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97화 (97/151)

97. 성지로 향하다

“우어어어어어어―!!”

티탄의 주둥이로 불기둥이 치솟았다. 놈은 얼굴과 목을 벅벅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 손을 입에 쑤셔 넣는 둥 어떻게든 불을 꺼트리려 했지만 기름과 정령이 만들어 낸 화염의 조합은 막강했다.

「허… 정말로 해내다니. 저들의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쿤타는 보고도 믿지 못했다.

-저놈의 주둥이에 기름을 들이붓겠습니다. 그러면 꺼지지 않는 불을 피워 주십시오.

아까 고병갑이 찾아와 한 말이다. 솔직히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오금이 저린데 놈을 타고 올라 기름을 붓겠다니.

그런데 저들은 정말로 해냈다.

신호를 받은 이프리트들은 수명까지 깎아 가며 최고 위력의 불덩이를 쏘아 냈다. 그 모양새가 흡사 운석 같았다.

「불이 번졌다! 화력을 모아라!」

「불길을 따라가!」

「잡을 수 있다! 티탄을 잡을 수 있어!」

불의 정령들은 필사적으로 권능을 부렸다. 화점(火點)이 한 번 잡히니 힘쓰기는 수월했다.

“우어어! 우어어어―!”

티탄이 마구 발을 굴렀다. 불길은 입과 목을 지나쳐 몸속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어… 어어! 너, 넘어온다!」

「우왁!」

한순간 티탄이 비틀거리더니 앞쪽으로 쓰러졌다. 티탄과 성벽 간의 거리는 꽤 됐지만 머리 위가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쿠르릉!

땅이 무지막지한 소리를 냈다. 사람으로 치면 비명 같은 것이었다. 지진이라도 난 듯 천지가 요동치자 정령 병사들은 넘어지지 않으려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다.

쿤타는 자욱한 먼지구름 틈에서 티탄을 보려 애썼다.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죽었다면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도 멎었을 테니.

곧 엎어진 채 버둥거리는 거인이 관측됐다.

「전원 티탄을 노려라! 이 자리에서 놈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쿤타는 그렇게 소리치며 본인도 권능을 끌어 올렸다. 바람의 정령인 그는 거센 돌풍을 일으켜 티탄의 머리통을 노렸다.

큰불이 바람을 만나자 몸집이 배로 커졌다.

다른 정령 병사들도 전력을 다해 공격을 쏟아 냈다. 무리한 권능 사용은 육신을 쇠약게 만들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성주 쿤타의 말마따나 이 자리에서 티탄을 물리치지 못하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공격은 성벽에서만 날아오는 게 아니었다. 반대편에선 고병갑 일행이 쉬지 않고 공격을 해댔다.

장담컨대 이 순간 전장의 모든 이가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들의 머릿속엔 단 두 가지 관념밖에 없었다.

죽이느냐, 죽느냐. 오직 그것뿐이었다.

총공세를 쏟아 내길 수십 분. 티탄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도 상처지만 내상이 치명적이었다. 놈의 속은 문장 그대로 까맣게 타들어 갔다.

티탄의 가슴께가 갈라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이윽고 놈의 육신이 잿가루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다.

「그마아안! 사격 종료!」

잔뜩 쉰 쿤타의 목소리. 정령들은 그 말을 듣고 사격을 멈추었다.

그들은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으스러지는 티탄을 지켜보았다. 헐떡이는 숨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뜨거운 정적 속에서 쿤타가 외쳤다.

「잡았다! 티탄을 잡아냈다!」

「…….」

「이제 쉬어라!」

철퍽!

쉬라는 말이 떨어진 순간. 합이라도 맞춘 듯 성벽 위 모든 정령 병사가 기절했다. 쿤타도 그들을 한 번 훑어본 후 정신을 잃었다.

정령들의 승전식은 이렇듯 고요하게 진행됐다.

* * *

티탄과의 전투가 있고 반나절이 꼬박 흘렀다. 어둑하던 하늘은 어느새 새파랗게 변했다.

무리하게 권능을 끌어냈던 정령 병사들은 반쯤 송장이 되었다. 몇몇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했다.

고병갑은 그들을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고 ‘골드 드래곤 고기’를 대거 사들였다. 그 고기는 원기 회복에 탁월하니 정령들의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효과는 확실했다. 사실 약(藥)적인 효능도 효능이지만 고기를 본 정령들이 그것을 먹기 위해서라도 삶의 끈을 놓지 않은 게 컸다.

그렇다고 사상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14명의 정령 병사가 기력을 전부 소진해 죽었다. 그들은 포션으로도, 경단으로도 살릴 수 없었다.

사실 티탄을 상대로 고작 14명 초상 치른 거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반 주민들은 성벽 보수와 뒷정리에 동원됐다. 일부는 널브러진 그러글을 싹 거두어들였다. 그걸로 뭘 하는가 봤더니 양지바른 분지에 넓게 펼쳐 널었다.

「저건 뭐 하는 겁니까? 말려서 먹으려고요?」

「…….」

쿤타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고병갑을 올려 보았다.

「아무리 먹을 게 없은들 그러글을 먹겠소? 미친놈이 아니고야…….」

「제가 아는 어떤 정령은 먹었다던데요?」

「당신이 아는 정령이 있소?」

「예, 저희 쪽 주둔지에 한 명 있습니다.」

「혹시 어떤 정령인지 말해 줄 수 있소?」

「종을 말하는 겁니까? 자기 말로는 니피라고 하더군요.」

「니피? 허어, 개념을 다루는 정령이라니. 꽤 진귀한 존재를 데리고 계시는구려.」

‘진귀한가?’

생각해 보면 확실히 귀한 존재긴 하다. 그녀가 없다면 발타드렌의 식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테니까.

「그 친구가 당신들을 봤으면 되게 좋아했겠군요. 동족을 그리워하고 있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그러글은 왜 말리는 겁니까?」

「말리는 게 아니라 나무를 키우려는 거요. 그러글 시체 위에서 나무가 싹튼다는 건 알고 있소?」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가끔은 작은 짐승도 나오더군요.」

「그렇소. 우리는 그러글 시체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소이다. 놈들을 생으로 잡아먹는 것보단 여러모로 얻는 게 많지.」

쿤타는 이내 씁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그렇다 한들 식량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소. 얼마 전에는 보름 내내 나무껍질만 벗겨 먹었더랬지.」

「유감이군요.」

「당신은 좋으시겠소? 아까 보니 허공에서 고기를 막 뽑아내던데… 나는 정말 신이라도 재림한 줄 알았소.」

「하하, 이것도 공짜는 아닙니다. 상당한 양의 재화를 요구하거든요. 아까 사들인 고기만 해도 성벽 몇 채 값은 할 겁니다.」

「…서, 성벽 몇 채!? 혹시 우리에게 고깃값을 치르라고 할 작정이오?」

쿤타가 하얗게 질려 물었다. 고병갑은 실실 웃으며 손사래 쳤다.

「됐습니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죠.」

「…정말, 정말 고맙소.」

이날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당초 고병갑 일행은 오늘 떠날 계획이었다만 예상치 못한 전투로 인해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저녁에는 전날 약속한 것처럼 쿤타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발타드렌에 1,500 규모의 고블린 군락이 있고, 그곳을 이끄는 게 자신이라고 밝혔을 땐 쿤타가 크게 감탄했다.

고병갑은 쉬지 않고 발타드렌의 우수함에 대해서 늘어놓았다. 넉넉한 식량 사정, 튼튼하고 안전한 성벽, 많은 인구 등.

뽐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령들을 포섭하기 위한 밑밥이다.

「어떻습니까? 저를 따라 발타드렌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원하시면 정령들만을 위한 분지를 마련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흠…….」

「여기보단 거기가 나을 겁니다. 장담컨대 정령들을 착취하거나 과도한 과세를 물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향하니까요.」

쿤타는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긍정적이오. 아마 이 성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2,500리나 떨어진 그곳까지 이주해 갈 여력이 없소.」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도 제 쪽에서 해결하도록 하지요.」

「어떻게 말이오?」

「그건 생각을 좀 해 봐야겠죠. 그렇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겁니다.」

고병갑은 정령들의 잠재력을 높이 샀다. 품 안에 두면 분명 쓸데가 있으리라.

뭐… 비단 그런 속물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륙에 남은 지성체라 봤자 정령뿐이지 않은가?

좋든 싫든 그들과 공존해야 한다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현명하다.

「그럼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준비가 갖춰지면 사절을 보내든, 제가 직접 오든 하지요.」

「알겠소.」

치토산 합병에 관한 1차 논의가 그렇게 끝났다. 물론 아직은 구상 단계일 뿐이니 앞으로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향후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고병갑은 고블린과 정령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림이 꽤 괜찮았다.

이튿날이 밝았다. 고병갑 일행은 치토산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밀린 길을 나섰다.

성주 쿤타는 더 머물다 가라며 그들을 붙잡았지만 가야 할 길이 바빠 거절했다.

오후 6시 무렵에는 마지막 경유지인 헤르모니아에 다다를 수 있었다. 폐허가 된 성의 모습은 앞서 지나쳐 온 곳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베르보니아까지 단번에 가고 싶었다. 문제는 기름이 다 떨어졌다는 점이다. 설상가상 챙겨 온 기름은 티탄과 싸울 때 전부 써 버려서 무조건 지구에 들러야 했다.

「오늘은 내 집 가서 자고, 내일 베르보니아 찍자.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이따 데리러 올게.」

「알겠습니다.」

「예 로드.」

「한 삼사십 분 걸릴 거야.」

고병갑이 문을 넘어 지구로 갔다.

그가 떨어진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여행길에 나서기 전, 자가용을 아스빌람으로 넘겨 보내느라 왔던 곳이다.

그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용산구에 위치한 모 오피스텔까지는 금방이었다.

집에 도착한 그가 재차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도르마와 메리린은 멍한 표정으로 차 옆을 지키고 서 있다가 고병갑을 발견하곤 표정이 좋아졌다.

「아! 돌아오셨군요.」

「오냐, 둘 다 이쪽으로 넘어와.」

도르마와 메리린이 조심스럽게 문을 넘었다. 그들은 고병갑의 집에 들어온 첫 고블린이 되었다.

「어떠냐? 숨 쉬는 데 불편하거나 그렇지는 않아?」

「숨 말입니까? 저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나저나 굉장히 멋진 집이군요.」

도르마가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메리린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에서 놀라움이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 사셨던 거군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로드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냐?」

「예, 로드의 집으로써 손색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세라 내 집은 아닌데…….」

고병갑과 도르마가 별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메리린이 커다란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가 암막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서울 야경이 넓게 펼쳐지자 그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우와…….」

「어때, 기가 막히지?」

「네! 저는 살아생전 이렇게 반짝거리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저희가 지금 하늘에 떠 있는 건가요? 모든 게 저희 발아래 있군요!」

「여기가 꼭대기 층이거든.」

메리린은 한참이나 서울 야경을 내려보았다. 그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쟤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이날 고병갑은 현대 문명의 위대함과 한국 배달 문화의 우수함을 여실히 가르쳐 주었다.

짧은 밤은 금세 지나갔다. 그들은 이른 아침밥을 챙겨 먹은 뒤 곧장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메리린은 현대식 욕실과 헤어지는 게 어지간히도 아쉬운지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고병갑은 전날 밤 주유소에서 사 온 기름을 차에 주유했다. 완충된 차는 부드럽게 바퀴를 굴렸다.

방향도 땅도 곧았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었다.

그렇게 3시간쯤 거침없이 질주했을까? 그들은 발타드렌을 나선 지 나흘 만에 목적지인 베르보니아에 도착했다.

…아니, 도착을 목전에 둘 수 있었다.

메리린은 영문조차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도르마는 떨떠름한 얼굴로 넓은 영역을 훑었다.

「로드시여, 이건 설마 솜니움의 그것일까요?」

「흠,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다.」

고병갑이 뚱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안쪽으로 한마디도 진입할 수 없었다.

투명한 막 안쪽은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안개는 오랜만에 봐도 반갑지가 않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랬다. 베르보니아는 초기 솜니움처럼 안개에 휩싸인 상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