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로드님 던전 가신다
“아! 왔네. 밥은 먹었냐?”
“나 참, 전화 받자마자 바로 나왔는데 무슨 밥을 먹어? 빨리 가야 한다며.”
고병갑이 건어물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정선경이 킥킥대며 웃었다.
“일 끝나면 내가 밥 살게. 일단 빨리 타.”
그가 정선경의 고급 SUV에 올랐다. 정선경은 지체 않고 차를 움직였다.
“어디랬지?”
“평택.”
“2시간은 걸리겠네.”
“1시간 안에 가야 해.”
고병갑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 평택까지 1시간 만에 어떻게 가? 주말이라 차도 막힐 텐데.”
“그러니까 졸라 밟아야지.”
“그렇게 급한 거면 차라리 기차를 타지 그랬어.”
“차가 있는데 기차를 왜 타냐?”
정선경이 거세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속도계의 바늘이 가파르게 기울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앞을 달리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망나니처럼 추월해 댔다.
“이 누나가 뭘 잘못 먹어나! 사고 나면 어쩌려고 이래!?”
“에이, 사고 좀 나도 안 죽어.”
“아니, 댁이야 당연히 안 죽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고가 날 확률은 희박했다.
각성자는 여러 방면에서 범인을 아득히 초월한다. 거기엔 운전 능력도 포함됐다.
정선경쯤 되면 반대편 차선에서 25.5톤급 덤프트럭이 덮쳐 와도 피할 수 있으리라.
고속 도로에 진입하니 길이 뻥 뚫렸다. 다행히 더 이상 곡예 운전은 없었다.
“그나저나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뜬금없이 무슨 던전 토벌이야?”
“직접 토벌하는 건 아니고, 감독관 역할이긴 한데… 뭐 별거 없어.”
“자세히 말해 봐. 나도 무슨 일인지 정도는 알아야지. 보통 균열도 아니고 던전인데.”
정선경이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옆쪽 캐비닛을 뒤적였다. 곧 담뱃갑을 찾아낸 그녀가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길드에 신입 헌터들이 들어왔거든. A, B급 애들 말이야. 그래서 실력 검증 겸 던전 한 바퀴 도는 거야. 일종의 신고식 같은 거지.”
연기를 후 뱉어 낸 그녀가 바로 이어 말했다.
“보통 균열이었으면 고참 헌터 하나만 따라붙어도 되는데 던전은 좀 깐깐하거든. S급 두 명이 감독으로 동행해야 해.”
“유사시를 대비해서?”
“그렇지. 그래 봤자 B랭크 던전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 있겠냐마는……. 아무튼 원래 같이 가기로 한 애가 있었는데 오늘 갑자기 빠지게 돼서 급히 대타를 구한 거야.”
“그 대타가 나인 거구먼.”
“맞아, 사실 다른 애가 대타로 뛸 예정이었는데 내가 거부해 버려서 말이야.”
“거부했다고? 왜?”
“그 새끼, 졸라 재수 없거든.”
“…….”
흠, 고병갑은 짧게 콧바람을 내쉬며 창밖을 보았다. 빌딩 숲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산지만 즐비했다.
“그런데 내가 감독관을 해도 돼? 나 D급이잖아.”
“야… 내가 널 모르냐? 발록 잡는 걸 코앞에서 봤는데 어디서 겸양이야?”
“…아니, 그거랑 별개로 실제 등급이 D잖아. 서류 같은 데서 걸리는 거 아냐?”
“그건 문제없어. 서류에는 원래 가기로 했던 애 이름이 적힐 거거든.”
“이거 불법적인 건 아니지?”
“에이, 불법은 무슨. 설령 불법이라도 나랑 길드장이랑 친해서 괜찮아. 내가 언더문에서만 몇 년인데.”
정선경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계속 말했다.
“내가 일루미션에서 연봉 두 배 준다고 해도 안 가고 남았는데 이런 거로 지랄하면 안 되지. 그렇지 않냐?”
“왜 안 갔대. 연봉을 두 배나 준다는데.”
그녀가 짧게 고민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돈이야 이미 충분할 만큼 있으니까. 새로운 데 적응하는 거 귀찮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일루미션이 언급되자 자연스럽게 김하나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했던 의미심장한 말이 생각났다. 분명 일루미션 소속 헌터들이랑 엮이지 말라고 했었지…….
“아, 누나.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봐.”
“김하나라는 헌터 알아? S등급 헌터인데.”
“누구? 김하나?”
그녀가 김하나라는 이름을 몇 번 곱씹었다.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누구래?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닌데.”
“그래? 모르면 됐어.”
“아아, 뭐길래 그래? 김하나면 여자 이름인데 뭐하는 년이야?”
정선경은 집요하게 캐물었다. 고병갑은 차마 ‘발전 단지 습격 사건의 주범이다.’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래전 스치듯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여자가 자기를 김하나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도통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고 답했다.
“흠… 그 여자 S등급인 거 확실해?”
“그건 확실해.”
“정보가 없다라. 그럼 그거네.”
“그거?”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 한탕 거하게 뽑고 알게 모르게 은퇴해서 조용히 사는 사람들. 내 지인 중에도 몇 명 있어. 자기 신상 정보 싹 지우고, 심지어 개명까지 하고 외국 가서 조용히 살더라.”
“아아.”
“너도 알다시피 헌터 일이라는 게 졸라 신물 나는 일이잖아. 적성 안 맞으면 오래 해 먹기도 힘들고.”
“그건 그렇지.”
말이 좋아 헌터지 따지고 보면 현대판 백정이 아니던가. 살생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누나는 이 일 얼마나 했다고 했지?”
“나? 나는 햇수로 9년쯤 됐지.”
“와… 내년이면 10년이네. 은퇴 안 해?”
그가 감탄하며 물었다. 정선경은 또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어눌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글쎄다, 지금은 별로 관둘 생각 없어. 나는 늙지도 않으니까 아마 환갑까지는 할걸. 놀면 뭐하냐?”
“적성에 맞나 보네.”
“그러려나… 킥킥. 하긴 요새는 한 사나흘만 쉬어도 좀이 쑤시더라. 직업병이야, 직업병. 어휴, 나는 시집 다 갔지. 나 같은 년 누가 데리고 가겠어.”
정선경은 그렇게 말하며 흘끔 옆을 보았다. 고병갑은 그저 무덤덤이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에휴.”
그녀는 피식 웃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의 말대로 1시간쯤 지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던전이 발생한 곳은 평택 시내는 아니었다. 고속 도로를 타고 죽 내려가다 보면 나오는 휴게소. 그 뒤쪽 산지에 균열이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여덟 명의 헌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A급이 다섯 명, B급이 세 명이다. B랭크 던전을 토벌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력이다.
“선배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김하선입니다!”
“오연우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들은 정선경을 발견하더니 깍듯하게 인사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선경은 귀찮다는 듯 휘휘 손사래 쳤다.
“에이, 선배님은 무슨 선배님이에요. 그런 거 하지 마요. 내가 좀 늦었죠? 미안하게 됐네요.”
“아닙니다!”
마치 막 전입 온 이등병이 최고참을 대하는 듯하다.
반면 고병갑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일쑤였다.
“저 사람은 누구래?”
“몰라, 처음 보는데. 그쪽은 알아요?”
“저도 모르겠는데요. 원래 정선경 헌터님이랑 주애경 헌터님 오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것보다 저 사람 S급 맞나?”
웅성거리는 헌터들. 정선경은 고병갑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 친구는 애경이 대신 일을 도와줄 친구예요. 실력은 내가 보장하니 걱정할 거 없고요.”
“아… 예예.”
정선경이 보장한다니 헌터들도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고병갑은 자기소개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정선경이 인원들을 통솔했다.
“꾸물거릴 거 없이 바로 시작하죠. 다들 준비는 됐나요?”
“아, 옙!”
“좋네요. 우리 짐은 어디 있어요? 아, 이거구나.”
정선경이 한 편에 마련된 배낭을 둘러맸다. 마석 수거용 배낭이 아니라 식량과 포션 따위가 담긴 것이었다.
“가죠.”
다 합해 10명의 인원이 균열로 걸음을 옮겼다. 고병갑과 정선경은 일행보다 뒤에서 걸었다.
정선경이 속닥거렸다.
“병갑아, 인제 와서 묻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너 던전 들어가 본 적 있냐?”
“어, 가 본 적 있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정선경이 밝게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엔 고병갑이 질문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던전 시간 기준으로.”
“글쎄다, 늦어도 대여섯 시간 안에는 끝날걸?”
대여섯 시간이라.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38분경이었다.
던전을 격파하고 나와도 3시가 채 안 되리라. 던전 안에서 6시간이라 해 봤자 바깥에선 15분에 불과하니까.
“네가 할 건 딱히 없어. 어차피 몬스터는 저 사람들이 다 잡을 거고, 혹시 이변이 생기더라도 내가 처리할 거니까. 너는 그냥 내 말동무나 해 주면 돼.”
“괜찮네. 그나저나 보수는?”
“현찰로 천오백, 아니면 나랑 단둘이 저녁 먹기. 둘 중 하나 골라.”
정선경이 장난스레 말했다.
“밥은 어차피 사 준다고 했으니까 천오백이 좋겠네.”
“어휴, 너도 참 만만치 않은 놈이다.”
잡담을 떠드는 사이 균열 앞까지 다다랐다. 여느 균열과 달리 블랙홀처럼 새카맣다.
던전은 통상적인 이면 세계와 다르다. 저 안에는 족히 1,000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꿈틀거리고 있을 터다.
신입 헌터들은 전쟁을 앞둔 병사처럼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정선경이 앞장섰다.
“나와 이 친구가 먼저 들어가죠. 15초쯤 후에 들어와요.”
“알겠습니다!”
“병갑아, 가자.”
“오케이.”
고병갑과 정선경.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시커먼 균열에 몸을 담갔다.
늪지대에 빨려 들어가듯, 던전 특유의 불쾌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겁먹지 않았다.
* * *
“키에엑―칵!”
“초장부터 지랄이네.”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에서 몬스터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박쥐 형상의 괴수였는데, 눈에 익은 녀석은 아니었다.
정선경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날카롭게 벼른 카르마를 사방으로 발산했다. 박쥐 괴물은 몸이 갈가리 찢기며 죽었다.
강력한 몬스터는 아닌 듯했다. 기껏해야 E, F급쯤이려나?
‘동굴이네.’
여느 균열과 던전의 차이점.
평범한 이면 세계는 현실의 모습을 모방한다. 반면 던전은 전혀 새로운 세계가 주 무대다.
고병갑은 덤덤하게 주변을 훑었다. 이곳은 서늘하고 축축한 동굴의 내부였다. 그리고 일직선 통로가 아래쪽으로 뻗어 있었다.
저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기척의 덩어리가 느껴졌다. 족히 수백, 수천은 될 몬스터가 똬리를 틀고 있을 터다.
“사람들은 한 5분 뒤에야 올 테니까 담배나 한 대 태우고 있자.”
“좋아.”
두 사람은 나란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병갑은 연초에 불을 붙이다가 문득 뒤쪽을 바라보았다. 던전의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이다.
오르막길 끝에 불그스름한 빛이 보였다.
‘동굴 출구 같은데?’
“어? 야, 어디가?”
“그냥 잠깐.”
그가 오르막길을 타고 출구 쪽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동굴의 끝에 다다랐다. 큰 출구 너머로 바깥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절벽이었다. 발이라도 헛디뎠다간 크게 다치리라. 뭐, 어차피 나가는 건 불가능했지만.
출구에는 투명한 막이 처져 있었다. 마치 결계처럼 말이다. 그래서 보는 건 가능했지만 막 너머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고병갑은 한참이나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수목이 울창한 넓은 숲,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줄기,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맥들.
이곳은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산맥 끄트머리엔 해가 걸려 붉은 노을을 흘리고 있다.
꽤 멋진 경치다.
하지만 고병갑은 ‘멋지다.’ 혹은 ‘아름답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색다른 감정을 느꼈다.
‘뭐지? 왜 눈에 익지?’
익숙했다. 언젠가 본 것만 같았다.
특히나 저 석양은…….
“이야… 경치 끝내주네. 다른 건 몰라도 헌터 일 하면 이런 거 볼 수 있어서 좋단 말이야. 그렇지 않냐?”
모르는 틈에 다가온 정선경이 아저씨 같은 말투로 물었다. 고병갑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어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홀린 사람처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사진첩에 들어갔다. 최근에 찍은 몇 장의 사진 중 하나를 액정에 띄운다.
도란과 함께 발타드렌 주변을 정찰하다가 경치가 좋아서 찍어 두었던 사진이다.
그가 핸드폰을 눈높이로 들어 올려 사진과 경치를 대조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선경을 경치를 감상하기 바빴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지 않냐? 도대체 여긴 어딜까? 던전 들어올 때마다 신기―”
“아스빌람…….”
“어? 뭐라고?”
고병갑이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은… 아스빌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