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92화 (92/151)

92. 그리고 고블린을 위한

4월 25일.

「자자, 가자!」

「옙!」

「가즈아!」

써레를 단 자이언트 고블린이 일제히 전진한다. 땅이 고르게 파이며 순식간에 밭고랑이 완성됐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농지 개간 작업을 하니 마련된 농토만 3천 평을 넘겼다.

성벽 밖에다 논밭을 구성하는 터라 아주 넓은 영역도 가꿀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위험부담도 존재했다.

「로드시여! 동쪽 숲에 그러글이 나타났습니다!」

「다들 일시 정지!」

고병갑은 큰 소리로 고블린들을 멈춰 세운 뒤 보고하러 뛰어온 경비병을 돌아보았다.

「그러글이 나타났다고? 규모는?」

「파악 중입니다만, 대략 오륙십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오륙십이라.」

그는 무덤덤했다.

「도란한테는 보고했어?」

「아! 로드께 우선 말씀드리고…….」

「이봐, 홉 친구.」

「옙!」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제 경비에 관한 건 도란에게 제일 먼저 보고하라고. 걔가 경비대장이잖아.」

「그, 그렇습니다.」

「돌아가. 가서 도란에게 물어봐. 성벽 밖에 나가 있는 인원들을 내성으로 들일지, 아니면 그냥 작업하게 놔둘지. 답변 들으면 다시 와.」

「아, 알겠습니다!」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갔다.

고병갑은 작게 한숨 쉬었다.

「고붕이 보고 싶네.」

「로드시여, 저희는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오늘 안에 이거 다 심어야 하는구먼. 농땡이 그만 피우고 하던 거나 마저 하자.」

「예!」

수십의 고블린은 각자 한 고랑씩 도맡아 들여온 작물을 심었다.

고병갑은 이 고랑 저 고랑 돌아다니며 방법을 알려 주거나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아까 돌려보냈던 경비병이 다시 찾아왔다.

고병갑은 잠깐 허리를 펴며 물었다.

「도란이 뭐래? 내성으로 피신하래?」

경비병은 주뼛거리다가 대답했다.

「경비대장이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로드께선 염려하실 것 없다고 전해 드리랍니다.」

그제야 고병갑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5월 13일.

아스빌람에 새 식구가 찾아왔다.

인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블린도 아니다.

“메에에.”

“음머.”

“꺼꾸댁! 꺼끅! 꺼꾹!”

가축이다.

소, 염소, 닭을 다 합쳐서 500마리 정도 됐다.

「로… 로드시여, 이 많은 짐승을 다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어디에서 구하기는. 전부 돈 주고 산 거지. 내가 사는 세계에선 돈으로 못 사는 게 없거든.」

고병갑이 엄지와 검지를 맞대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가축들은 비스트 고블린의 인솔하에 우리로 들어갔다.

고병갑은 가축 사육을 전담할 인원을 50명 정도 뽑았다. 그리고 여물 쑤는 법이나 사료 만드는 법, 분을 모아 거름 만드는 방법 따위를 특강해 주었다.

「앞으로는 너희가 책임지고 가축들 관리해. 이놈들 산다고 나 돈 많이 썼다.」

「옙!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냐.」

고병갑은 우리에 들어찬 가축들을 쓱 훑어보다가 쩝 입맛을 다셨다. 뭔가 2% 부족했다.

“개나 몇 마리 들여올까?”

다음 날, 고병갑은 시장에서 산 잡종 믹스견 10마리를 아스빌람에 데리고 왔다.

5월 26일.

「오, 고붕고붕 고붕이. 오랜만이다?」

「허억, 허억. 로… 로드시여!」

문을 열고 들어온 고붕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작업하다가 로드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막 뛰어온 참이었다.

「언질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언질은 무슨. 내가 언제 그런 거 하고 오더냐?」

「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됐고, 이거나 받아라.」

고병갑이 종이 상자 하나를 넘겨주었다. 고붕이가 눈에 물음표를 띄우며 안을 들여보았다.

「이,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강아지잖아.」

「그런데 이것을 왜……?」

「얀마, 선물이라니까? 그냥 키우고 놀아.」

고붕이는 도통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고병갑은 녀석을 위해 ‘개는 귀엽고 충직하니 데리고 살면 기분이 좋아질 거다.’라는 기적의 논리를 선보여 주었다.

「이 산골에서 곡괭이질만 하려면 심심하잖아. 강아지들 보면서 기운 좀 내라는 거지.」

그렇게 말하니 고붕이가 잔뜩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천년만년 간직하겠습니다!」

「야야… 뭘 또 천년만년이야. 그나저나 요즘 지내는 건 어때?」

「헤헤,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고병갑은 고붕이와 마주 앉아 밀린 담소를 나누었다.

솜니움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참 정겹다. 알 수 없는 따뜻한 느낌이 있었다.

「뭐 부족하거나 필요한 건 없고?」

「예! 딱히 없습니다.」

「그래? 하기야 아까 보니까 다 잘돼 있더라. 애들 때깔도 좋고.」

「그렇습니다.」

「새로 온 녀석들은 어때?」

고병갑은 솜니움으로 보낸 킹 고블린들을 떠올리며 질문했다.

「음… 다들 잘 적응한 것 같습니다. 일도 앞장서서 열심히 하고 다른 동족들보다 똑똑해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다행이네. 글은 열심히 배우고 있고?」

「예! 점심 전에는 다 같이 모여서 글공부를 합니다. 모두 공부하는 걸 재밌어합니다.」

고붕이가 자랑스레 말했다. 고병갑의 입꼬리가 알게 모르게 올라갔다.

그는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연거푸 연기를 내뿜던 그가 후련한 말투로 말했다.

「후우, 알아서 잘 굴러간다니 이제 내가 없어도 되겠어.」

「저… 로드시여.」

「어, 왜?」

「왜 갑자기 떠나실 것처럼 말씀하십니까? 저는 조금 무서워졌습니다.」

고붕이가 우려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병갑은 몇 초간 녀석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얀마, 걱정할 거 없어. 앞으로도 한참은 너희 곁에 있을 거니까.」

「휴우…….」

「그래도 언젠가는 떠나긴 떠나야지.」

고붕이의 표정이 급속히 숙연해졌다. 고병갑 또한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야, 고붕아. 야속한 말이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너희 곁에 있어 줄 수는 없어. 내겐 바깥에서의 삶도 있으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가 퇴원하면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서 같이 살 거야. 헌터 일도 관둘 거고. 거기서 괜찮은 아가씨 있으면 결혼도 하고, 소소하게 텃밭이나 가꾸면서 사는 거지. 나름 괜찮을 것 같지 않냐?」

「예에…….」

고붕이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번뜩 고병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대비께서 병이 나으시면 함께 아스빌람에 오셔서 살면 되지 않습니까?」

「킥킥. 야, 우리 엄마가 너희를 보고 기절이나 안 하면 다행이겠다.」

「아…….」

「너무 울상짓지 마. 지금처럼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놀러 올 수는 있을 테니까.」

고붕이는 얼마간 뜸을 들이다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그것만 해도 좋습니다!」

「아, 그리고 엿새 후에 발타드렌에서 잔치를 열 거야. 그때 너희도 와.」

「잔치 말입니까?」

「딱히 대단한 건 아니야. 이제 6월이기도 하니 며칠 쉬면서 휴식 기간을 갖자는 거지. 맛난 거나 만들어 먹으면서 말이야. 다들 이제껏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

「고생은 로드께서 가장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됐어, 인마. 내가 뭘 했다고.」

「아닙니다! 로드가 아니셨다면 저희는 절대로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참… 하여튼 말은 잘한다니까.」

평소에도 입에 발린 소리를 많이 듣긴 하지만 오늘은 왠지 기분이 더 좋았다.

「아무튼 닷새 뒤에 내가 데리러 올게. 그때까지 자리 비울 준비를 해 놔.」

「옙!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솜니움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낸 고병갑은 해가 저물 즈음 그곳을 벗어났다.

낡은 경차를 몸을 싣고 어두운 거리를 지나는데 문득 고붕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를 모시고 아스빌람에 와서 산다라… 그것도 뭐, 나쁠 것 같지는 않네.’

공기 좋고 물 좋기로는 이곳만 한 데가 없다. 시골의 정취를 좋아하는 엄마도 분명 만족할 것이고.

한 가지 오점이라면 참한 색싯감이 없다는 정도일까?

‘아니지, 고블린 처자 하나 데리고 살면 되잖아? 여차하면 도란을 잘 키워서… 에휴, 내가 미쳤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실없는 생각을 5초 정도 하다가 헛웃음에 담아 날려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블린 와이프는 좀 그랬다.

* * *

엿새가 흘러 6월이 밝았다. 고블린들은 미리 공지받은 대로 분주히 잔치를 준비했다.

제일 바쁜 건 에아였다. 그녀는 주방의 총책임자였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온갖 요리를 만들어 댔다. 이를테면 식당의 로드인 셈이다.

솜니움에서 건너온 고블린들은 꼭 상경한 촌놈 같았다. 발타드렌의 위용을 감상하느라 넋을 잃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어쨌건 고블린들은 서로 도와가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물론 고병갑은 오늘도 그저 지갑을 열 뿐이었다.

“사장님, 여기 놔두면 되겠습니까?”

“예예, 다 거기 내려 주세요.”

“아유, 뭐 축제 같은 거라도 하나 봐요?”

“하하… 뭐 그렇죠.”

1.5리터 음료수 4천 페트.

500밀리 맥주 4천 캔.

피자 300판, 치킨 400마리, 족발 大 250접시.

다 해서 3천만 원 조금 덜 나왔다.

‘왕좌라는 건 비싸구나.’

과거 아스빌람의 식구가 100명 남짓할 때는 돼지고기 몇 근이면 충분했는데…….

잠시 그때가 그리워지는 고병갑이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꺄르륵!」

「꺄르르륵!」

고블린들은 넓게 둘러앉아 준비한 음식을 먹었다. 그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춰댔다.

맥주 몇 캔 뿌렸더니 다들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다.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일 텐데.

“에휴, 술은 괜히 먹였나.”

「로드시여, 여기 계셨군요.」

「어, 도르마?」

구석에서 분위기 잡으며 담배 한 대 피우려니 도르마가 다가왔다. 맥주 몇 캔에 취해 버린 쪼끄만 녀석들과 달리 도르마는 멀쩡했다.

「밥은 많이 먹었냐?」

「예, 실컷 먹었습니다. 한데 어찌 이곳에 혼자 계십니까?」

「그냥 바람이나 쐴 겸 나왔지. 너는?」

「허허, 저도 시끄러운 건 그다지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냐?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예.」

도르마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그는 왁자지껄한 저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읊조리듯 말했다.

「오랜만이군요.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잔치를 벌이는 것도.」

「그렇지. 전에는 종종 이런 시간을 가졌는데 말이야.」

「솜니움에 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도르마는 한 박자 쉬고 이어 말했다.

「가만히 시간을 돌아보면 지나쳐 온 나날들이 꿈만 같습니다.」

「음?」

「로드를 만나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야야. 낯간지러운 소리 하려거든 됐어. 사내놈들끼리 징그럽게.」

「허허허, 죄송합니다.」

도르마가 웃는다. 고병갑도 그를 따라 피식 웃었다.

「어! 로드다아아! 로오드으!」

그때 저 멀리서 뭔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도란이었다.

「…쟤는 왜 저러냐.」

「로드께서 주신 맥주란 음료를 한창 마시더군요. 취한 것 같습니다.」

「로드! 왜에 여기써요? 가치 놀아요오우앗!」

도란이 발을 헛디디더니 고병갑 품으로 쓰러졌다. 그가 혀를 끌끌 찼다.

「에헤헤헤! 넘어졌따아아.」

「나는 진짜 너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 도란아, 너를 어쩌면 좋니?」

「힝! 로드는 왜 맨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요오오? 나 섭섭해요오…….」

「뭐? 섭섭?」

「진짜 로드 나쁘다아아. 나는 로드가 좋은데에에… 흠냐.」

「도르마, 얘 안 되겠다. 데리고 가서 재워라.」

「예, 알겠습―」

「못생긴 바보는 가아아! 꺼져 버려어어!」

도란이 살쾡이처럼 으르렁대더니 고병갑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도르마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고병갑이 한숨을 내쉬며 도란을 안아 들었다.

「됐다, 내가 할게.」

「송구스럽습니다.」

「에이, 뭘 송구해.」

「로오드. 같이 놀아요오오.」

「…그냥 성벽 밖에 던져 버릴까.」

「그녀라면 저 상태로도 그러글 백 마리쯤 너끈히 잡아낸 뒤 성벽을 타고 올라올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고병갑은 도란을 안고 그녀의 거처로 향했다.

왁자지껄한 노름판을 벗어나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평소 그녀가 머무는 집의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간다.

그런데 안쪽이 밝았다. 누군가 등을 켜 놓은 것이다.

「너 왜 여기 있냐?」

「아, 로드시여.」

메리린이었다. 그녀는 텅 빈 집안에서 혼자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얘가 잔뜩 취해서 말이야. 재우려고 데리고 왔어.」

「앗! 죄, 죄송합니다. 제가 돌봤어야 하는데. 어서 이리 넘겨주시지요.」

「아줌마는 손 치워!」

「아, 아줌마!?」

「흠냐…….」

「놔둬, 내가 할게.」

고병갑은 우여곡절 끝에 도란을 이부자리에 눕혔다. 그녀는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메리린은 연신 죄송하다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나저나 넌 여기서 뭐 해? 밥은 먹었어?」

「네, 충분할 만큼 먹었습니다.」

「나가서 좀 놀지 그래? 오늘 같은 날까지 방 안에 틀어박혀서 이러고 있냐.」

「아… 저는 괜찮습니다.」

메리린은 다만 말을 얼버무렸다. 고병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도 도르마 과구나?」

「네? 그게 무슨?」

「별거 아니다. 아무튼 앞으로 며칠간은 계속 쉴 거니까 너도 푹 쉬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로드께서도 편히 쉬시길.」

고병갑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메리린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저… 저기 로드시여!」

「어, 왜?」

그녀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잠자코 지켜본다.

「그… 전에 말씀드린 것 말입니다.」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성지 베르보니아에 가는 것 말입니다. 거기에 관해서 따로 드릴 말씀이―!」

「아, 걱정 마, 걱정 마.」

고병갑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조만간 가려고 했어. 생각보다 발타드렌이 빨리 안정됐거든. 잔치가 끝나면 바로 가자.」

「그, 그러니까 드릴 말씀이…….」

「에헤이, 누가 옛날 사람 아니랄까 봐. 우리 쉬는 날까지 일 얘기 하지 말자고. 오케이?」

「아… 네. 알겠습니다.」

고병갑은 현관문을 나서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환히 웃었다.

「푹 쉬어라, 메리린.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

웃음이 만연한 잔치도 3일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솜니움의 고블린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발타드렌도 다시 평소의 일과를 시작했다.

다시 닷새가 흘렀다.

고병갑과 메리린, 도르마는 먼 여행길에 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