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3화 (83/151)

83. 재회

솔직히 얼굴이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았을 때 그냥 관두자 싶었다. 하이에나가 사자를 사냥할 순 있어도 어디까지나 무리에서 이탈한, 늙고 병든 사자를 사냥하는 것이다.

표적 옆에 팔팔한 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너무 분해.’

고병갑은 이가 갈리는 심정이었다. 눈앞에 다 잡은 사냥감이 있었는데! 그게 어디 보통 사냥감인가? 자그마치 15억이나 하는 놈이란 말이다!

‘상도도 없는 것들이……. 감히 일대일 일기토에 끼어들어?’

누가 말했던가, 분노는 최고의 원동력이라고. 실로 들어맞는 말이다. 머리에 마구니까 끼면 이성적인 판단력은 흐려질지언정 추진력 하나만큼은 끝장나게 올라간다.

‘고대의 상점. 트로바틴의 영혼. 70만 수정. 닥치고 구매.’

고병갑은 충동적으로 트로바틴의 영혼을 사들였다.

이 기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북 원정 당시 발록을 잡았던 일등 공신이다. 영혼을 취하면 S급 상위에 버금가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끔찍한 후유증을 동반하기는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영혼과의 동화를 시도했다.

[동화를 시작합니다. 1%, 2%, 3%…….]

“으극……!”

머릿속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밀려들어 왔다. 저번엔 드넓은 초원을 휩쓰는 군세의 기억이었다. 이번엔 또 달랐다.

-전군! 사격 개시!

호령에 맞춰 수천, 수만 발의 화살이 일제히 쏘아졌다. 화살은 하늘을 가리며 적군에게 쏟아져 내렸다. 화살통을 전부 비워 낸 궁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냈다.

-돌격! 돌격하라!

-우리는 이 전장에서 죽어야만 한다! 저 신성 군사들에게 사라온의 저력을 보여 주자!

-랜드리올을 위해!

창칼, 둔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그들은 매우 비장했고,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먹구름 낀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자 그 패기와 용기마저도 공포로 덧씌워졌다.

-알샤론이다!

-시… 신성, 신성 전사가 나타났다!

-도, 도망쳐! 살려 줘!

알샤론은 덩치가 50미터는 더 됐다. 그가 휘두르는 창은 아스빌람의 그 어떤 기둥보다 크고 굵었다.

창이 대지를 한 번 휘저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그 무자비한 폭력 앞에 사라온 병사는 개미나 다름없었다.

트로바틴은 먼발치에서 부하들이 쓸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꽉 쥔 주먹이 손톱에 패여 피를 뚝뚝 흘렸다.

오늘에야 기필코 저놈을 잡아내리라!

그가 원뿔 모양 장창을 집어 들고 날아올랐다.

얄사론이 낌새를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대한 창을 찔렀다. 트로바틴의 시각에서 보면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알샤로오온!!

트로바틴의 외마디 고함과 함께 회상이 끝났다.

[오류! 영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영육(靈肉)이 아닙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신체 강도가 기준치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동화율이 낮아집니다.]

[트로바틴의 영혼과 동화를 완료했습니다. 동화율: 73.95%]

“허억, 허억, 허억… 으윽! 으으아아아!!”

영혼과 동화가 완료되니 이제 자아의 주도권을 놓고 싸움이 벌어졌다.

고병갑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붙잡았다. 육체를 탐하는 고대의 망령에 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분노를 되뇌었다.

몇 분간의 보이지 않는 사투 끝에 그는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위험했다. 하마터면 잡아먹힐 뻔했어.’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을 벌였는지 체감됐다. 고작 돈 몇 푼…….

‘몇 푼은 아니지. 셋이 합치면 45억인데.’

어쨌건 돈 때문에 몸을 건 도박을 벌이다니. 철부지 짓인 건 변함없었다. 더욱이 70만 수정이면 고블린들에게 집을 몇 채나 더 지어 줄 수 있단 말인가?

“애들이 피땀 흘려 모은 수정이다. 결코 헛되게 써서는 안 돼. …애들아 기다려라. 현상금 타면 소고기 배 터질 때까지 먹게 해 줄게!”

고병갑은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도망친 무뢰배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 * *

“알파, 도망쳐.”

오메가가 알파를 내려 주며 속삭였다. 복면에 가려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알파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나 혼자 어떻게 도망쳐? 차라리 함께…….”

“베타 당하는 거 봤잖아.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포인트로 가서 마스터를 모셔 와.”

“그러니까 하는 소리야. 우리 중 가장 약한 네가 뭘 어쩌겠다는 거야?”

“리미트를 풀겠어.”

오메가가 왼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마치 수갑처럼 팔을 동여맨 일곱 개의 팔찌가 드러났다. 그 마감이나 재질만 봐도 고가의 아티팩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메가는 거침없이 첫 번째 팔지를 붙잡고 뜯으려 힘을 주었다. 알파가 즉시 제지했다.

“너 미쳤어? 이건 지금 사용할 게 아니라고!”

“여기서 우리 셋이 다 붙잡히면 어차피 말짱 도루묵이야. 내가 저자를 막을 테니 어서 베타를 데리고 달아나.”

“저 남자는 우릴 죽일 생각이 아니야. 일단 항복하는 척하자. 마스터께서 어떻게든―”

“이 콩알만 한 것들이 어디서 잔대가리를 굴려?”

“헉!?”

고병갑이 눈 깜짝할 사이 접근해 검을 내질렀다. 알파와 오메가는 간신히 반응해 몸을 피했다.

검이 바닥을 때리니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주변의 나무는 충격파를 이기지 못해 뿌리째로 뽑혀 나갔다.

‘더럽게 날쌔네.’

죽일 생각이 아니었기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만 피해 낼 줄은 몰랐다.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다.

그가 내리찍었던 칼을 쳐올리며 검기를 뿌렸다. 십수 발의 검기가 장애물을 모조리 박살 내며 괴한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어디 이것도 한 번 피해 보시지?

“끄윽!”

알파가 양손을 뻗으며 카르마 방벽을 생성했다. 수십 겹의 카르마 피막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은 웬만한 A급 탱커가 만들어 내는 것보다도 굳건했다.

하나 고병갑이 내지른 검기를 세 발도 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쿨럭!”

알파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메가가 얼른 그 앞을 막아서 공격을 받아 냈다. 검기 폭풍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두르고 있던 망토며 뭐며 다 찢어지고 피 칠갑한 몸뚱이가 드러났다.

“아… 아…….”

알파가 어쩔 줄 모르고 오메가를 더듬거렸다. 둘러업고 내빼려 했지만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몸으론 무리였다.

그때 저 먼 곳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대검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고병갑의 머리통을 노렸다.

‘이건 또 뭐야.’

고병갑은 선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내력을 뿜어냈다. 대검이 방출되는 내력을 이기지 못하고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그때 신속(迅速)의 인영이 튕긴 대검을 붙잡고 재차 휘둘렀다. 대검엔 어마어마한 카르마가 응집돼 있었다.

‘아까 그놈이군. 저걸 생으로 맞았다간 자칫 위험할 수 있겠어.’

검에 내력을 흘려보내 거대한 흉기로 만든다. 잠시 후 두 거물이 맞부딪쳤다. 힘과 힘이 격돌하자 접점을 중심으로 가공할 파동이 퍼져 나갔다.

“끄으으으!”

베타는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 진땀을 빼야 했다. 이가 부스러질 듯 턱에 힘을 주는데 불쑥, 고병갑의 손아귀가 다가왔다.

‘피할 수 없다!’

아차 싶은 순간 베타는 멱살이 잡혔다.

쾅!

“커허헉!”

고병갑은 거침없이 상대를 패대기쳤다. 크레이터 위에 다시금 구덩이가 생길 정도로 거센 메치기였다.

쾅! 쾅! 쾅!

그러길 몇 차례. 베타가 죽은 오징어처럼 축 늘어졌다. 고병갑은 놈의 멱살을 끌어 올려 괴한들이 모여 있는 곳에 던져 버렸다.

알파, 베타, 오메가.

고병갑의 표현을 빌리자면 괴한 1, 2, 3이 나란히 뻗었다.

그렇지만 승리를 자축하거나 압도적인 힘에 우쭐할 겨를이 없다. 고병갑의 표정은 오히려 심각했다.

‘동화가 풀리기 전에 헌터들한테 인계해야 해.’

영혼과 동화가 풀리면 격통이 밀려온다. 그렇게 되면 인계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게 된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시간은 충분했다. 고병갑은 사이좋게 늘어진 괴한들에게 다가갔다. 한 녀석은 검기를 정면으로 받아 낸 통에 옷이 다 해져 있었다. 복면도 반쯤 찢어졌고.

‘인계할 때 하더라도 상판은 봐야지.’

고병갑이 성큼성큼 그리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나마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알파가 비틀거리며 막아섰다.

고병갑은 검을 들어 올리려 다가 말았다. 저 상태라면 구태여 검까지 쓸 필요가 없다. 몇 대 쥐어박으면 그만이다.

“우리를 보내 줘!”

앙칼진 여아의 목소리. 고병갑은 감흥 없이 대꾸했다.

“내가 왜?”

“앞으로… 앞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거야. 여기서 우리를 붙잡으면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돼. …당신은 강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이 아는 대다수의 사람은 다 죽을 거야!”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하고 있어? 기껏 생각해 낸 게 고작 그거냐? 창의력은 좋았는데 진정성은 형편없구나.”

“다, 당신. 이대로면 후회할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글쎄, 후회 값으로 45억이면 제법 후한 것 같은데.”

“그딴 종이 쪼가리가 문제가 아니라고!”

“그딴 종이 쪼가리?”

고병갑의 혈색이 붉어졌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알파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딴 종이 쪼가리 때문에 사람이 뒤져 나가고, 뒤져 나가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하는 거다. 네놈들이 무슨 정신 나간 발상으로 발전소를 때려 부수는지는 모르겠다만 너희가 저지르는 짓보단 내가 지금 하는 짓이 더 가치 있을 거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시간 끌 작정이었다면 시도는 좋았다. 근데 난 얼른 현상금 타서 애들 소고기 사 주러 가야 하거든? 노닥거리는 건 끝이다.”

“읍!?”

고병갑이 손을 뻗어 알파의 머리통을 쥐었다. 그리고 짧고 격하게 내력을 방출했다. 알파는 곧 힘을 잃고 쓰러졌다.

“서두르자.”

고병갑은 칼을 거둔 뒤 자빠진 괴한들을 수거했다. 이놈들은 체구가 작으니 어찌어찌 짊어지고 갈 수는 있으리라.

물론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그는 짧게 심호흡한 뒤 괴한들이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을 벗겨 냈다. 우선은 계집의 것부터였다.

‘뭐야, 이거?’

복면이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다. 찰거머리처럼 피부에 착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도 아티팩트인가? 돈지랄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구먼.’

그래도 쥐어뜯듯 힘을 주니 어찌어찌 벗겨지긴 했다.

곧 괴한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와 금발을 가진, 이국적인 얼굴의 여아다.

‘뭐… 라고?’

괴한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고병갑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소녀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놈들도?’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나머지 두 괴한의 복면도 벗겨 냈다.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각각 제인, 도은호, 강한철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작년 여름경. A랭크 균열에 짐꾼 노릇을 하러 갔다가 만난 자들이었다. 단 하루 대타로 일을 뛰어 준 것뿐이지만 그들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에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했다.

왜? 어째서 이 얼굴들이 여기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어쩐지 수상하더라니!’

그때도 조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재회하니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것들은 당최 뭘 하는 놈들이야?’

그런 원론적인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며 상념을 떨쳐 냈다.

일면식이 있긴 해도 지인인 것은 아니다.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간 인연일 뿐이니까. 그러니 이놈들을 관할에 넘기는 일에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다만 등 뒤가 섬뜩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애들은 분명 자기들이 ‘마스터’라고 부르는 여인과 함께 있을진대?

그런 생각을 하려는 순간 등 뒤로 거대한 살기가 느껴졌다.

‘이런!’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뿌렸다. 무언가 검과 부닥치며 불똥을 튀겼다.

그의 눈이 커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허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팔과 검만 비쭉 튀어나와 있었다. 이윽고 공간이 일렁이며 더 많은 부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마치… 아스빌람으로 통하는 문과 비슷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망토를 두른 늘씬한 여인이었다.

푹 눌러쓴 후드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병갑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다!’

그녀가 고병갑 뒤로 늘어진 아이들을 흘겨보았다. 그러곤 세차게 검을 튕겼다. 고병갑은 서너 걸음 물러나며 자세를 다잡았다.

‘저 아우라, 위험하다.’

육감이 마구 고함을 질렀다.

제길, 기세에서 지면 어쩌자는 거야? 그가 이를 갈며 연신 내력을 뿜어 댔다.

그때 여인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관두세요. 당신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지랄! 남의 집 냉장고를 몇 번이나 비우게 만들었으면서 이유가 없다고?”

“……?”

“너희 대체 정체가 뭐야?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지?”

여인, 김하나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최상급 포션이 들려 있었다.

“어딜!”

고병갑이 즉시 달려들어 검을 뻗었다. 그런데 잘 나아가던 검이 어느 순간에 이르자 갑자기 궤도를 틀었다. 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다시 보니 김하나가 선 곳에 반구형 막이 처져 있었다. 그 안에선 묘한 기류가 흘렀다.

보호막 같은 게 아니다. 저건…….

“소용없습니다. 공간을 격리했어요. 당신으로선 이곳에 닿을 수 없―”

“헛소리!”

“음!?”

일순 그의 검에 내력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폭풍이 반구형 막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공간이 깨진다고?’

김하나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이들에게 포션을 먹이고 한 명씩 자신의 아공간으로 옮겨 보냈다.

마침내 공간이 박살 났을 때 이미 세 아이는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경악한 건 고병갑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말고 저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여인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진정하세요!”

“너 같으면!”

눈앞에서 45억이 날아갔는데 어떻게 진정을 하냐? 고병갑은 기가 차는 심정으로 검만 휘둘렀다.

매서운 검세에 김하나가 뒤집어쓴 후드도 벗겨졌다. 역시나 기억 속의 그 얼굴이었다.

“쳇!”

그녀가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고병갑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큰 기술을 사용했더니만 슬슬 동화가 풀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대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믿을 수 없군요. 당신이 이레귤러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하다니.”

“뭐? 이레귤러?”

“세간의 틀을 깨부수고 한계 너머까지 성장할 수 있는 이들을 그리 부르죠. 난 그런 사람들이 필요해요. 내가 조금 더 빨리 당신을 찾아갔어야 했는데 내 실책이군요. 하나 확실한 건,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무슨 헛소… 큭!”

고병갑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동화율이 낮아 트로바틴의 영혼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동화가 해지됩니다.]

[트로바틴의 영혼이 소멸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하필 이럴 때!

큰일이었다. 영혼의 도움 없이 김하나를 상대할 수는 없다. 하물며 후유증으로 격통이 찾아온다면 도망치는 것조차…….

‘잠깐. 버틸 만하잖아?’

전과는 달랐다. 저번에는 의식을 잃을 만큼 커다란 고통에 시달렸지만 지금은 그저 근육이 쑤시고 저릿한 정도였다.

물론 이 상태로도 전투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도망치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슬슬 눈치를 보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 김하나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뭘 느낀 건지 고병갑도 알 수 있었다. 사람들. 그러니까 헌터들이 이리로 오고 있다!

“상황은 언제나 기대하는 방향과 반대로 흘러가는군요.”

“다가오지 마!”

고병갑의 엄포에도 김하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가 얼른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김하나의 손아귀에 붙잡힌 뒤였다.

“해치지 않아요. 잠깐 실례하지요.”

그녀가 대뜸 고병갑의 목 뒤를 살폈다. 옷을 들쳐 등도 꼼꼼히 살폈다.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다행이네요. 조언 하나 해 드리죠. 목과 등에 육망성을 새겼거나, 육망성 팬턴트를 가지고 있거나, 일루미션에 소속된 사람들과는 엮이지 마세요. 그들은 인류의 적입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시간이 없네요.”

김하나가 고병갑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짧게 카르마를 뿜어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으로 전에 없던 어떤 정보가 스며들어 왔다. 그건 좌표였다.

“그곳으로 찾아오세요. 세계의 진실에 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끌고 와도 소용없으니 반드시 혼자 오길 바라요. 그럼 이만.”

김하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은신 같은 기술을 쓴 게 아니었다. 단어 그대로 사라졌다.

“저쪽이다!”

“서둘러!”

뒤쪽에서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가깝다.

‘제길! 일단 피하자.’

고병갑도 일단 아스빌람으로 넘어갔다. 괴한을 잡지 못한 이상 저들에게 들켜 봐야 좋을 게 없다. 괜한 의심만 사겠지.

그의 의도대로 이날 헌터들은 산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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