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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5화 (85/151)

85. 로드님 던전 가신다

3월을 보내고 4월을 맞이한 지도 벌써 한 주가 지났다. 고병갑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2026년을 맞아 안개를 넘겠다고 선언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개월 넘는 시간이 흘렀다니.

그는 남들과 비교하면 2배의 인생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낮엔 균열을 돌아 돈을 벌고, 저녁에는 아스빌람으로 가 그곳을 돌본다.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간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몰랐다.

딱히 피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날이 쌓이는 통장 잔고와 아스빌람의 발전을 보면 없던 힘도 솟아났으니까.

물론 매일 매일 경사인 것은 아니다. 오늘은 속된 말로 공친 날이었다. 아니, 글쎄, 눈도장 찍어 두었던 A, B랭크 균열에 선수를 빼앗긴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는 수 없이 C랭크 균열만 하나 돌았다.

‘이제 C랭크 정도는 몸풀기도 안 되네.’

과장 좀 보태면 조깅하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이 느껴졌다. 민간인 수십쯤 우습게 찢어 죽이는 괴물도 고병갑 앞에선 하룻강아지나 다름없었으니까.

‘오늘은 영 날이 아니구나.’ 어쩌고 중얼거리며 발타드렌의 땅을 밟은 고병갑은 어쩌면 오늘이 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물체(?)가 발타드렌 상공을 활공하고 있다. 고블린들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올려 보았다.

「뭐야, 저거?」

「앗! 로드, 언제 왔어?」

「저거 하피 아냐?」

고병갑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주시했다.

팔에 새의 날개를 단 인간 비스무리한 생물체가 마치 곡예 비행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더 볼 것도 없다. 저것은 약 두 달 전 거두어 온 새끼 하피였다.

고병갑이 기가 차는 심정으로 말했다.

「뭘 멍하니 보고들 있어? 얼른 잡지 않고!」

「로드, 저걸 어떻게 잡아?」

「…….」

고블린이 곤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고블린들이 무슨 재주로 비행 중인 새를 잡겠는가. 총이나 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께에에엑! 께에에엑!”

새끼 하피는 하늘을 날며 구슬프게 울부짖었다.

‘어떻게 하루 만에 저만큼 성장했지?’

하피의 몸집은 대략 7세 전후의 유아쯤 됐다.

이상했다. 분명 전날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저렇게 크지 않았다. 날개도 덜 여문 상태였고.

녀석의 성장 속도가 범상치 않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아침에 저런 급속 성장을 이루어 내다니.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혹시 누가 쟤한테 성장의 묘약 먹였냐?」

「모, 모르겠는데…….」

「저거 언제부터 저랬어?」

「어어… 꽤 됐다. 나는 시간 잘 모르겠다.」

「환장하겠구먼.」

고병갑이 짧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게 우리 애들 공격하지는 않았겠지?」

만약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오면 당장에 베어 버릴 심산이었다. 다행히도 쪼꼬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냥 계속 울기만 했어.」

「흠…….」

「여러분, 식사하세요!」

「밥 먹자!」

그때 뒤쪽에서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병갑도 손뼉을 치며 한마디 보탰다.

「하늘 그만 올려다보고 다들 가서 밥부터 먹어라!」

「저건 그냥 내버려 둡니까?」

「안 내버려 두면 어쩔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밥들 먹어.」

「아, 알겠습니다.」

「로드는 밥 안 먹어?」

「먹고 왔다, 짜샤.」

고블린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고병갑은 하피를 계속 지켜보았다.

녀석은 꽤 넓은 반경을 누벼댔다. 그러나 결코 성벽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았다.

‘저 녀석도 여길 보금자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얀마! 내려와!」

별안간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하피가 멈칫하더니 고병갑을 내려보았다.

그는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어떻게든 의사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래! 내려오라고! 이리 와 봐!」

“께에엑!”

「역시 새 대가리는 새 대가리… 음?」

말이 안 통할 거라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하피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하지만 녀석이 향하는 방향은 이쪽이 아니었다.

「야야, 어디가? 얀마!」

하피는 식당이 위치한 방면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현재 식당에는 다수의 고블린이 모여 있다.

‘아무리 어려도 B급 몬스터다. 놈이 난장이라도 부리면!’

싸한 기분에 즉시 녀석을 쫓았다.

그가 여차여차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안쪽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병갑은 검까지 뽑아 들고 다급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다들 괜찮……!」

쭈압! 쭈압! 쭈압!

고병갑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선혈이 낭자한 유혈사태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낭자하긴 했다.

하피가 테이블 하나를 통째로 차지해서 음식을 주워 먹고… 아니, 뒤집어쓰고 있었다.

소란은 금방 가셨다. 하피는 음식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굴었다. 주둥이로 고기 몇 점 넣어 주니 더는 울지도 않았다.

그는 하피를 돌보던 고블린을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하피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어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한데 별안간 목이 찢어져라 울어 대더니 변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단 3, 4시간 만에 몇 년의 허들을 뛰어넘은 것이다.

참고로 성장의 묘약은 단 한 방울도 먹이지 않았다.

쭈압! 쭈압! 꿀꺽!

고기 한 덩이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하피가 불쌍한 눈망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힝…….”

“나 참.”

고병갑이 고기 한 점을 더 던져 주었다. 하피는 냉큼 목을 뻗으며 공중에서 낚아채 씹어 삼켰다.

고병갑은 턱을 괴고 하피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 인간 신생아일 때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 어미를 쏙 빼닮았구먼.’

완전히 몬스터의 생김새였다.

인간으로 시작해 인간과 몬스터가 반쯤 섞인 시기를 거쳐 이젠 완벽한 몬스터가 됐다.

이것을 과연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고병갑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힝…….”

“옜다, 다 처먹어라.”

그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피는 배고픔을 어필했다.

고병갑이 고기가 든 소쿠리를 통째로 내밀자 하피는 아예 코를 박고 먹어 댔다. 분유를 먹던 시절에도 하루 몇 통씩 비워 내더니. 하여간 보통 먹성은 아니다.

「로드시여, 이 기괴한 생물체는 대체 무엇인가요?」

고병갑 뒤로 서 있던 메리린이 못 참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하피를 처음 봤을 것이다.

메리린은 온종일 어디 후미진 곳에 틀어박혀 가부좌를 틀고 명상만 해댔다.

오랫동안 동면에 든 탓에 몸이 엉망이라 나 뭐라나? 아무튼 예전의 힘을 되찾는 중이라기에 가만히 내버려 뒀다.

고병갑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게 몬스터라는 거야.」

「몬… 스터? 아, 예전에 말씀하신, 균열이란 곳에 사는 생물 말입니까?」

「맞아, 너희가 먹는 거기도 하고. 들여오는 거 몇 번 보지 않았어?」

「아… 살아 있는 건 처음 보는지라…….」

「히끅!」

그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연신 고기를 뜯던 하피였다.

녀석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뒤로 뺐다. 고기가 담긴 소쿠리는 보물단지처럼 안고 있었다.

「나. 먹을… 거야?」

하피가 말했다. 고병갑을 비롯해 녀석의 먹는 모습을 치켜 보던 모든 고블린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너 말 할 줄 알아?」

제 어미가 말을 했으니 새끼도 말을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누가 가르쳐 준 적이 없다는 게 문제일 뿐.

하피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릴 듯했다.

고병갑은 달래는 말투로 얼른 말했다.

「야야, 너는 안 먹지. 너는 안 잡아먹어.」

「…정말?」

「그래, 넌 어차피 먹을 것도 없잖아.」

「아하!」

먹던 거나 마저 먹으라는 듯 손을 까닥거리자 그제야 하피가 안심했다.

「그러글만큼이나 기괴하군요. 사람도 짐승도 아닌 모습이라니.」

「그 정도인가? 메리린, 네가 살던 때엔 저런 게 없었어?」

「예에?」

메리린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당연히 없었습니다. 저는 저런 괴물이 있다는 말도 못 들어 봤어요.」

고병갑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몬스터의 기원이 이 세계가 아닐까 짐작하고 있었다.

가령 이 세계의 원주민이 모종의 이유로 균열로 전이된 거라든가…….

근거는 충분했다. 언어만 해도 이쪽 말을 쓰지 않던가? 그런데 메리린은 몬스터를 낯설게 여기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보면 볼수록 괴상하군요.」

「그렇지? 더 황당한 걸 가르쳐 줄까? 저게 완전 아기일 때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인간의 모습이라고요?」

「어, 그런데 점점 성장하면서 저렇게 변하더라고.」

「그, 그럼 저게 인간이란 말입니까?」

「뭐? 에이, 무슨 소리야. 저게 어떻게 인간…….」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고병갑이 멈칫거렸다.

그가 번뜩 하피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소쿠리에 부리를 처박고 고기 먹기에 바빴다.

고병갑은 이번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알비노 고블린인 키리얀도 있었고, 자이언트 고블린인 투르카도 있었다.

문득 과거 도르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스빌람이 붕괴한 이후 고블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그리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간 결과 ‘알비노’, ‘자이언트’, ‘비스트’ 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돌연… 변이……?”

만약 눈앞의 하피가 원래는 인간이었다면?

인간이었는데 돌연변이를 일으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된 거라면?

그런 생각이 들자 섬뜩함과 불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로드? 로드!」

「어? 어어.」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요.」

고병갑을 깨운 것은 도란의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갑자기 생각할 게 좀 생겨서.」

「로드시여, 그나저나 저 아이의 처분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도르마가 짐짓 우려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병갑은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불쑥 팔을 뻗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피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고, 순순히 정수리를 내주었다.

고병갑은 하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글쎄, 밥만 잘 주면 길들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역시 키우실 생각이셨군요. 그렇지만 마땅한 쓰임새가 있을지…….」

「쓸 곳이 왜 없어?」

「예?」

고병갑이 하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전서구도 이 정도면 완전 최상급 전서구구먼.」

* * *

우우웅! 우우웅!

“뭐야?”

일요일. 모처럼 집에서 한가롭게 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가 온 것이다.

자랑은 아니다만 고병갑의 핸드폰으론 전화 올 일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엄마 병원 정도일까? 예전에는 빚 독촉 전화가 많이 오긴 했는데…….

고병갑은 소파에 누운 채 손만 움직여 핸드폰을 집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는데, 웬걸.

-정선경.

“이 누나가 웬일이지.”

정선경. 이북 원정에서 인연이 튼 여자다. 원정이 끝난 후 조원들과 함께 만나 몇 번 밥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니 놀라울 만큼 연락이 뜸해졌다. 하기야, 원래 스쳐 가는 인연이란 게 대개 그런 법이긴 하다.

고병갑은 살짝 떨떠름함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넌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냐?

버럭, 고함부터 질러온다. 고병갑은 핸드폰을 조금 떨어뜨렸다가 잠시 후 다시 가져다 댔다.

“내가 원래 연락을 잘 안 해. 요근래 많이 바쁘기도 했고.”

-어휴, 그래도 전화 받는 거 보니까 살아 있긴 한 모양이네. …요새 뭐 하고 살아?

“뭐 하고 살긴, 돈 버느라 정신없지. 그래서 어쩐 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다른 건 아니고, 너 오늘 뭐 하냐? 따로 일정 같은 거 있어?

뭐지? 데이트 신청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선경 같은 여자가 데이트를 신청하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다.

고병갑은 괜히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대답했다.

“아니, 오늘은 그냥 쉬는 중이야. 지금도 집에서 빈둥대고 있고.”

-야! 진짜? 잘됐다!

수화기 너머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고병갑의 마음도 슬슬 들뜨려는 순간, 정선경이 이어 말했다.

-야, 병갑아! 나랑 던전 한 번만 같이 돌아 주라! 용돈 두둑하게 챙겨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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