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고블린의, 고블린에 의한
「여기가 맞습니까?」
「어, 맞는 것 같다.」
아득한 암벽을 타고 올라 동굴 입구에 섰다. 건너편 경치를 내다보는데 눈에 익다.
비록 멋들어진 석양은 없지만 그때 그 장소가 맞았다.
「들어가 보자.」
「예.」
고병갑은 도르마와 함께 동굴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고출력 랜턴으로 앞을 비추며 천천히 진행한다.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는 여전했으나, 굴을 가득 채웠던 기척은 사라진 상태였다.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간다. 얼마 뒤 갈림길이 나왔다. 며칠 전 토벌대를 고비로 몰아세웠던 그 갈림길이었다.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그때와는 다르네.’
기척을 혼동케 하는 트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도르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펼쳐져 있던 주술이 해제되었군요. 로드께서 그때 그놈을 잡았기 때문일까요?」
「모르지. 끝까지 가 보자.」
「알겠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동굴은 던전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군데군데 풍화의 흔적이 보이긴 했으나 기본 틀은 변함없었다.
1시간쯤 흘렀을 때 그들은 보스 몬스터가 있던 방에 도착했다. 여기도 당시와 같은 모습…….
「아니야, 달라.」
「예? 다르다니요?」
「계속 긴가민가했는데, 역시 전투의 흔적이 없어.」
고병갑은 그날 치열했던 접전을 똑똑히 기억했다. 바닥이며 벽이며 다 갈라지고 부서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어떠한 전흔도 찾을 수 없었다.
‘몬스터들이 여기서 살았던 건 맞아. 던전에서 본 곳이 아스빌람인 것도 확실하고. 하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워.’
표본이 턱없이 부족하긴 하나, 던전은 ‘과거의 아스빌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기길 몇 분, 그는 과거 에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 지상계에 살았던 모든 종족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췄어요. 수백 년 전에 말이에요.
「도르마. 에아와 처음 만났을 때 걔가 했던 말 기억나?」
「어떤 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과거 지상계에 살았던 모든 종족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췄다는 거 말이야.」
「흐음… 그랬었습니까?」
도르마가 끙 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대답을 들으려 물은 것은 아니었다.
고병갑은 넓은 공간을 둘러보며 말했다.
「수백 년 전, 아스빌람에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일이.」
‘그리고 그 사건이 지구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고 말이야.’
29년 전 지구를 강타한 딥 임팩트.
여러 추론만 즐비할 뿐 딥 임팩트에 관해 인류가 밝혀낸 것은 거의 없었다. 그야말로 베일에 싸인 미스터리였다.
하나 고병갑은 이날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그 거대한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 * *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고병갑은 식사 중인 고블린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왁자지껄했다.
한편에선 하피가 끼어 밥을 먹고 있다. 녀석은 고블린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했다. 아니, 서로 무관심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어쨌건 이렇다 할 트러블은 없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저들이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불만인 게 아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 즉 몬스터 고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몬스터의 정체가 고대 아인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고병갑은 불쾌감에 시달렸다.
비약을 좀 보태면 고블린들이 인육이라도 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호기심에라도 몬스터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걸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식단을 바꿀 수는 없어.’
지금 당장 몬스터 고기의 보급을 끊는다면 고블린들은 며칠 내로 식량난을 맞이할 것이다.
물론 농사도 짓고 가축도 키우지만 그것들이 식탁을 차지하는 비율은 20%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차차 바꿔 나가야 해.’
그래도 바꿔야 했다. 비단 윤리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내가 영원히 돌봐 줄 수 없으니까.’
언제까지고 어미새마냥 먹이를 잡아다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블린의, 고블린에 의한 완전 독립의 아스빌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인간이면서 동시에 고블린 로드인 고병갑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그가 생각을 마치고 식당 내부를 둘렀다. 구석에서 도란과 함께 식사 중인 메리린을 발견하곤 그리로 다가갔다.
「메리린.」
「아, 네 로드. 무슨 일이십니까?」
「너한테 시킬 일이 있어서.」
「시킬 일이요? 무엇입니까?」
「여기서 얘기하긴 좀 그렇고, 밥 다 먹으면 내 거처로 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로드, 나도 가도 돼요?」
「그래, 같이 와.」
고병갑은 먼저 자신의 거처로 갔다. 얼마 뒤 메리린과 도란이 찾아왔다.
고병갑과 두 여인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시키실 일이라니, 어떤 것인가요?」
「메리린. 너 예전 힘을 되찾는다고 매일 뭘 하던데, 좀 어때?」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며 잠시간 뜸을 들였다.
「아직 운기를 더 취해야 하긴 하지만… 많이 호전됐습니다. 전성기 때의 6할 정도는 회복한 것 같습니다.」
「6할 정도라.」
고병갑은 문득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자신보다도 위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밤에 대련 따위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너 트로바틴이란 장수를 알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만다라 기사단으로서 그분의 존함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트로바틴과 전성기 시절 너를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해? 너도 명색이 부단장까지 맡았던 몸이라면서.」
그녀가 이번엔 눈을 껌뻑였다.
「그분의 위용을 귀로 전해 들은 게 다지만 그래도 그분이 훨씬 강할 겁니다. 애당초 그분은 아스빌람 역사상 최강의 장수셨습니다. 제왕이 아니라면 감히 대적할 존재가 없을 정도였지요.」
「흠, 그래?」
「혹시 시키실 일이라는 게 트로바틴 님과 관련된 것입니까?」
「그런 건 아냐.」
고병갑은 몇 초의 간격을 두고 이어 말했다.
「웬만큼 몸을 회복했다니 이제 고블린… 아니, 사라온들을 좀 봐줘.」
「봐 달라고 하심은?」
「녀석들한테 글을 가르쳐.」
「…글이요?」
현재 아스빌람에 글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고병갑, 도르마, 메리린, 바몬드.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30명의 킹 고블린들. 다 합해서 서른넷뿐이었다.
‘계몽의 씨앗을 심은 이후로 애들이 똑똑해지긴 했다만 그래도 없던 지식이 생겨나는 건 아니니까.’
현재 고블린들은 기껏해야 원시인 수준이다. 그리고 수준에 비해 과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건 전적으로 고병갑이라는 치트키 덕분이었다.
진실한 의미로 그들을 계몽하려면 학문을 갈고닦게 해야 했다.
「애들이 글을 몰라.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살아가려면 적어도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할 거 아냐.」
「맞는 말씀입니다. …잠깐. 도란, 혹시 너도 글을 모르는 거니?」
가만히 있던 도란이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게 뭐 어떻다고!」
「하아, 어쩜 그럴 수가. 너처럼 총명한 아이가 없었는데…….」
「시끄러! 배운 적이 없는데 어쩌라고!」
「도란, 조용.」
「앗! …네, 로드. 죄송해요.」
고병갑이 나지막하게 읊조리자 도란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무튼 편성은 내가 짜 줄 테니 앞으로 매일 애들한테 글을 가르치도록 해. 넓은 강의실도 마련해 줄게.」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시키실 일이란 건 그게 다인지요?」
「하나 더 있어. 오전엔 글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병법을 가르쳐.」
「병법… 말인가요?」
「응, 앞으론 네가 사라온들의 훈련을 전담해. 전문 병사도 차출하고 말이야. 쉽게 말하면 군대를 만드는 거지.」
그가 턱을 긁적이며 이어 말했다.
「흠, 지금 규모면 사오백 정도가 적당하려나? 그것도 네가 알아서 정해.」
「로, 로드! 애들 훈련시키는 건 제가 하고 있잖아요?」
「넌 그냥 애들 쥐어박는 거잖아.」
「읏!」
그냥 뚜드려 패기만 해도 교본 덕분에 성취율이 올라가긴 하지만 결코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다.
「네가 그래도 기사단 부단장이라니까 병법에 관해서는 우리 중 가장 해박할 거야. 나보다도 더.」
「로드시여, 자신을 낮추어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제왕이라면 언제나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두셔야 합니다.」
「됐어. 부족한 게 사실인데, 뭐.」
고병갑도 물론 쌈박질로는 전문가가 맞다. 하지만 선수와 감독은 엄연히 다른 분야다.
군인을 양성하는 거라면 메리린이 자신보다 뛰어나리라.
그가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로드로서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나는 여러모로 부족하거든. 그래서 너처럼 능력 있는 녀석들의 힘을 최대한 빌어야 해. 그렇게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아무튼 앞으로 병사 훈련에 관해서는 네가 로드다.」
「제, 제가 로드……?」
메리린의 눈이 잠깐 커졌다. 그녀는 몇 초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잘해 주리라고 믿으마.」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로드! 저한테는 더 시키실 일 없으세요?」
「없어. 너는 지금 하는 일 잘해 주고 있잖아. 그거면 족해.」
「아… 헤헤.」
칭찬을 들어서인지 도란이 배시시 웃었다. 고병갑은 슬쩍 시계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늦었네. 얘기는 끝났으니까 둘 다 나가 봐.」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안녕히 주무세요, 로드.」
두 여인은 문안 인사를 올린 뒤 고병갑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문을 나서는 메리린의 표정이 어딘가 복잡미묘해 보였다.
* * *
메리린과 바몬드, 그리고 몇몇 킹 고블린을 강사진으로 한 언어 수업이 시작됐다.
고병갑은 필기구 세트를 3,000개나 사들여 아스빌람으로 보급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공부방이라도 차리는 줄 알 것이다.
고블린들은 생전 연필이란 걸 잡아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어색해했다. 공부는커녕 ‘공부’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태반이니까.
그래도 로드의 명이 있으니 최대한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와중에 킹 고블린 다섯은 솜니움으로 보냈다. 그들은 거기서 글을 가르치고, 채굴 일도 도와줄 것이다.
고블린들이 글을 배운다고 골머리를 앓을 때 고병갑도 ‘배움의 고통’에 시달렸다.
그가 본업까지 팽개치고 배우는 것은 농사와 축산이었다.
‘군대 전역하고 각성자 판정받았을 때만 해도 내가 농사 공부 같은 걸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지.’
그때만 해도 평생 총만 쏘다 죽을 줄 알았다. 하여간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논과 밭 일구는 방법, 작물별 특성과 생장 환경, 수확과 보관 방법.
가축우리 짓는 방법, 가축별 특징, 사료 만드는 법, 교배시키는 법 등등.
“후우, 어렵네.”
농사와 축산을 무시한 적은 없다만 이렇게 어려울지도 몰랐다. 뭐가 이렇게 까다로운지, 원.
“이건 국보로 남겨서 대대손손 물려주게 해야겠다.”
그의 앞엔 빽빽이 적힌 필기 노트가 있었다. 한글이 아닌 아스빌람 언어로 적힌 것이었다.
그가 보람찬 얼굴로 노트를 내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먼 훗날.
그러니까 자신의 백골마저 진토되었을 즈음.
“그때 고블린들이 나라는 인간이 있었음을 기억해 줄까?”
잠깐 펜을 놓고 한 200년쯤 후의 미래를 그려 본다.
그 무렵이면 계몽의 씨앗이 굳건한 나무로 자랐을 테고, 고블린들은 옛 이름인 사라온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을 것이며 아스빌람은 과거의 번영을 되찾을 것이다.
“기억해 줬으면 좋겠네.”
고병갑의 바람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날이 왔을 때. 그저 한 명의 인간이 고블린들을 위해 땀 흘렸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초상화나 동상 하나쯤 남으면 더 좋고.’
그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펜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