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93화 (93/151)

93. 성지로 향하다

고병갑의 새 자가용이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초원과 사막의 중간쯤인 들판은 황량하기 그지없었고, 이렇다 할 생명체도 없었다. 다만 차체 뒤로 먼지구름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조수석엔 도르마가, 뒷좌석엔 메리린이 앉았다. 트렁크와 트레일러엔 보름 치 식량과 여벌의 의복, 무기와 기름이 적재돼 있었다.

「끝내 도란은 놓고 오셨군요.」

도르마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불쑥 말을 건넸다. 고병갑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덤덤히 답했다.

「걔까지 데리고 나오면 성은 누가 지키겠어.」

「불만이 많아 보이던걸요?」

「삐치라지, 뭐.」

고병갑은 잠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켰다. 벌에 쏘이기라도 한 듯 두 볼을 부풀린 도란이 자기도 데려가면 안 되냐고 사정사정했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도란이랑 도르마 둘 중 한 명만 데리고 가라면 도르마지.’

메리린은 길잡이를 시켜야 하니 반드시 있어야 한다. 둘만 가면 허전하니 부하 한 명을 더 대동한다면 볼 것도 없이 도르마다.

물론 도란과 동행하면 적어도 귀가 심심한 일은 없을 터다. 그래도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 봤을 때 도르마만큼 함께 다니기 편안한 녀석이 없었다.

「후딱 끝내고 돌아가자.」

고병갑은 그렇게 말하며 백미러를 흘끔 곁눈질했다. 메리린은 먹구름이라도 낀 것 같은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성을 나설 때부터 줄곧 저 표정이었다.

‘쟤는 왜 저런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에 가자고 노래를 불러 대더니만.’

소풍 앞둔 초등학생마냥 펄쩍펄쩍 뛸 줄 알았건만. 하여간 종잡기 힘든 유형이다.

「메리린, 너 왜 얼굴이 그렇게 어두워? 배 아프냐?」

메리린이 몸을 움찔 떨더니 시선을 돌렸다.

「네? 뭐라고 하셨나요?」

「왜 표정이 안 좋냐고.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아니요, 그냥 속이 좀 메슥거려서…….」

「아, 멀미하는구먼.」

하기야 생전 차를 타 본 적 없는 촌놈이니 멀미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병갑은 조수석 쪽 글로브 박스를 눈짓하며 말했다.

「도르마, 네 앞에 저거 열어 봐.」

「어… 이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손잡이 누르면서 당겨 봐. 그럼 열릴 거야.」

「오오, 정말이군요.」

「유리병 하나 있지?」

「예.」

「그거 메리린한테 줘.」

도르마는 시키는 대로 했다. 메리린은 멀미약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엇인지?」

「속 괜찮아지는 약이야. 따서 마셔.」

「아… 괘, 괜찮습니다. 저 때문에 그런 귀한걸…….」

「귀하긴 무슨. 됐으니까 마셔.」

「…잘 먹겠습니다.」

메리린이 멀미약을 삼켰다. 별로 입맛에 맞지는 않아 보였지만.

차는 한동안 달렸다. 발타드렌을 벗어난 지 2시간 하고 15분째가 지나고 있었다.

고병갑은 잠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자동차에 내장된 나침판을 확인했다.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그가 창밖 풍경을 넓게 훑더니 내려 버렸다. 도르마와 메리린이 그 뒤를 따랐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 해 봤자 듬성듬성 솟은 모래 언덕이 전부였다.

뒤쪽, 그러니까 북쪽 방면에는 산맥도 있고 바위 협곡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행할 방향은 남동쪽이었다.

「메리린.」

「네, 로드.」

「미안한데 한 번만 확인해 보자.」

「알겠습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펑퍼짐한 외투를 벗었다. 곧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드러났다. 문신으로 빼곡히 채워진 상반신이.

‘내 생각보다 축척이 더 세밀한 건가?’

그가 이정표로 염두에 둔 것은 진행 경로에 있는 네 개의 성이었다.

라임드리, 바이코서스, 치토산, 헤르모니아, 이 네 개의 성을 지나치면 마지막으로 베르보니아에 닿는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이맘때쯤 라임드리에 닿아야 했다.

「발타드렌에서 베르보니아까지 거리가 얼마라고 했더라.」

「일류 기수가 말을 바꿔 가면 보름, 평범한 전령을 보낸다 치면 한 달하고 닷새쯤 걸렸습니다.」

「흠.」

고병갑은 말을 타고 한 달을 달리면 몇 킬로나 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제까지는 어림잡아 800킬로 정도 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어쩌면 예측보다 더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보름 치나 되는 식량을 싸 온 거기도 하고.

「됐어, 옷 입어.」

「예.」

메리린이 다시 외투를 걸쳤다. 그들은 다시 차에 올랐고, 부지런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운전을 시작하고 담배를 다섯 개비나 태웠다. 고병갑은 그만큼 마음이 착잡했다. 그건 첫 번째 이정표인 라임드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뭐… 화성을 보는 것 같네.’

그는 어릴 적 과학 잡지에서 화성의 실제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거기에 화성인들이 사는 문명화된 도시 따위는 없었다.

행성의 태동이 완전히 멈춰 버린 탓에 땅은 죽었고, 강은 메말랐다. 아스빌람도 그에 못지않았다.

차를 타고 좀 가다 보면 낫겠거니 했지만 사막과 초원에 경계에 걸친 메마른 땅은 계속됐다.

‘이래서야 수십 년이 걸린들 이곳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 수 있을까?’

발타드렌. 그 한정된 영역을 옥토로 만드는 데까지도 3주 남짓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이 방대한 땅을 다 탈바꿈시키려면 일평생도 부족할 듯했다.

하나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해 줄 신묘한 것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썅!」

그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아닌 밤의 홍두깨처럼 튀어나온 것은 그러글이었다.

이곳에 즐비한 버섯 모양 바위에 가려 미쳐 보지 못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꾸벅꾸벅 졸던 도르마와 메리린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러글이야.」

고병갑은 대꾸하며 사이드미러를 주시했다. 다행히 들이받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젠장.」

그러글이 트레일러를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 손아귀 힘이 어찌나 좋은지 시속 80km로 내달리고 있는데도 떨어질 줄 몰랐다. 오히려 슬금슬금 올라타는 중이다.

트레일러엔 기름을 비롯해 차량 정비 도구가 들어 있다. 저대로 놔둬선 안 될 일이었다.

그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대꾸할 틈도 없이 메리린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맹수 같은 기세로 그러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글은 흡사 개구리처럼 생겼는데,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그 안에서 십수 갈래의 촉수를 쏘았다.

메리린은 칼도 뽑지 않고 팔만 휘둘러 촉수를 모조리 베어 냈다. 그 뒤 한달음에 접근해 미간을 뚫어 버렸다.

촤악! 그녀가 팔을 거두자 그러글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모든 일이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 끝났다.

「잘… 싸우는군요.」

「그러게. 쟤가 싸우는 건 또 처음 보네.」

메리린은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차로 돌아왔다.

「이걸로 닦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건네받은 헝겊으로 팔을 닦아 낸 후 차에 올랐다.

그때였다. 버섯 모양 바위 뒤로 다른 그러글들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이 귀신 같은 놈들은 정말이지 귀신처럼 나타난다.

메리린은 다시 튀어 나갈 것처럼 굴었다. 고병갑이 얼른 제지했다.

「됐어, 나가지 마.」

「네? 하지만…….」

「어차피 못 쫓아와.」

그가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글들은 차를 뒤쫓긴 했지만 아주 빠르게 멀어졌다. 제깟 놈들이 아무리 빨라 봤자 차만큼 빠르지는 못한 것이다.

「괜찮겠습니까?」

도르마가 점점 더 작아지는 그러글을 돌아보며 물었다. 고병갑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걱정할 거 없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메리린, 어디 다친 곳은 없냐?」

「네, 문제없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냄새가 좀…….」

그녀가 자기 팔에 대고 코를 킁킁거렸다. 아주 잠깐 몸을 맞댔을 뿐인데도 썩은 내가 옮은 모양이었다.

도르마를 통해 클렌징용 물티슈를 건네받은 그녀가 팔을 벅벅 닦아 냈다.

고병갑은 빠르게 버섯 바위 지대를 벗어났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덧 출발한 지 4시간이 다 된 것이다.

‘적당한 곳에 차 세우고 밥 먹어야겠네.’

그는 적당한 장소. 그러니까 갑자기 그러글이 튀어나오지 않을 만한 곳을 물색하며 차를 몰았다.

조금만 더 가 볼까, 조금만 더 가 볼까 하며 15분 남짓 이동했을 무렵, 그는 꽤 높은 언덕 하나를 넘게 되었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펼쳐진 성 하나를 발견하게 됐다.

「아!」

「저긴?」

첫 번째 이정표가 되어 줄 라임드리였다.

* * *

「아아…….」

「충격이 큰 모양인데?」

「그런 모양입니다. 발타드렌과는 또 다르니까요.」

라임드리에 도착한 고병갑 일행은 그곳에서 단출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메리린은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기가 힘든 듯했다. 박살도 아주 개박살 나 버린 라임드리의 전경을 본 뒤부터 저랬다.

발타드렌과 비교해도 라임드리의 모습은 처참했다. 사람으로 치면 발목 윗부분이 싹 잘려 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라임드리는 제 부모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녀는 딱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유적이라도 좀 남아 있었으면 탐색을 해 볼 심산이었으나 그게 무의미해졌다. 그들은 지체 않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로 했다.

그 전에 지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고병갑은 손가락을 격자 삼아 대강의 거리를 환산해 보았다.

‘발타드렌에서 라임드리까지 4시간이 좀 더 걸렸어. 시속 80킬로로 줄곧 달렸으니… 이 정도가 대략 300킬로쯤 되는 건가?’

그의 손가락이 메리린의 가슴을 지나 명치에 향했다. 몸에 손이 닿으니 그녀는 조금 움찔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쨌든 옆구리를 타고 죽 나아가 끝내는 목적지인 베르보니아까지 닿았다. 그가 계산해 낸 거리는 다음과 같았다.

‘더럽게 멀구먼. 발타드렌에서 베르보니아까지 1,700킬로나 된다니.’

앞으로 1,400킬로쯤 남았겠구나. 어쩌면 오늘 안에 닿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그래도 큰 탈이 없다면 내일 저녁 무렵엔 닿으리라.

「전성기의 아스빌람은 엄청 넓었구나.」

고병갑은 운전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메리린이 반응했다.

「…위로는 설산에 닿고 아래로는 바다에 닿습니다. 가로로는 너무 길어 해가 저무는 날이 없었습니다. 제왕께서 대륙을 품 아래 두시니 대륙의 이름이 아스빌람이 되었습니다. 아스빌람은 하늘 아래 유일했습니다…….」

딱히 뽐내는 듯한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병갑처럼 혼잣말에 가까웠다.

차는 계속 달렸다. 몇 번은 험지가 나와서 차를 들어 옮겨야 했다.

그러글과의 접전도 서너 차례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보닛에 흠집이 나서 고병갑이 크게 슬퍼했다.

담배 한 갑이 동날 무렵엔 해가 저물었고, 해 질 녘엔 두 번째 이정표인 바이코서스에 도착했다.

「흠.」

「…….」

바이코서스는 라임드리보다 더 망가져 있었다. 예의주시하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으리라.

「바이코서스는 백만 아군과 백만 적군이 맞붙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여섯 번째 신성 전사 쟈샤스를 물리쳤다고 하지요.」

메리린은 짧게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터만 남은 곳에서 더 할 말도 없었다.

「로드시여, 어쩌시겠습니까? 슬슬 해도 저물어 가는데 이곳에서 숙영하실는지요?」

「아니, 아직 6시도 안 됐다. 다음 곳까지 가자. 그리고 잠은 내 집에서 잘 거야.」

「로드의 집에서 말입니까? 저희는?」

「당연히 너희도 같이 자야지.」

「어… 괜찮으시겠습니까?」

「안될 거 뭐 있냐. 집에 남는 방 많아. 아무튼 어서 타라.」

「예.」

평소에도 운전을 많이 하는 그였지만 정말 온종일 운전만 하니 좀이 쑤셨다. 그래도 꾹 참고 달렸다.

「이 탈것은 정말 대단하군요. 말을 달리면 십수 일은 걸릴 거리를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돌파하다니.」

줄곧 풀 죽어 있던 메리린이 웬일인지 활기를 띠며 물었다. 고병갑은 괜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사는 곳에 가면 이런 게 지천으로 널렸어. 흠… 이따가 내가 사는 곳 구경이나 좀 시켜 줄까?」

「정말인가요?」

「괜찮습니까? 저희가 나돌아다녀도.」

「도르마 너는 좀 힘들 수도 있겠다. 그런데 메리린은 후드로 귀만 가리면 문제없을 거야.」

「으음, 그럼 저는 안 되겠군요.」

「생각해 보니 메리린 네가 불쾌할 수도 있겠다. 거기 가면 사방이 인간이거든.」

「아…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저런 잡담. 이를테면 지구라는 세계의 생리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려니 캄캄한 밤이 되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0시를 넘겼다.

‘이거 안 되겠는데. 치토산까지 가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 버렸어. 적당한 데 차를 세우고…….’

그가 고개를 쑥 빼며 창밖을 둘렀다. 전조등의 불빛이 밝히는 영역이 아니면 한 치 앞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두 개의 라이트가 어떤 커다란 벽을 비추었다. 그러는가 싶더니 별안간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져 차 앞을 가로막았다.

펑!

「우왁!」

「뭐, 뭡니까!?」

「갑자기 불이?」

불이 떨어진 곳은 차로부터 다섯 걸음 앞이었다. 불은 삽시간에 번지더니 장벽을 만들었다.

「젠장! 불을 쏘는 그러글도 있단 말이야?」

「어떡하시겠습니까? 내려서 전투를… 음!?」

「윽! 빛이?」

차 안에 탄 셋이 동시에 눈을 가렸다. 전방에서 쏘아진 밝은 빛 때문이었다.

화염 장벽에서 오는 불빛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인공적인 불빛이었다. 마치 그가 가지고 다니는 고출력 랜턴 같은…….

고병갑은 부신 눈을 달래며 앞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것에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저 앞쪽 벽은 성벽이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 누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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