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4화 (84/151)

84. 밀담

「로드시여, 기침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길에서 우연히 만난 도르마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고병갑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대답했다.

「어, 한숨 잤더니 살 만해졌다.」

「다들 걱정했습니다. 저희와 헤어진 후에 또 균열에 들어가셨던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설명하기 좀 복잡하네.」

「그렇습니까.」

고병갑이 화제를 돌리려 말했다.

「넌 어디 가는 길이야?」

「아, 성벽에 가던 중입니다.」

「오늘 당번이야?」

「아니요. 그냥 가는 겁니다. 토벌이 없는 날엔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요.」

「좀 쉬지 그러냐. 어제 힘 많이 썼잖아.」

「아닙니다. 밤사이 충분히 쉬었습니다.」

고병갑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냐. 그래, 가서 일 봐.」

「로드께선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집에 가야지. 아… 갓길에 차 세워 놨는데 견인해 가진 않았겠지? 그러면 골치 아픈데.」

「예?」

「별거 아냐. 그냥 혼잣말.」

「허허, 모쪼록 몸조리 잘하십시오.」

「오냐, 고생해라.」

도르마가 고개를 꾸벅여 인사한 뒤 떠나갔다. 고병갑은 적당한 벤치에 걸터앉아 한껏 늘어졌다.

새벽녘까지 근육통과 신경통으로 잠을 설쳤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는데, 깨어나니 놀랍도록 몸이 개운했다.

「로드시여,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로드, 안녕.」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벤치에 가만 앉아 있으면 지나가던 고블린들이 인사를 건네온다. 고병갑은 고개를 까닥이거나 손을 휘휘 저으며 대충 응해 주었다.

고블린들의 성의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다른 것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홧김에 써 버린 70만 수정이 아깝기도 했고, 눈앞에서 놓친 45억에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놈들은 대체 뭐지.’

어제 맞붙었던 괴한들이 신경 쓰였다. 그들이 아는 얼굴이라는 것도, 그들이 늘어놓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김하나가 보여 준 기상천외한 능력은 또 어떻고? 설마하니 자신과 비슷한 능력의 소유자가 더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여자도 로드인 건가? 고블린 로드 말고 뭔가 다른 게 더 있는 거야?’

먼 과거 이 대륙엔 여러 종족이 모여 살았다니 로드 몇 개쯤 더 있어도 놀랄 일은 아닐 터다. 머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가슴은 쉽사리 동조하지 못했다.

그래서 에아를 찾아가 물었다. 그녀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네, 적어도 당신들을 만나기 전에는 이 대륙에서 그러글과 정령 외의 존재를 본 적은 없어요. 내가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확실해?」

「내가 뭣 하러 거짓말하겠어요? 뭐… 그렇긴 해도 내가 대륙 곳곳을 전부 쏘다닌 건 아니니 100% 장담은 못하겠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에아가 팔짱을 끼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허… 실컷 궁금하게 해 놓고 아무것도 아니라니. 당신, 이번엔 좀 얄궂네요.」

「어, 그래. 고생해라.」

「피! 그래요. 당신도요.」

‘역시 그리로 가 봐야 하나?’

고병갑은 머릿속에 들어온 좌표를 곱씹으며 인상 썼다. 김하나가 제멋대로 주입한 것인데, 어떻게 했는지는 일단 제쳐 두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

-세계의 진실에 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계의 진실은 무슨 세계의 진실이야? 그런 게 어디 있다고.”

그는 어느 각도로 봐도 미신, 음모론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고블린 로드인데도 말이다.

“함정은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해코지하려는 계략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이런 귀찮은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지. 무엇보다 그녀는 고병갑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냥 협회나 경찰에 신고해?”

사실 그게 가장 현명한 판단일지 모른다. 김하나가 알려 준 좌표를 당국에 넘기면 수사하는 데 이래저래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니 ‘다른 사람을 끌고 와도 소용없다.’는 김하나의 말이 걸렸다. 본인 신상을 아무런 대책 없이 알려 주진 않았을 테니까.

또 막상 신고했는데 ‘당신은 뭔데 그런 걸 알고 있냐? 괴한들과 어떤 사이냐?’ 따위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고병갑은 한참을 끙 앓았지만 결국 명쾌한 해답을 내지 못했다.

“에휴, 모르겠다. 일단 집에 가서 밥부터 먹자.”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넘었다. 나타난 곳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속이었다.

얼른 엄폐물 뒤에 숨어 주변 기척을 살핀다. 다행히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가 살금살금 산에서 내려갔다.

‘깊숙이도 들어왔네.’

종종걸음으로 1시간 좀 안 되게 이동했더니 대로변에 설치된 철망과 도로가 나타났다. 저 멀리 발전 단지도 보였다.

‘개판 났네.’

언뜻 봐도 정상의 모습은 아니었다. 돔 형태의 콘크리트 건축물들이 죄다 무너져 내렸고, 단지를 둘러싼 담도 반절쯤 박살 난 상태였다.

괴한들이 또 한 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고병갑은 한껏 혀를 차며 어제 차를 세워 준 자리로 갔다. 다행히 자가용은 온전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얼른 차에 올라타 자리를 벗어났다.

집에 도착한 뒤에는 몸을 씻고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TV 뉴스에선 영월 발전 단지 습격 사건을 속보로 다루고 있었다.

혹시 자신에 대한 게 언급되지 않을까 예의주시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인과 관련된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시선을 거둔 그가 핸드폰을 꺼냈다. 지도 어플로 들어가 김하나가 알려 준 좌표를 입력했다.

그러자 나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지리산이었다. 그것도 등산로조차 연결되지 않은 험지의 한 부분 말이다.

‘기가 막히네.’

지리산 중턱에 비밀 아지트라도 있는 것일까? 하기야 명색이 테러리스트인데 도심지에 떡하니 사무실 차리지는 않았을 터다.

“주문하신 특대 순대국밥 나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 놔주세요.”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고병갑은 일단 눈앞의 식사를 해치우는 데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 * *

장엄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나라, 노르웨이. 매년 세계 각지에서 산과 바다를 보러 관광객이 몰려든다.

하지만 본토에서 200킬로쯤 떨어진 어느 외딴 섬의 존재는 관광객도, 심지어 본국의 주민들도 몰랐다.

마땅한 이름도 없어 알파벳과 숫자 몇 개의 조합으로 명명된 그 섬은 겉으로 보면 그저 평범한 무인도였다.

그러나 우뚝 솟은 산봉우리 아래엔 일반인 감히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지하 공간 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 육각형 모양의 어두운 회의실에 면사포를 쓴 인간들이 모였다. 모두 합해 17명이었다.

인종도, 국적도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각성자였다.

“대주교, 당신 나라에서 제법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던데.”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남미계 미녀, 아리에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육각형의 테이블 중 한 꼭짓점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 고건룡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요망한 여우 년이 죽지 않고 살아 있던 게지.”

“내버려 둘 거야?”

“글쎄.”

고건룡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뜸을 들이다가 이어 말했다.

“발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군. 일종의 유희랄까.”

“큰일을 앞두고 취할 태도는 아닌 것 같소만.”

고건룡과 정확히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진중한 어조로 딴죽 걸었다.

“속히 대처하는 게 옳을 듯한데, 대주교 생각은 어떠시오.”

“걱정할 거 없습니다, 빌리안. 미꾸라지 한 마리가 대양을 흐린들 얼마나 흐리겠습니까.”

“대주교께서 나서기 싫다면 내 개인적으로 행동하겠소.”

“하하하, 그럴 거 없습니다. 그냥 두시지요.”

고건룡이 너스레를 떨자 빌리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리에나가 치렁치렁한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다가 말했다.

“그나저나 그 할망구도 대단하네. 두 번이나 죽였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한동안 뜸하길래 이번엔 진짜로 죽은 줄 알았더니, 정말로 무슨 요술이라도 부리는 건가?”

“그녀도 우리와 같은 최후의 일원이니 뭔가 남다른 것이 있는 거겠지.”

잠자코 있던 인도계 사내, 아루쉬가 특유의 영어 억양을 자랑하며 대답했다.

아리에나는 아루쉬를 심드렁히 쳐다보다가 고건룡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주교, 당신 그 할망구랑 같은 나라였지? 코리안들은 다 그렇게 별나?”

“글쎄, 잡담은 이쯤 하고 일 얘기를 하지.”

“치, 일 얘기할 게 뭐 있다고.”

무시하는 듯한 고건룡의 태도에 아리에나가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때 아루쉬가 불쑥 물었다.

“대주교, 아프리카는 슬슬 정리된 것 같은데 다음 장소를 지명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기둥을 세울 장소는 아르헨티나로 하지요.”

“에에!? 아르헨티나? 왜?”

아리에나가 기겁하며 반문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태생이었다.

고건룡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다른 곳으로 해도 되잖아. 브라질도 있고 칠레도 있는데 굳이 아르헨티나를…….”

아리에나가 안절부절못하자 고건룡이 비릿하게 웃었다.

“인제 와서 모국에 미련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리에나가 말끝을 흐리다가 별안간 태세를 바꾸며 버럭 했다.

“그래! 미련 있다, 어쩔래! 인간들 뒤져 나가는 거야 상관없지만 고향 땅이 짓밟히는 거 보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단 말이야.”

“어차피 다 같은 운명이 될 처지다. 잔말 말고 대주교의 결정에 따라.”

“지랄! 그렇게 좋으면 네 나라로 하던가.”

“네년은 대체 회의에 왜 참석하는 거지? 인도와 중국은 제물로 써야 하기에 기둥을 세울 수 없다. 그것도 기억 못하나?”

“닥쳐, 깜둥이 자식아. 제발 부탁인데 넌 나한테 말 걸지 마. 귀가 썩는 기분이니까.”

아리에나의 폭언에 아루쉬가 으르렁거렸다.

“뭐? 깜둥이? 지금 말 다 했나?”

“흥, 네까짓 게 꼬나보면 누가 겁먹을 줄 알아?”

“내 성질을 자극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너를 찢어 버릴 수도 있다.”

“하! 이젠 하다 하다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다 설치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왜 내가 너 같은 놈이랑 같이 방주에 올라야 하지?”

“불만인가? 좋아, 그럼 네년은 방주에 오르지 못하도록 다리를 다 잘라 주지. 아니면 목을 잘라 줄까? 말만 해라.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아루쉬와 아리에나. 두 남녀가 당장 죽일 듯이 살기를 뿜어냈다.

회의장에 앉은 인원들은 혀를 차거나 한숨을 내뱉기만 했다.

그때 두 사람의 살기를 가볍게 압도하는 거대한 기운이 회의장을 감쌌다. 아루쉬와 아리에나가 헉 숨을 집어삼켰다.

“둘 다 그쯤 하지.”

고건룡이 짧게 읊조리자 아루쉬와 아리에나는 즉시 기세를 거두었다.

“쳇! 대주교 때문에 참는 줄 알아!”

“네년은 가급적 내 눈에 띄지 말아라. 내 인내심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니까.”

한편에선 빌리안이 ‘하여간 천박한 것들 같으니.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군.’이라 중얼거렸다. 그가 번뜩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마침 방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오만, 방주는 어디로 할 작정이오. 역시 아일랜드가―”

“방주는 한국으로 할까 합니다.”

“한국? 대주교네 나라를 말하는 거요?”

“예.”

한국이 거론되자 아리에나가 기가 찬다는 듯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뭐야! 나 보고는 모국에 미련이 있니 없니 하더니만 정작 방주는 자기네 나라로 하겠다고? 이거 완전 내로남불 아니야! 아, 그렇구만? 그 할망구가 날뛰게 내버려 두는 것도 대주교네 나라에 기둥을 세우지 않으려고 꼼수 부리는 거 아냐?”

“아리에나, 진정해라. 그런 게 아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대주교, 어지간해선 당신 의견에 따르지만 이건 나도 좀 아닌 것 같군. 한국은 방주로 삼기에는 인구가 너무 많소. 또 쓸데없이 넓지. 방주로 삼으려면 지상을 말끔히 정리해야 한다고 한 게 바로 당신 아니오?”

“그래서 한 말입니다.”

고건룡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건룡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아주 사악한 미소였다.

“세 번째 기둥이 올라갈 때 첫 번째 계시가 내려질 것입니다. 적어도 두 번째 계시 전까지는 한반도를 말끔히 정리해 놓겠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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