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7화 (87/151)

87. 로드님 던전 가신다

“뭐라고? 아스… 뭐?”

“…….”

고병갑은 다만 턱 빠진 사람처럼 입을 헤 벌렸다. 보고 또 봐도 사진과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사진은 황량한 황무지의 모습이지만 눈앞의 풍경은 꽤 비옥했다.

“뭐냐니까? 뭘 보는 거야?”

정선경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다가왔다. 고병갑은 황급히 핸드폰을 감추었다.

“얼래? 너 지금 뭐 하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누굴 바보 천치로 아나. 너 지금 뭐 있는 거잖아.”

“거 참, 별거 아니래도.”

“나 조금 서운해지려고 한다?”

“에이, 뭘 또 서운해. 그냥 경치 좋아서 사진 한 장 찍은 거야. 어? 사람들 왔다.”

고병갑은 아직 절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대충 비벼 끈 뒤 정선경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돌렸다.

그녀는 어딘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야, 너 혹시 내 사진 찍었냐?”

“…뭐?”

“푸하! 얘 당황하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그녀는 멋대로 추측하더니 손뼉까지 치며 웃어 댔다.

“인제 보니 엉큼한 구석이 있네? 몰카도 찍고. 야, 내 초상권이 얼만지나 알아?”

“이 누나가 사람을 뭐로 보고!”

“야야, 잘 찍혔냐? 나도 한번 보자.”

정선경이 엉겨 붙었다. 고병갑은 필사적으로 주머니를 사수했다.

“엄마, 얘 좀 봐? 지우라고 안 할 테니까 한 번만 보여 달라고. 그냥 보기만 한대도?”

“이 여자 진짜 왜 이래!?”

“어휴, 그래. 너 혼자 실컷 봐라, 이 치사한 놈아.”

정선경은 생각보다 순순히 포기했다. 그러더니 피식 웃어 버린다.

그녀가 이상야릇한 눈빛을 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대신 유포는 안 된다. 너 혼자만 봐. …뭐 더 필요하면 말하고.”

‘별 미친.’

심각한 오해를 산 듯하지만 일단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헌터들은 그저 어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분, 정선경 헌터님이랑 친한가 봐.”

“부럽다…….”

“이따 이름 물어봐야지.”

“보자. 하나, 둘, 삼, 넷… 여덟 명 다 넘어왔네요. 내가 급히 온다고 명단을 못 봤는데, 이 중에서 던전 경험 있는 사람 있어요?”

“아! 저 한 번 있습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번쩍 손 들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오연우. 이번 공격대에서 탱커 역할을 맡은 남자다.

정선경은 은근히 싸늘한 눈빛으로 나머지 인원을 둘렀다.

“한 명이 다예요? 헌터 2년 차 이상 손 들어 봐요.”

“…….”

“1년 이상.”

“저, 저요!”

힐러 겸 서포터인 김혜인만 손을 들었다.

“손 안 든 분들은 다 1년 미만이에요? 그쪽은 얼마나 됐어요?”

“4개월 정도 됐습니다.”

“그쪽은?”

“저, 저는 7개월 좀 넘었습니다.”

그 뒤로도 5개월, 8개월, 근 1년 등등 다채롭게 나왔다. 제일 경력이 적은 사람은 오늘로써 100일을 채웠다는 전태열이었다.

정선경이 한숨 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하아… 일루미션에서 다 쓸어 가니까 일단 뽑고 보는 건가.”

그녀의 혼잣말은 헌터들의 귀에도 들렸다. 그리고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허리가 뻣뻣해지는 데 일조했다.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 짧게 설명할게요.”

정선경은 던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헌터들은 이미 전부 숙지하고 있었지만 마치 생전 처음 들어 본다는 듯 감탄한 얼굴로 경청했다.

“다시 강조하는데, 던전을 토벌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최대한 신속하게 보스를 찾아내는 거예요. 쫄따꾸들까지 일일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옙!”

“그리고 던전에선 가급적 큰 소리로 내지 마요. 던전의 몬스터는 침입자를 극도로 경계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설명은 이쯤이면 된 것 같고.”

정선경이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았다.

‘원정대 때는 엄청 커다란 도끼를 쓰더니, 오늘은 평범하네.’

“길잡이는 내가 합니다. 여러분은 싸우기만 하면 돼요. 대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절대 다치지 마세요. 나는 부적합 판정 이런 거 안 주니까.”

“아! 가, 감사…….”

“가요, 시작하세요.”

공격대가 각자 포지션에 맞게 방진을 이루었다.

탱커 둘, 근접 딜러 셋, 원거리 딜러 하나, 힐러 둘. 딱 정석적인 구성이었다.

그들은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 고병갑과 정선경은 열 걸음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었다.

그런데 정선경이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팍 썼다.

“굼벵이 기어가는 거예요, 뭐예요? 이래서 어느 세월에 집에 가려고요?”

“아, 앗! 죄송합니다!”

“일일이 대답할 필요도 없고!”

정선경은 왠지 날이 서 있었다. 아니, 날이 서 있다기보단 무척이나 엄격하게 굴었다. 신병 교육대의 조교 느낌이랄까? 어쨌든 평소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얼마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놈들은 큰길 사이사이 나 있는 작은 ‘방’에 숨어 있었다.

‘이 던전은 흡사 개미굴 같네.’

이를테면 산 하나를 통째로 개미굴로 만들었달까? 아무튼 썩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일단 직관적이지가 않다. 던전이든 균열이든 직관적인 게 최고인데 말이다. 또한 보스 몬스터에게 닿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수많은 방을 거쳐야 했다.

“하아압!”

“왼쪽! 조심하세요!”

“맡겨 두쇼!”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격대원들은 잘 싸웠다. 부하 몬스터라고 해 봤자 D급 이하 하위 몬스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태생부터가 게임이 안 되는 미스 매치인 셈이다.

‘그래도 우리 애들이 훨씬 낫네.’

하지만 경력이 부족한 탓일까? 한둘을 제외하면 움직임이 형편없었다. 물론 고병갑 입장에서 그렇게 느꼈다는 거다.

‘검술의 기본이 안 돼 있어. 허리 움직일 줄도 모르고, 보법은… 착잡한 수준이구먼.’

남자들 사이에선 이런 논쟁이 종종 오가곤 한다. 헬스 10년 차 몸짱과 복싱 2년 차 라이트급 복서가 맞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

보통은 복서가 이긴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좀 심한 사람들은 10초 안에 몸짱이 피떡이 된다고도 한다. 그들이 무술 신봉자라서 그런 걸까? 아니, 그만큼 무술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바닥에선 마냥 그렇지도 않다.

상위 각성자쯤 되면 눈감고 주먹만 휘둘러도 어지간한 하위 몬스터는 초파리 죽듯 픽픽 죽는다. 그만큼 압도적인 피지컬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저런 거지.’

상위 각성자는 구태여 무예를 익힐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공백을 경험으로 메우려 하며 놀랍게도 보통은 메워진다.

사자가 나고 자라며 자연적으로 사냥 기술이 느는 것처럼.

‘…교본 덕에 꽁으로 무술 익힌 내가 저 사람들 얕잡아 보는 건 좀 아닌가?’

숨만 쉬어도 올라가는 성취율 가지고 으스대는 건 아무래도 꼴불견이다. 피식 웃은 그가 흘끗 옆을 보았다.

정선경은 거의 도깨비 같은 얼굴이었다.

“표정 좀 풀어. 누가 보면 화난 줄 알겠네.”

“화난 거 맞아.”

“왜?”

“왜는 무슨 왜야? 칼질하는 꼬라지 좀 봐. 화가 안 나고 배기겠냐?”

“에이, 아직 신입들이잖아.”

“어휴, 언더문도 이제 끝물이구나.”

그녀는 설렁설렁할 것처럼 굴더니 눈에 불을 켜고 공격대를 주시했다. 몇 번은 튀어 나갈 듯 자세를 잡기도 했다.

고병갑은 그녀만큼 전투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실토하자면 정신의 반절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균열에서 아스빌람을 보다니,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아스빌람과 던전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이 밀려왔다.

‘확실한 건 여기가 현재의 아스빌람은 아니라는 거지.’

현재의 아스빌람은, 아니 적어도 발타드렌에서 반경 20킬로의 영역은 황무지다. 또한 몬스터는커녕 그러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생명체조차 없다.

그러니 이 던전을 현재의 아스빌람으로 보기에는 오점이 많았다. 그렇다면 남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뿐.

‘현재가 아니라면… 미래 혹은 과거라는 건가?’

고병갑은 이번에도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감상을 느꼈다. 어째 ‘생애 기괴한 일 Top 1’이 나날이 갱신되는 기분이다.

“…갑아. 야, 고병갑!”

“어? 어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어?”

“아… 미안. 왜 불렀어?”

“이쯤에서 잠깐 쉬자고. 여러분, 모이세요. 쉬었다 갈게요.”

헌터들은 카르마를 발산해 몸에 묻은 오물을 털어 낸 뒤 다가왔다. 두당 몬스터 수십은 썰어 낸지라 처음보단 긴장이 덜했다.

그들은 ‘어이구야!’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정선경은 공격대원들에게 물과 에너지바 따위를 나누어 주었다.

“어때요? 던전이라 해도 별거 없죠?”

좀 전까지 귀신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그녀가 온화하게 물었다.

공격대원들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직은 초입인지라 강한 몬스터는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허허.”

“깊숙한 곳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좀 강한 놈들도 끽해야 C급이니까. 방심만 안 하면 위험한 일은 딱히 없을 거예요.”

“허허, 그렇습니까.”

“저… 정선경 헌터님께 질문 있습니다!”

힐러 김하선이 무슨 학생처럼 말했다. 생수를 마시던 정선경이 말해 보라는 듯 눈을 까닥거렸다.

“정선경 헌터님께선 S랭크 균열에 들어가 본 적 있으신가요?”

“뭘 그런 걸 물어요? 당연히 있죠.”

“S랭크 균열은 어, 어떤가요?”

“어떠냐고요?”

정선경이 비릿하게 웃었다.

“지금 상태의 당신들이 들어가면 5분도 안 돼서 싹 뒈질… 아니, 죽을 거라는 건 확실하죠.”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경각심 때문일까.

정선경은 바로 이어 말했다.

“그런데 어차피 여러분은 S랭크 균열에 들어갈 일이 없어요. 가고 싶어도 길드에서 안 보내 주니까요. S급 미만 전력은 별 의미 없기도 하고.”

“아… 그, 그런 건가요?”

“뭐, 자살하러 가는 거라면 괜찮은 선택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다들 오래오래 살고 돈도 많이 벌어야죠. 그러려고 이 짓 하는 거 아녜요?”

“맞습니다, 허허.”

탱커 최종찬이 사람 좋게 웃어 댔다. 정선경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바람인데, TV 나가서 딴따라 짓은 하지 마세요. 혹시 여기 연예계 지망하는 사람 있어요? 없죠?”

그녀가 묻자 구석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전태열이 반응했다. 상위 각성자답게 흠잡을 곳 없는 미남이다. 특히나 요새 여자들이 죽고 못 사는 미소년 스타일이었다.

“하, 하하… 저 어제까지도 웹드라마 촬영 있었는데. 선경 님, 혹시 태양의 눈물 모르시나요?”

“나 그런 거 안 봐요.”

정선경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더니 면전에다 대고 혀를 끌끌 찼다.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딴따라 할 거면 딴따라만 하고 헌터 할 거면 헌터만 하지 왜 둘이 같이하는 거야?”

“하하…….”

“아니, 한번 말해 봐요. 왜 같이하는 거예요?”

전태열은 그저 머쓱한 듯 뒤통수만 긁적였다. 그때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미지 메이킹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헌터 일을 겸하는 연예인들이 인기가 더 많다고 하던가?”

“야야!”

“뭐 어때? 사실이잖아.”

우직한 인상의 강병찬이 너스레를 떨었다. 반대로 전태열의 얼굴에 민망함이 번졌다. 두 사람은 친분이 있는 듯했다.

정선경은 그저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고병갑 헌터님도 언더문 소속이신가요?”

“병갑이요? 아아, 쟤는 아니에요.”

정선경은 그렇게 대답하며 고병갑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병갑은 다만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이북 원정 알죠?”

“아! 알아요. 지금도 진행 중이잖아요.”

“나랑 병갑이가 거기 1차 원정단이었어요. 거기서 알게 됐죠. 같은 조였거든요.”

“우와! 1차 원정단이셨구나!”

“그때 병갑이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얘 덕분에 죽다 살아난 적도 있고.”

“에이, 뭘 또 오바하고 그래?”

“왜? 맞잖아.”

그녀가 고병갑을 띄워 주려 말했다. 듣고 있던 헌터들은 감탄했지만 한편으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것과 귀로 듣는 것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리라.

‘느껴지는 카르마는 보통 이하인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음?’

그때 고병갑의 고개가 동굴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꽤 많은 기척. 이쪽으로 접근 중이네.’

“몬스터가 몰려오네요. 슬슬 준비하죠.”

“네? 몬스터가 몰려온다고요?”

“정말요? 저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헌터들은 즉시 몸을 일으켰지만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그들로서는 던전에 즐비한 거대한 기척 틈에서 일부를 특정하는 게 힘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저 너머를 응시하던 정선경이 그나마 동조했다.

“어? 진짜네?”

“몰랐어?”

“…야, 모르고 자시고가 아니라 너무 멀잖아? 너 너무 곤두서 있는 거 아냐?”

“아, 좀 그랬나.”

기척이 없다시피 한 그러글과 싸우다 보니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전투 상황에서는 코딱지만 한 기척에도 반응하는 게 그것이다.

“뭐, 슬슬 움직일 때도 됐으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옙!”

정선경이 인원들을 통솔했다. 공격대원들은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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