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로드님 던전 가신다
던전에서의 하루는 바깥의 1시간이다. 그러니 전자시계의 타이머가 막 4시간을 돌파했어도 바깥을 기준으로 하면 10분 남짓밖에 흐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던전에 발을 들인 이상 이곳의 법칙에 지배된다. 헌터들은 10분어치가 아닌 4시간어치만큼 지쳤다.
“바깥에서 닷새면 여긴 4개월이죠. 그러니 겉으로 봤을 때 변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아아.”
“그래서 던전은 토벌 순위가 무조건 최우선이에요. 며칠… 아니, 하루만 놔둬도 위험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니까요.”
“그렇겠네요.”
정선경은 던전 1타 강사에 빙의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헌터들은 지루한 티는 조금도 내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공략 균열들 있죠? 보면 거의 다 던전이에요. 그런 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커서 공략할 생각도 안 해요. 지금 북한 가 있는 원정단도 마찬가지예요. 던전은 절대 안 건드리죠.”
“그럼 그냥 계속 놔두는 겁니까? 평생?”
이진열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정선경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꼭 그렇진 않아요. 1년에 몇 번, 국제 헌터 연맹 주도로 토벌하긴 해요. 거기 참여하는 헌터는 다 SS급이고요.”
“아… SS급.”
SS급이란 단어가 나오자 헌터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전 세계 통틀어 68명밖에 없는 SS급 헌터. 그들은 그야말로 밤하늘의 별 같은 존재였다.
“정선경 헌터님은 SS급 헌터들 만나 본 적 있으세요?”
“나요? 음…….”
그녀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몇 번 있기야 하죠.”
“누구요? 누구누구 보셨어요?”
“뉴욕에 있을 때 주로 봤는데, 제임스 카터랑 로빈슨 알피가 같은 동네여서 종종 봤어요. 또 누구 있더라? 아, 사츠키 류코도 본 적 있어요. 걔는 일본 여행 갔다가 봤는데 같이 밥도 먹었고요.”
“와아!”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때만큼은 고병갑도 한마음 한뜻으로 탄성을 흘렸다.
은연중에 그녀를 동네 누나쯤으로 생각했는데, 역시 사는 세계가 달랐다.
“혹시 고건룡이랑 서시희는 본 적 없으세요?”
과연 국뽕 없으면 못사는 한민족답게 한국 이름이 나왔다. 특히나 고건룡은 명실상부 지상 최강의 사내가 아니던가? 그의 이름이 언급만 돼도 어지간한 국산 헌터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 이게 K-헌터다!
아쉽게도 정선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 사람들은 나도 못 봤어요. 그리고 서시희 씨는… 아니다. 이 얘긴 안 하는 게 낫겠네.”
그녀가 말을 얼버무렸다. 헌터들은 뒷얘기가 궁금한 듯 보였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고병갑 헌터님은 SS급 헌터 본 적 있으세요?”
“저요?”
“네!”
갑자기 질문이 들어오자 고병갑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공격대원들은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토하자면 SS급은커녕 S급 본 일도 거의 없다.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 말하려니 어딘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저들을 실망시키면 안될 것 같았다.
“…저는 SS급은 본 적 없고, 전에 칼국숫집 갔다가 이소리랑 허길남 봤어요. 또 원정 가서 S급 헌터들 좀 많이 보고… 뭐, 그랬죠.”
“아… 그러시구나.”
“…….”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가 다급히 덧붙였다.
“저는 거의 혼자 일하거든요. 그래서 누구 만날 일이 잘 없어요.”
“아하하하. 그, 그러셨구나. 혼자 일한다니 대단하세요!”
‘뭐가 대단해, 시발. 그냥 입 다물고 있을걸.’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정선경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대며 웃기 바빴다.
그렇게 잡담 따위를 떠들며 진행하다 보니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정선경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오른쪽으로 가세요.”
“넵!”
공격대원들은 순순히 앞장섰다. 바로 이어서 고병갑과 정선경도 오른쪽 통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통로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잠깐!”
“잠깐 멈추십시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공격대원들은 즉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정선경 헌터님. 이, 이게…….”
“조용.”
정선경이 눈을 감고 오감에 집중했다. 고병갑은 매서운 눈매로 사위를 훑었다.
‘뭐지? 왜 기척이 사방에서 느껴지는 거야?’
흡사 수천 개의 거울로 이루어진 방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족히 수십의 방면에서 기척이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무슨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말이다.
쉽게 말해 머릿속 레이더가 먹통이 된 것이다.
“뭔가 이상해. …다들 나오세요. 왼쪽 길로 갈게요.”
일행은 즉시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이질적인 현상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들은 지체 않고 왼쪽 통로로 걸음을 돌렸다.
“아… 젠장!”
하지만 이번에도 똑같았다. 통로 안쪽으로 진입하면 좀 전과 똑같은 이상 현상에 시달려야 했다.
공격대는 졸지에 버뮤다 삼각지에 진입한 선박 신세가 되었다.
“미치겠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저… 정선경 헌터님. 그냥 길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뇨,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병갑이 대신 대답했다.
“이 던전이 얼마나 넓은지, 또 얼마나 꼬여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자칫하다 길이라도 잃으면 영영 헤맬 수도 있으니까요. 더구나 저희는 물도 식량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이야 상관없다. 하지만 멋모르고 움직이다간 미로에 갇힌 쥐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지, 지금이라도 탈출 포탈로―”
“탈출 포탈은 무슨 탈출 포탈이에요! 아까 설명해 준 거 벌써 잊었어요? 던전은 한 번 들어오면 보스 새끼 목을 딸 때까지 못 나간다는 거!”
정선경이 확 짜증 냈다. 질문한 김혜인이 급히 고개를 수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후우… 아니에요. 짜증 내면 안 되는 건데 미안해요.”
정선경은 심호흡하며 화를 다스리더니 불쑥 검을 그었다.
파칵!
동굴의 한쪽 벽에 깊은 골이 파였다. 표식을 남긴 것이다. 그녀가 진중하다 못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하는 수 없네요. 일단 이정표를 남기면서 진행―”
“꺄아아악!”
그때였다. 난데없이 비명이 들려왔다. 모든 시선이 소리 난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어서 붙잡아!”
공격대의 힐러 중 한 명인 김하선이 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 *
“…….”
던전에 적막이 깔렸다. 모두가 얼어붙어 바닥만 내려보았다.
김하선이 사라졌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땅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멍하니 있던 남우현이 번뜩 정신을 차리더니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정선경이 버럭 소리쳤다.
“헛짓 말고 여기서 나가요! 어서!”
“하, 하지만!”
“씨발! 백날 땅 파 봤자 소용없으니까 나가라고! 당장!”
그녀의 노기 섞인 목소리에 헌터들은 헐레벌떡 통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변을 훑었다.
‘고작 B랭크 던전에 이 정도 수준의 트랩이 있다고? 지랄하지 말라 그래!’
정선경이 이를 갈았다. 그녀는 김하선을 빨아들인 땅으로 다가갔다.
‘역시.’
땅엔 알아볼 수 없는 문자와 둥근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건 은은한 푸른빛으로 발광했는데, 현재는 서서히 꺼져 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김하선이 이것을 잘못 건드렸고, 그 결과 트랩이 발동된 듯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던전은 단순한 짐승 굴이 아니야. 높은 지능을 가진 몬스터가 있다. 그것도 이능을 부릴 줄 아는 까다로운 몬스터가.’
사람이든 몬스터든 이능 계열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그녀가 답지 않게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눈에 고병갑이 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땅을 짚고 있었다.
“야, 뭐해!? 내가 나가라고 했잖아!”
“조용해 봐.”
그는 몇 초간 그러고 있다가 눈을 뜨며 말했다.
“찾았어.”
“찾았다니, 뭘?”
“김하선 씨 위치를 알아냈다고.”
“뭐?”
정선경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온 사방이 온갖 기척으로 뒤죽박죽인데 무슨 수로 김하선을 찾아낸단 말이야?
“너, 뭐 수맥이나 풍수지리 같은 거 배우냐?”
“헛소리할 여유는 남아 있나 보네.”
사실은 이러했다. 고병갑은 김하선이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전, 소량의 내력을 발산해 그녀와 이어진 끈을 만들었다.
‘정말로 될지는 몰랐는데.’
운이 좋았다. 동면 중이던 메리린을 깨웠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어쨌건 김하선과 연결된 내력의 끈 덕분에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정선경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냥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가 이런 상황에서 허풍이나 떨 사람이 아님은 확실했으니까.
“나한테 생각이 있어.”
“…뭔데?”
“내가 김하선 씨를 찾으러 갈게. 그사이 누나는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보스를 죽여.”
“야, 장난해!? 보스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누나.”
고병갑이 정선경의 양어깨를 그득하게 잡았다.
“진정해. 침착하라고. 누나가 흔들리면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의 동공이 흠칫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후우… 알았어.”
“좋아.”
고병갑은 그녀를 놓아준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검을 휘둘러 전방으로 검기 세례를 쏟아 냈다.
콰광!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동굴이 통째로 진동했다. 간신히 안정을 되찾은 정선경이 기겁하며 그를 말렸다.
“야야! 너 미쳤어?”
“집주인이 제집 안에 꼭꼭 숨어 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할까?”
“뭔 소리야!?”
“깽판 쳐서 집 밖으로 끄집어내야지. 아니면 집을 통째로 무너뜨리던가. 누나 정도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거야.”
정선경은 붕어처럼 임만 뻐끔거렸다. 고병갑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김하선 씨는 내가 어떻게든 구해 낼게. 누나는 1초라도 빨리 보스를 잡아서 탈출 포탈을 열어. 이해했지?”
“씨… 말은 쉽지.”
정선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병갑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낸 뒤 그녀에게 한 대 내밀었다.
“시원하게 한 대 피우고 이 엿 같은 곳 통째로 날려 버리라고.”
“하여간 너도 보통은 아니라니까.”
고병갑이 몸을 돌렸다. 그의 신경은 이 광활한 던전의 한 점에 집중돼 있었다.
서둘러 걸음을 떼려던 찰나, 정선경이 그를 불렀다.
“야, 병갑아!”
그는 번뜩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왜?”
“미안하다. 진짜로.”
“참나, 밥이나 사.”
그가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 * *
「나와라.」
어느 정도 일행과 멀어진 고병갑이 고블린들을 불러냈다.
일곱 명의 공격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드시여. 부르셨습니까!」
「여긴 어디입니까?」
낯선 환경에 고블린들이 의문을 표했다. 아쉽게도 한가하게 설명해 줄 시간이 없다.
「그건 나중에 설명해 주마. 창식이, 태식이.」
「옙!」
「예!」
「인간 한 명을 찾아야 한다. 나 이외의 인간 냄새를 포착할 수 있겠나?」
「한번 해 보겠습니다.」
두 비스트 고블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얼마간 코를 킁킁거리다가 한 방향을 지목했다.
정선경과 헌터들이 있는 방면이었다.
「저쪽에서 로드와 비슷한 냄새가 많이 납니다.」
「아니, 저쪽은 의미가 없어. 다른 곳에선 느껴지지 않아?」
「흠… 저기 말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둘 다 잘해 줬다.」
‘어쩔 수 없네. 아까 확인했던 방향으로 무작정 갈 수밖에.’
그렇게 마음먹으려니 도르마가 말을 걸었다.
「로드시여, 누군가를 찾고 계시는 거라면 제가 나서봐도 괜찮겠습니까?」
「네가?」
「예, 보아하니 이곳엔 요상한 주술이 걸려 있군요. 몬스터도 잔뜩 있는 듯하고요.」
「응, 정확해.」
「그중에서 인간을 찾는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하아압!」
일순 도르마가 기합을 내질렀다. 잠시 후 녀석을 중심으로 거뭇한 격류가 퍼졌다.
새카만 바람은 동굴 곳곳으로 뻗어 나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 도르마. 고병갑은 긴장한 채 녀석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얼추 1분 정도 흘렀을까? 도르마가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떴다.
그러곤 한 방향을 응시했다.
「인간의 형(形)을 찾았습니다. 까마득히 아래쪽이로군요.」
「맞아, 아래쪽이지!」
「제가 안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좋아! 애들아, 가자!」
「옙!」
고병갑과 일곱 명의 고블린이 캄캄한 동굴을 아주 빠르게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