡한 곳 찾기가 더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었다. 그러나 지나쳐 온 성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양호한 편이었다. 그나마 성벽이라도 남은 게 어디랴?
그들은 곧 내부와 통하는 통로를 찾았다. 정식으로 뚫려 있는 문은 아니었다. 무너진 틈새였는데, 차 한 대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성안으로 진입하니 모두 눈이 커졌다. 베르보니아는 확실히 다른 곳과 달랐다.
‘생각보다 멀쩡하잖아? …안개 때문인가?’
여기까지 오며 거쳐 온 곳들. 이를테면 라임드리나 바이코서스는 과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특히 바이코서스는 터만 간신히 남아서 그곳이 한때 성이었는지 운동장이었는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베르보니아는 수천, 수만 채의 건물이 여전히 땅을 딛고 서 있었다. 세월의 풍화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그게 멀쩡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구먼.’
이곳은 굉장히 을씨년스러웠다. 건물은 반파된 것이 8할 이상이요, 불에 그을린 흔적이나 벽면에 번진 피도 심심찮게 보였다. 괜히 날도 우중충해 보였다.
쉽게 말해 흉가라도 온 듯했다. 비약 조금 보태자면 길바닥에 시체 몇 구쯤 굴러다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로, 로드시여! 저기!」
도르마가 깜짝 놀라며 한쪽을 지목했다. 잠시 정신을 팔고 있던 고병갑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덜컹거리며 짧게 비명이 울렸다.
「왜, 왜!? 뭔데?」
「아이구…….」
도르마가 목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저기 좀 보십시오. 백골이 있습니다.」
「백골?」
정말이었다. 정말로 백골이 있었다.
‘그’는 무너진 건물에 하반신이 깔린 몰골이었다. 앞으로 뻗은 손에선 죽을 당시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고병갑은 백미러를 통해 메리린의 상태를 살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표정이 썩어 있었다.
…사실 이번 여행 간 그녀의 표정이 좋았던 적이 거의 없긴 했다.
그들은 백골을 살피려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욱한 피 내음이 코를 찔러 왔다.
그때 메리린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로입니다.」
「뭐가?」
「그날, 아스빌람에 피바람이 몰아쳤을 때와 같은 풍경입니다. 이 끔찍한 피 냄새까지 말입니다. 모두… 모두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날의 아픔, 그날의 절망, 그날의 공포가 아직도 베르보니아에 가득히…….」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윽고 거대한 분노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눈동자가 타오르는 듯했고, 이는 빠드득 갈렸다.
「육시랄 것들, 저주받을 것들! 아스빌람을… 베르보니아를 잘도 이런 꼴로 만들다니.」
「메리린.」
「그것들은… 그것들은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죽여서 피와 살을 갈아 마셔야 합니다! 죽은 동족의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야! 메리린!」
고병갑이 버럭 고함치자 그제야 메리린의 눈빛이 돌아왔다. 그녀가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네?」
「너 좀 흥분한 것 같다. 차로 돌아가.」
「아… 죄송합니다.」
메리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차로 돌아갔다.
‘옛날 생각이 나는가 보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베르보니아는 참사 당시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로선 변고를 당한 현장에 온 셈이리라. 감정이 격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고병갑과 도르마는 백골의 상태를 살폈다. 달리 건질만 한 정보는 없었다. 그냥 백골이었다. 사라온의 것으로 추정되는 하얀 뼈.
「나중에 애들 몽땅 끌고 한번 와야겠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이 사라온들 묻어 줘야지. 이렇게 놔둘 수는 없잖아.」
「아…….」
「지금은 따로 할 일이 있어 마뜩잖지만 나중에라도 여유가 생기면 날 잡고 묻어 주자.」
「역시 로드께선 사려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됐어, 사려는 무슨. 그냥 사람 된 도리를 하는 거지.」
고병갑과 도르마가 차에 올랐다. 그러자마자 메리린이 말했다.
「로드시여, 저기로 가야 합니다.」
그녀가 몸을 쑥 내밀며 한쪽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타고 가자 높다란 첨탑과 내성이 보였다. 내성의 규모만 해도 발타드렌급은 될 듯했다.
「뭔가 떠오른 게 있는 거야?」
「네, 저기로 가야 합니다.」
「알았다. 저리로 가자.」
고병갑은 순순히 차를 몰았다. 목적지까지 가는 데 끔찍한 광경은 몇 번이고 더 등장했다.
깔려 죽은 백골, 타죽은 백골,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간 백골 등등.
그는 주기적으로 메리린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가 아까처럼 흥분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마치 인형인 양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략 20분을 꼬박 서행하자 내성에 닿을 수 있었다.
메리린은 내비게이션 역할을 자처하며 방향을 알려 주었다. 이쪽이다, 저쪽이다. 고병갑은 시키는 대로 차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열댓 번 핸들을 꺾으니 미사일이라도 맞은 듯한 비주얼의 궁정에 다다를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그래, 내리자.」
고병갑은 차에서 내린 뒤 습관적으로 주변 기척을 감지했다. 특별한 생명 활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멀쩡했으면 으리으리했겠군.’
궁정은 정말이지 장엄했다. 발타드렌에도 큰 규모의 사원이 있다만 그것과 비교해도 갑절은 더 컸다.
무너진 틈새로 보이는 거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메리린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우리도 가자.」
「예, 로드시여. 그나저나 여기에 무엇이 있을까요? 뭔가 예상가는 게 없으십니까?」
「글쎄다, 내가 어떻게 알겠냐?」
메리린은 ‘아스빌람의 부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할 뿐 정확한 정체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뭐, 전설의 무기나 그런 것 아니겠냐? 너야말로 뭐 짐작되는 거 없어?」
「흠… 글쎄요.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아, 전설의 무기라고 하시니 전설의 비급서 같은 것일 수도 있겠군요.」
「오, 그럴 수도 있겠다. 최상급 교본 같은 거려나?」
고대의 상점에 있는 교본 중 가장 높은 급은 ‘상급’이다.
다시 말해 상급 교본만큼만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이곳에 ‘최상급 교본’ 같은 게 있다면 강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로드시여, 이쪽입니다.」
「어, 그래그래. 가고 있다.」
메리린은 저만치 앞서 나갔다.
그녀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달려 나가고, 다시 두리번거리다가 달려 나가고를 반복했다. 뭔가 알기는 아는 모양이다.
전설의 무기, 전설의 비급서, 보물 지도, 막대한 재화, 심지어 경국지색의 미녀까지.
고병갑은 도르마와 함께 온갖 추측을 늘어놓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30분 넘게 이동한 끝에 그들은 어떤 넓은 공간에 도착했다.
「여기입니다.」
메리린이 고병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고개와 눈을 돌리며 공간을 살폈다.
‘뭐야? 뭐 하는 곳이야?’
마치 입주 전 빈집처럼 휑한 곳이다. 홀의 중앙엔 2미터쯤 되는 기둥이 원을 그리며 박혀 있었다. 기둥이 그린 원 안에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단상이, 단상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거대한 석관이 올려진 상태였다.
메리린이 기둥 앞에 서서 석관을 가리켰다.
「로드시여, 저 안에 아스빌람을 부흥시킬 열쇠가 있습니다. 어서 열어 보십시오.」
「로드시여, 한번 가 보시지요.」
「그래, 가 보자. 그나저나 크기가 꽤 되는가 본데? 트레일러에 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병갑은 아무 생각 없이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가 막 원의 영역에 진입한 순간이었다.
메리린이 도르마의 옷깃을 붙잡으며 동시에 고병갑의 등을 밀쳤다.
“우왁!?”
고병갑은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엉덩방아 찍었다.
「아닛!? 로, 로드시여, 괜찮으십니까!」
「야, 너 방금…….」
고병갑이 눈에 물음표를 띄우며 메리린을 올려 보았다. 도르마는 분노와 당황이 뒤섞인 표정으로 메리린을 쏘아보았다.
「네년이 정녕 미친 거냐! 감히 로드의 등을 밀치다니! 이이… 당장 이거 놓지 못해!」
도르마는 당장 고병갑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메리린이 도르마를 단단히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병갑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부하가 자신을 밀쳤다는 것에 충격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너… 우냐? 왜 울어?」
메리린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얼굴은 슬픔으로 잔뜩 일그러졌고, 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역정을 질러 대던 도르마도 그녀의 눈물을 보자 멈칫했다.
「로… 로드… 흐윽!」
「…….」
메리린이 흐느끼며 입을 뻐끔거렸다. 목이 막혀 말을 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뭐 나쁜 기억이라도 떠오르는 거냐? 울지 말고 내게 말해 봐.」
고병갑이 달래는 투로 말했다.
그가 무릎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메리린이 간신히 말했다.
「흑! 로드시여… 죄송합니다. 저를… 저를 절대 용서치 마십시오!」
「야야, 됐어. 고작 밀친 거 가지고 무슨… 음?」
그 순간이었다. 사방에 박혀 있던 기둥이 빛을 뿜었다.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도 함께 발광했다.
「뭐, 뭐야 이거? 무슨―읍!?」
보이지 않는 손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잡아챘다. 힘으로 떨쳐 내려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이내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다.
입에선 끊어질 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 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악!!」
「로드시여!? 이거 놓아라! 감히 무슨 짓을 한 게냐!」
「안 돼! 너는 들어가면 안 된다고!」
메리린은 거의 도르마를 끌어안았다. 도르마는 그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소리만 꽥꽥 질러 댈 뿐이었다.
「로드시여! 로드시여! 이 마귀 같은 년! 죽여 버릴 테다! 죽여 버리겠어! 이거 놓아라!」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악!」
「로드시여! 빠져나오십시오, 로드시여!」
빠져나오긴 무슨! 고병갑의 몸이 속절없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의 명치 부근에서 영롱한 구슬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환한 빛을 뿜어내는 그것은…….
그랬다. 고블린 로드의 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