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성지로 향하다
「해를 세지 않은 지 오래됐소만 1,000년보단 더 됐고, 1,500년보단 덜 된 일이요. 그때는 내가 영계에 있었지.」
쿤타를 비롯한 정령들은 영계에서 살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영계를 벗어날 일은 어지간해선 없었다.
대저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은 자신이 태어난 차원 계층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법이니까.
특히 정령이란 정적(靜寂)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족속이었다. 그러니 지상계에서 온갖 지랄이 판쳐도 관심조차 없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쿤타는 별종이었다. 그는 호기심이 왕성했고, 격동적인 삶을 지향했다. 그가 지상계의 어느 인간과 계약을 맺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인간은 주술사였소. 지금은 이름조차 잊었지만 그녀가 인간들 사이에서 마녀라고 불린 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참으로 별난 여자였지. 어쨌건 나는 그녀와 함께 꽤 오랜 시간 여행했소.」
쿤타가 지상계에 내려온 시기는 사라온과 신성군 간의 전쟁이 막 끝날을 즈음이었다.
한때 대륙을 제패했던 사라온은 형편없이 쇠락했다. 변방으로 내몰려 송장 신세가 되니 더는 다른 아인들이 겁내지 않았다.
그리고 호랑이가 사라지자 굴을 차지하기 위해 이리들의 다툼이 시작됐다.
「또 전쟁이 벌어졌단 말입니까?」
「그렇소, 신성군이 물러가기 무섭게 연합군이 해체되더니 이제는 자기들끼리 치고받더구려. 기가 막혔지. 난 그네들이 피를 모아 바다라도 만들려 하는 줄 알았소.」
아인들의 전쟁은 300년 넘게 이어졌다.
그 300년간 사라온은 옛 위상을 완전히 잃었다. 그들은 이제 고귀하지도, 강인하지도,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그들을 부르는 명칭도 굴욕적인 별명인 ‘고블린’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들이 한때나마 위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나올 즈음엔 메리린과 도르마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쿤타가 둘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계속 말해도 되겠소?」
「문제없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마저 하겠소. 아인들은 그 시대를 전란의 시대라고 부르더구려. 내 개인적인 감상으론 난장의 시대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말이오. 뭐, 이름이야 무엇이 됐건 매일같이 창칼이 빗발치니 끝내 한 종족은 멸족해 버리더이다.」
「어떤 종족이 말입니까?」
「드워프였소.」
쿤타는 짧게 목을 가다듬은 후 설명해 주었다.
「드워프는 성격이 괴팍하긴 해도 피를 싫어하는 종족이었소. 하여 일찌감치 영역 다툼에서 발을 빼고 지하로 숨어들었지.」
「그런데 왜 멸족했습니까?」
「당신네 인간들 때문이오.」
「인간 때문이라고요?」
「인간들이 드워프들의 지하굴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거든.」
고병갑이 탄식했다. 쿤타는 피식 웃었다.
「땅굴에서 불길이 치솟으니 능히 하늘에 닿더이다. 숯덩이가 된 드워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는데… 무슨 지옥을 보는 듯했지.」
「…….」
「인간은 참 영리하더구려. 영리하니 영악할 수 있고, 영악하니 집요합디다. 그리고 집요함은 곧 잔혹함으로 이어졌소. 전란의 시대에서 승자는 누가 뭐래도 인간이었소.」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자부심을 느껴야 할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부하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큼흠흠!」
쿤타는 한동안 말은 쏟아 낸 탓인지 마른기침을 했다.
「도르마, 배낭에서 물 꺼내드려.」
「알겠습니다.」
도르마가 생수통을 건넸다. 쿤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받아들였다.
「한눈에 봐도 맑은 물이구려. 형편이 좋으신가 보오?」
「그래서 그 뒤는 어떻게 됐습니까?」
고병갑은 대답 대신 이야기를 재촉했다. 쿤타는 물을 몇 모금 마신 뒤에 씩 웃었다.
「어떻게 되긴. 아인 간의 자웅 다툼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혼란이 찾아왔소.」
아인들의 전쟁은 종결이라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미결이라도 하기 뭐한 상태로 수십 년간 유지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징후도 없이 악마가 출현했다.
악마.
키는 웬만한 거목보다 더 크고, 온몸은 칠흑 같다. 놈들이 두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면 한낮에도 밤이 내렸다.
악마는 긴 팔을 축 늘어뜨리며 지상이든 창공이든 가리지 않고 누볐다. 그리고 손에 채는 것은 뭐든지 집어삼켰다.
「맞습니다…….」
도르마가 작게 중얼거렸다. 녀석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맞다니, 뭐가?」
「저 말을 들으니 떠올랐습니다. 저희를 쫓던 것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거대하고 까맣고 기다랬습니다. …놈들은 하늘을 날다가 저희를 발견하면 매처럼 날아왔습니다. 단번에 저희를 낚아채곤 한입에 꿀떡 삼켰습니다.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르마는 과거를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공포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던 한순간 녀석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쿤타에게 물었다.
「한데 노장이시여, 그게 정녕 악마였습니까? 제가 알기로 악마는―」
「맞소, 본디 악마란 지하계에 서식하는 찌꺼기 같은 것이지.」
「그런데 어찌…….」
「도대체 악마란 게 뭡니까?」
고병갑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쿤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악마가 정확히 뭔지 아는 자는 이 세상에 없을게요. 다만 저자가 말한 대로 악마란 본래 나약한 존재였소. 아니, 나약하다는 표현조차 부적합하오. 놈들은… 이를테면 이끼 같은 것이었지.」
「이끼?」
「그렇소. 죽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지도 않은 것. 스스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덩어리. 그게 악마의 본질이오.」
고병갑은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그가 뭐라고 되묻기 전에 쿤타가 입을 열었다.
「그것들이 무슨 재주로 저들만의 형(形)과 자아를 갖추었는지는 나도 모르오. 사실 그건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외다.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온 지상계가 쑥대밭이 됐다는 거요.」
악마가 창궐한 이후 지상계엔 혼돈이 찾아왔다. 단어 그대로 혼돈이었다.
아인들은 필사적으로 대항했다. 하나 그 노력이 무색할 만큼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악마라는 포식자 앞에 아인은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다.
그런 극단적인 환경 때문이었을까? 아인들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너무도 끔찍한 변화였다.
「악마가 창궐하고 수백 년이 흘렀을 땐 무엇이 악마고 무엇이 아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소.」
「…주민들이 괴물처럼 변해 버렸군요.」
쿤타의 눈이 커졌다.
「알고 계시는구려.」
「예.」
얼마 전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직접 들은 말이니 알 수밖에.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수백 년이라고 하셨습니까? 고작 수백 년이요?」
생물이 환경에 따라 진화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백 년은 너무 짧았다.
그가 그쪽 방면에 무지하긴 했으나,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데 수백만 년이 걸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의문에 관해서 쿤타는 이렇게 답했다.
「글쎄올시다. 악마가 창궐한 그 순간부터 기존의 상식 따윈 아무 의미도 없어져서 말이오. 그때는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영 못 믿을 말은 아니었소.」
「…….」
「어쩌면 악마가 세계의 법칙마저 무너뜨린 것일지 모르지.」
악마는 수백 년간 지상계를 점령했다. 그동안은 쿤타도 영계로 피신했다.
그런데 또 어느 날. 악마들이 일제히 탈피하더니 영계까지 침범하고 들어왔다.
영계는 당연히 뒤집혔다.
사실 정령들도 아래 세계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태연할 수 있었던 건 악마의 손길이 영계까지 뻗쳐 오진 않을 거란 믿음 덕분이었다.
하지만 악마들은 보란 듯이 육신을 버리고 영계에 발을 들였다. 뒷얘기야 뻔했다. 또다시 무차별 살육이 시작됐다.
「정령들은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했소. 그 기나긴 시간을 그저 ‘존재’하기만 했던 대부분 동족은 항쟁이란 개념 자체가 없던게요. 그래서 발등에 불 떨어진 똥개 새끼마냥 지상계로 피신했지. 최소한 악마는 없을 줄 알았거든.」
확실히 악마는 없었다. 지상의 모든 악마가 육신을 버리고 영계로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들이 남기고 간 껍데기. 즉, 그러글은 여전히 건재했다. 또한 괴물이 돼 버린 지상계의 주민 역시 이쪽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정령들의 고달픈 지상계 일대기가 시작된 것이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미처 영계를 탈출하지 못한 정령은 모두 정기가 빨려 죽었다.
영계를 제패한 악마들은 멈출 줄 모르고 천상계를 침범했다. 그리고 거기까지 제집 안방마냥 꿰차버렸다.
고병갑은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지상계에 머무는 당신이 영계와 천상계의 상황을 어찌 아느냐?’가 그것이었다.
그 물음에 쿤타는 신 마드무트를 언급하려 했다. 그러자 고병갑이 얼른 제지하고 나섰다.
「잠깐!」
「…왜 그러시오?」
「도르마, 귀를 막아라. 아니, 잠깐 나가 있어.」
「알겠습니다.」
도르마가 순순히 물러갔다. 그제야 고병갑은 안심했다.
「이제 됐습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쿤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흠흠, 물론 악마들이 천상계로 진격하는 걸 직접 본 것은 아니오. 하지만 마드무트가 꽁무니를 빼고 지상계로 도망쳐 온 것은 보았지.」
「신이 도망쳤단 말입니까?」
「하! 어디 그뿐이겠소?」
고병갑이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쿤타는 목소리를 깔며 읊조렸다.
「그 무책임한 신 놈은 우리 정령을… 아니, 이 세계를 버렸소! 지상계의 아인들만 몽땅 데리고 차원 너머로 사라져 버린 거요!」
* * *
절대신 마드무트.
그는 아인―몬스터―을 이끌고 차원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고병갑은 이 대목에서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딥 임팩트는 자연재해가 아니었어. 누군가에 의해 계획된 범행인 거야.’
딥 임팩트의 배후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꽤 오래된 논쟁거리였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미지의 존재를 숭배하는 집단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육망교가 그랬다.
고병갑은 이날 육망교 신자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초월자’의 신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다. 초월자는 아무래도 마드무트인 듯했다.
‘아스빌람에서 도망친 마드무트가 지구에 몬스터를 뿌린다라… 대체 무슨 연유로?’
물론 놈의 의중까지 알 수는 없었다.
「뭐… 그 후론 별거 없소. 신이 세계를 버렸고, 남겨진 정령들은 아득바득 살아남았소. 그러글 놈들이 살아 있는 거라면 뭐든 아가리에 처넣고 보니 그리 윤택하게 살 수는 없었지만.」
「왜 영계로 돌아가지 않았죠? 영계에 악마가 남아 있을까 봐서요?」
잠자코 듣고 있던 메리린이 질문했다.
「그런 까닭도 있소만… 사실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돼 버렸소.」
쿤타가 그렇게 말하며 제 몸을 가리켰다.
「아인들이 괴물로 변한 것처럼 우리도 많이 변했소. 닭이 날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거요. 악마 놈들한테 혼과 육을 분리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할 판이오. 허허허.」
쿤타가 쓴웃음을 짓더니 몸을 일으켰다.
「내 이야기는 끝났소. 나도 듣고 싶은 게 많다만 밤이 너무 늦어 버렸구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을 듯한데 어떻소?」
고병갑이 시계를 확인했다. 모르는 사이 새벽 1시를 넘겼다.
그와 메리린도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좋소, 따라오시오. 머물 방으로 안내해 드리리다.」
그들은 오두막을 나섰다. 도르마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이야기는 끝난 겁니까?」
「응,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고생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고병갑 일행은 쿤타의 사택과 비슷한 오두막을 소개받았다. 그리 쾌적하진 않았지만 하룻밤 때우기엔 충분했다.
「그럼 푹 쉬시오.」
「덕분에 많이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쿤타는 간단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로드시여, 저쪽으로 넘어가실 겁니까?」
「아니, 저쪽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자.」
「예, 알겠습니다.」
그들은 빠르게 잠잘 준비를 마쳤다.
셋 다 저마다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할 이야기는 많았으나,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편히 주무십시오.」
「로드시여, 편히 주무시길.」
「그래, 너희도 잘 자라.」
오두막이 정적으로 채워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첫 번째 밤이 별 탈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창칼로 무장한 경비병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