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성지로 향하다
성벽 위로 사람처럼 보이는 인영이 여럿 있다. 그중 몇이 이쪽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앞을 가로막는 불의 장벽은 더욱 커졌다.
「제기랄!」
고병갑은 급히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빼냈다. 세상 어느 차주가 제 차에 불을 붙이고 싶겠는가? 다행히 차는 멀쩡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열불이 올랐다.
「성벽에… 누군가 있군요.」
반 박자 늦게 알아챈 도르마가 말했다. 고병갑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어, 다행히 그러글은 아닌 것 같네.」
「혹시 사라온이 아닐까요? 살아남은 동족들이 치토산에 모여든 것일 수도 있잖아요.」
메리린이 기대에 찬 목소리를 냈다.
글쎄, 고병갑은 회의적이었다. 지금 와서 사라온 군락이 나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는 일이다.
불덩이는 계속 날아왔다. 그러나 차체를 직접 맞추지는 않았고, 불의 장벽만 만들어 냈다.
저 불은 여러모로 신비했다. 불화살도 아니고 포탄도 아닌 순수한 불덩이다. 게다가 땔감도 없을진대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저희를 해하려는 건 아닌 듯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위협 사격 같아.」
「어쩌시겠습니까?」
「말이 통하는 족속이면 대화를 시도해 봐야지. 대뜸 불덩이 쏴 댄 건 괘씸하지만.」
고병갑은 안전띠를 풀며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나가서 저들에게 말을 걸어 보마. 너희는 그 틈에 트렁크로 가서 무장 챙겨.」
「알겠습니다.」
「예, 로드.」
「내리자.」
그들이 차에서 내렸다. 고병갑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앞으로 나섰고, 도르마와 메리린은 차 뒤로 향했다.
차를 비추던 빛줄기가 고병갑에게 집중됐다. 그는 눈부심을 참고 위를 올려 보았다. 내리쬐는 빛줄기 때문에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였다.
‘팔다리에 대가리가 달렸긴 하네.’
적어도 사람 비슷한 모습은 하고 있었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너희는 뭐냐? 정체를 밝혀라!」
미성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감탄하기도 잠시. 고병갑은 난감해졌다. 자신들은 뭐라고 소개해야 좋단 말인가?
도리어 너네는 뭔데 성을 차지하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하나 그랬다간 대화가 쳇바퀴만 돌 테니 적당하게 둘러대기로 했다.
「우리는 떠돌이 여행자다!」
「여행자?」
저쪽에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사이 도르마와 메리린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고병갑은 검을 전달받아 슬그머니 쥐었다.
「그 기물은 무엇이냐?」
「뭐, 이거?」
「그렇다!」
「이건 탈것이다. 말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라.」
또 저쪽에서 숙덕거렸다. 고병갑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우린 하루 머물 곳을 찾고 있다. 문을 열어 주길 바란다.」
「기다려라. 성주께서 오시는 중이다.」
저들은 그 말만 남기고 입을 닫았다. 그가 몇 차례 ‘너희는 뭐냐?’고 물었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대략 10분쯤 후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성벽의 요철 앞에 서서 한동안 아래쪽을 내려보았다. 얼마 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성문이 열렸다.
「들어오라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성문을 열어 줬겠지. 둘 다 차에 타. 무기는 들고 있고.」
「알겠습니다.」
그들 앞을 가로막던 불의 장벽이 마법처럼 사그라졌다. 고병갑은 그을음을 피해 천천히 차를 몰았다.
성문 안쪽으로 진입하니 양 가로를 채우는 병사들이 보였다. 저런 것도 병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논외로 치자. 한 가지 확실한 건 발타드렌의 병사들이 겉보기론 훨씬 나았다.
「로, 로드시여. 이들은?」
「어.」
이제야 성내를 채우는 이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병갑의 눈에도 상당히 익은 생김새였다.
사람을 닮았지만 묘하게 어색한 이목구비, 지나칠 정도로 큰 눈 덕분에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보이는 존재.
「정령이야.」
이들은 에아의 동족들이었다.
* * *
오래전에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났다. 대륙 어딘가 정령들이 모여 사는 왕국이 있다고. 설마하니 여행길에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왕국치고는 많이 빈약한 것 같네.’
사라온들의 옛 성, 치토산을 점거하고 있는 것은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나름의 질서와 규율을 갖춘 듯했고, 이 황량한 황무지 가운데서 그나마 문명 비슷한 걸 유지하고 있었다.
정령들은 고병갑 일행을 지척에서 보고는 경악했다. 기괴하게 생겼다느니 딱 봐도 그러글이라느니… 전반적으로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런 웅성거림을 잠재운 건 성주라는 작자였다. 물론 그도 정령이었다. 눈에 띄게 연로한 외모를 가진 정령.
「당신들은 정령이 아니구려.」
「보시다시피.」
「창칼을 거두어라. 위병들은 본 위치로 돌아가.」
그가 읊조리자 정령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성주는 차를 보고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여긴 마구간이 없소. 저 기괴한 탈것을 놔둘 곳이 마뜩잖은데.」
「그냥 저기 세워 둬도 됩니다.」
「말썽을 부릴까 우려되오만. 고삐를 채우지도 않았잖소.」
「말썽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얌전하거든요.」
「저 탈것이 난동을 피운다면 지체 말고 공격하라고 명할 거요.」
「좋을 대로 하시길.」
설마하니 시동 꺼진 자동차가 제멋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고병갑은 자신만만히 대답했다.
성주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오시오.」
성주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한 성의 지도자보다는 그냥 동네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성깔깨나 깐깐해 보이는 할아버지.
그가 안내해 준 곳은 나무로 만든 평범한 오두막집이었다. 응접실치고도, 성주의 사택치고도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본인들이 쓸 숙소를 안내해 준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내부에는 호롱불이 켜져 있었고, 책상엔 펼쳐진 책도 있었다. 성주의 사택이 맞았다.
「적당히 앉으시오. 본래 손님들에겐 극진히 대접하는 게 맞으나,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아서 말이오. 이해해 주면 고맙겠소.」
「괜찮습니다.」
고병갑은 대충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도르마도 별생각 없는 듯 근처에 앉았다. 메리린은 어딘가 석연치 않아 보였지만 얌전히 한쪽 구석에 착석했다.
성주는 의자를 끌어 다 앉으며 미간을 주물럭거렸다. 그가 무념 무상한 얼굴로 세 방문자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내 처음엔 과거의 망령을 보는 줄로 알았소만, 그대들은 명명백백히 살아 있구려. 실토하자면 내가 이제껏 쌓아 온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외다.」
고병갑은 깜짝 놀라며 즉시 말했다.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까?」
「알다마다. 인간과 사라온과 고블린이잖소. 사라온과 고블린을 구분 짓는 게 맞나 싶기는 하다만.」
고병갑은 물론이고 도르마와 메리린도 입을 헤 벌렸다.
‘이 정령… 사라온의 역사를 알고 있다.’
좌우지간 예사 정령이 아님은 분명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나 보군요.」
「꽤 오래 살았으니까. 그런데 오늘처럼 황당한 날은 처음이외다. 악마 새끼들이 지상계에 창궐했을 때도 오늘만큼 놀라지는 않았지.」
「조금 뜬금없지만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들을 성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테지.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소.」
「뭡니까?」
「이곳으로 오는 중에 티탄을 마주치지 않았소?」
「티탄?」
고병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이었는데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성주가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티탄을 모르시오? 산처럼 거대한 그러글인데.」
「아아, 그놈을 말하는 거군요.」
고병갑은 그제야 에아가 들려줬던 이야기를 상기시킬 수 있었다. 그러글 중엔 산만 한 덩치를 가진 그러글이 있고, 하도 유명해서 이름까지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병갑이 반응하자 성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티탄과 마주쳤소? 언제? 어디서!」
「진정하십시오. 놈과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참말이오?」
고병갑은 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도르마와 메리린에게 눈빛을 보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것보다 왜 우리가 티탄이란 녀석과 마주쳤으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서쪽에서 왔잖소. 얼마 전 티탄이 이곳을 지나쳐 서쪽으로 갔소.」
「썩 합리적인 추론입니다만, 저희는 정말 티탄과 마주친 적이 없습니다.」
성주는 잠시간 뜸을 들이다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미안하오. 당신들이 혹여 티탄을 끌어들일까 봐 우려되어 물어본 거요. 만약 그랬다면 나는 당신들을 내쫓아야 하지.」
「그리 두려워하시는 걸 보니 놈이 강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당연한 말을……. 티탄은 이 죽어 버린 대륙에 남은 마지막 재앙이오.」
「한데 티탄이 지나쳐 갔다는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는군요.」
성주가 얼굴을 굳히더니 끙 앓았다. 그가 한숨에 담아 말했다.
「놈에게 들키지 않으려 십수 명의 정령이 희생했소. 그 얘긴 그다지 하고 싶지 않구려.」
「뭐, 괜찮습니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고요.」
「솔직해서 좋군.」
성주가 피식 웃더니 책상에 놓인 책을 덮었다. 그리고 한쪽 책장에 꽂아 넣었다. 책장이라고 해도 책은 몇 권 없었다. 기껏해야 열 몇 권이었다.
그가 시선을 의식하고는 말했다.
「이 책은 전부 사라온들이 쓴 거요.」
「동족이!?」
메리린이 벼락같이 반응했다. 성주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그렇소. 전부 여기서 건진 것들이니까. …여기가 사라온의 옛 성이라는 건 알고들 있으시겠지?」
「알고 있습니다.」
고병갑이 대답했다. 성주는 ‘그럼 그렇지.’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연히 찾아온 건 아니시구려. 떠돌이 여행자라는 것도 거짓말일 테고.」
성주가 날카롭게 넘겨짚었다. 고병갑은 순순히 털어놓기로 했다.
「베르보니아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이곳 치토산이 그 경로에 있었고요.」
「호오, 베르보니아라.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고대 아스빌람의 수도일진대, 거기는 어쩐 일로 가시오?」
「할 일이 있어서 갑니다. 개인적인 거죠.」
「그렇소? 사실 뭘 하러 가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성주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구려. 나는 이 성의 성주 노릇을 하는 쿤타라고 하오.」
「고병갑입니다. 이쪽은 제 부하인 도르마와 메리린이고요.」
도르마와 메리린은 간단히 묵례했다. 성주 쿤타의 눈이 커졌다.
「부하라고? 이거 참, 당신들에 대해 더 궁금해지는구려.」
「상호 간에 궁금한 게 많으니 잡설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는 거 어떻습니까?」
「나야 좋소만, 당신들은 어떠시오? 행색을 보니 여행길이 그리 고되지는 않은 듯한데, 그래도 피곤하지 않소? 밤도 늦었고.」
물론 피곤하기는 했다. 무려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운전하지 않았던가. 몸도 마음도 어서 수면을 원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그 모든 피로를 이겨 냈다. 그가 부하들을 보고 물었다.
「도르마, 메리린. 많이 피곤해? 피곤하면 오늘 밤은 쉬도록 하고.」
「제가 피곤할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온종일 한 거라곤 앉아 있던 것뿐인데 말입니다.」
「저도 괜찮습니다. 저희보단 로드께서 피곤하지 않으신지요.」
메리린의 입에서 로드라는 말이 나오자 쿤타가 몸을 움찔 떨었다. 고병갑은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어깨를 으쓱였다.
「들으셨다시피 괜찮다는군요.」
「뭐… 당신들이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겠지. 그래, 당신네가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이오?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말해 주리다.」
「이 땅에서 벌어진 일들.」
고병갑은 바로 대답했다.
「이 땅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알고 싶습니다.」
「…역사를 알고 싶다 이 말인 게요?」
「그렇습니다.」
「흐흐흐.」
쿤타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가 의자를 끌어 고병갑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당신, 상대를 참 잘 골랐소. 이 늙다리가 아는 거라고 해 봐야 고리타분하고 하잘것없는 옛이야기뿐이니까.」
쿤타가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