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2화 (82/151)

82. 재회

파르르르르!

발전 단지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고 몇 초 뒤.

그 충격파가 도로까지 밀려왔다. 가로수가 휘청이고, 차체는 들썩였으며 창문은 마구 진동했다. 거센 태풍이 몰아치는 듯했다.

고병갑은 입을 떡 벌리고 창밖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흔히 ‘사고가 마비된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이 딱 그랬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불기둥이라니. 미사일이라도 떨어진 건가?

‘설마.’

번뜩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발전 단지 습격 사건’을 떠올린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다이얼에 들어가 119를 찍었다가 지우고 112를 찍었다가 다시 119를 찍는 멍청한 짓을 두세 번 정도 반복했다.

‘아니다.’

신고는 진작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좋을까? 불구경이나 좀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까?

핸드폰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에라이!”

고병갑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검을 챙긴 뒤 곧장 불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하에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반쯤 본능에 몸을 맡길 때였다.

그의 다리가 뻗을 때마다 불길은 가까워졌다. 정신없이 내달리길 수 분. 그는 발전 단지를 감싸는 장벽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훌쩍 뛰어 5미터 높이의 벽에 오른다. 그때 짜기라도 한 듯 또 한 곳의 발전소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쾅!

“염병!”

끔찍한 굉음에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는다. 뒤이어 후끈한 충격파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경비도 세워 놓더니만 이게 무슨 지랄이야!?”

그가 욕지거리를 뱉으며 단지 내를 빠르게 훑었다. 보이는 거라곤 돔 모양 콘크리트 건물뿐이다.

이번엔 시력 대신 감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반대쪽이다.’

이쪽 방면이 아닌 반대쪽 방면에서 다수의 기척이 감지됐다. 하긴, 불길이 치솟는 것도 그쪽이었다.

힘껏 땅을 박차려던 순간, 그가 다급히 몸을 멈추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동쪽 방향. 그곳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있었다.

‘기척이다. 상당히 빨라.’

아주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머릿수는 많아 봐야 한둘 정도. 놈은 난리가 난 반대쪽으로 쭉쭉 뻗어 나가는 중이었다.

진행 속도가 무척 빠르다.

고병갑은 왠지 도둑이 꽁무니를 뺀다는 감상을 받았다. 그래서 복잡한 생각 따위 전부 집어치우고 몸을 돌렸다.

‘제기랄, 진짜 괴한이면 어떡하지?’

뒤늦게 그런 망설임이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괴한은 최소 S급 이상의 실력자다. 어중이떠중이 혹은 어설픈 테러리스트가 아니란 말이다.

‘비살상 주의자들이라니까 죽지는 않으려나?’

역설적이게도, 발전 단지를 습격한 괴한들은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는 주제에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물론 전투 중에 다치거나 발전 단지의 폭발-붕괴에 휘말려 다치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괴한의 칼에 맞아 죽었다는 사람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저런 잡념을 하는 사이 의문의 기척과 상당히 가까워졌다.

‘…뭐야? 날 피하지 않는다고?’

만약 이 기척이 정말 괴한이고, 괴한들이 듣던 대로 상당한 실력자라면 저쪽에서도 고병갑의 존재를 인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멀어지거나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고병갑의 입꼬리가 살벌하게 올라갔다.

그가 검을 세차게 뽑으며 바닥을 찼다. 기척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 코앞이다. 저 건널목만 넘으면…….

팟!

“흡!?”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다. 검은 망토로 전신을 가린 괴한이 눈 깜짝할 사이 접근해 검을 날렸다. 인지하지 못할 만큼 빠르고, 소리 없는 공격이었다.

만약 저 칼에 맞아 죽는다면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고병갑 역시 호락호락한 애송이는 아니었다. 그는 미리 뽑아 놓은 검을 얼른 쳐들어 방어했다.

꽤 묵직한 중량이 팔을 통해 전해졌다. 그의 눈이 빠르게 상대를 살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면상이 보이지 않았다.

곧 그의 시선이 검으로 향했다.

‘…칼등이라고?’

멀쩡한 칼날을 놔두고 칼등을 휘두른다니. 이쯤 되니 명명백백해졌다.

‘이 고병갑이를 무시한단 말이지?’

“흐아아!”

그가 세차게 검을 튕겼다. 괴한은 속수무책으로 튕겨 나갔다.

공중제비를 돈 괴한이 침착하게 착지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놈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뭐가 저렇게 작아?’

고병갑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전신 망토를 두른들 작은 체구까지 가려지지는 않았다.

괴한은 거의 쪼꼬미 녀석들과 비슷할 만큼 왜소하다. 반면 들고 있는 외날 검은 무식할 정도로 컸고.

“사살 5억. 생포 15억.”

“……?”

“부탁인데 죽지 마라.”

그게 뭐 어쨌다고?

적인 이상 그게 애새끼건 꼬부랑 노인네건 아무 상관 없다. 고병갑의 눈엔 그저 돈뭉치로 보일 뿐이었다.

그의 검이 맹수의 앞발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괴한은 다급히 검을 맞댔다. 힘을 겨루는데 비등비등했다. 아니, 점점 저쪽으로 기울어 갔다.

고병갑이 더 많은 내력을 뿜어내자 대검을 쥔 괴한의 팔도 덩달아 진동했다.

“크윽!”

“왜? 막상 붙어 보니 생각과 다르냐?”

“쳇!”

괴한이 예술적으로 검을 흘렸다. 놈은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몸을 빼냈다. 고병갑의 관점에선 눈앞의 적이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빼는 걸 보니 달아날 심산인 듯했다.

‘누가 보내 준대?’

고병갑이 번개처럼 달려가 앞발을 내질렀다. 괴한은 널따란 검면으로 어찌어찌 막았지만 차인 방향으로 날아갔다.

“꺅! 끄으…….”

지척에 있던 벽에 처박힌 괴한이 신음을 흘렸다.

목소리가 앳되다. 거기다가 무척이나 가늘다.

‘계집애 목소리잖아? …아니, 그것보다 뭐가 이렇게 약해? 아니면 내가 엄청나게 강해진 건가?’

솔직히 좀전의 앞차기는 견제용으로 날려 본 것이었다. 적이 버텨 낼 줄 알고 연속 공격을 준비했는데 그 시도가 무색해졌다.

심지어 지금 힘의 100%를 다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딘가 미심쩍다고 생각하려니 괴한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러곤 피를 토했다.

“쿨럭!”

복면 아래로 뭉친 핏덩이가 줄줄 흘렀다. 가만 보니 발아래엔 피 웅덩이가 고여 있다.

고작 발차기 한 방 맞았다고 저 난리가 날 일은 없지. 그렇다면.

‘이미 상당히 당한 모양이군.’

하기야 발전 단지 지키겠다고 얼마나 많은 헌터가 동원됐던가? 다들 괴한을 잡으려 혈안이었을 것이다.

‘양념 친 사람들한텐 미안하지만 막타는 내가 친다.’

고병갑이 검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내력이 실체를 잡으며 커다란 망치를 만들어 냈다.

다리라도 분질러 놓을 심산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생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망치를 크게 휘둘렀다. 괴한은 당연히 피하려 했지만 그 궤도까지 계산된 공격이었다.

괴한은 하는 수 없이 재차 방어를 시도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쩡!

“크윽―꺅!”

괴한이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날아가 처박혔다. 놈은 콘크리트 구조물 하나를 박살 내고야 간신히 멈추었다.

“쿨럭!”

반건조 오징어처럼 축 늘어진 괴한. 가까이서 보니 더 작고, 더 엉망이었다. 벌어진 망토 틈새로 상처투성이 몸이 드러났다.

이 상태로 살아 있는 게 용할 지경이다.

그래서 동정심이 들었냐고? 지랄.

애초에 발전소 습격이라는 미친 짓거리를 벌인 놈들이 잘못한 거다.

고병갑이 괴한의 다리를 부수려 망치를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이런 썅!”

근처에 있던 발전소 한 기가 폭발했다. 새빨간 불기둥이 치솟음과 동시에 열풍이 밀어닥쳤다.

“젠장할!”

그는 내력을 전방에 펼쳐 열기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론 계속해서 괴한을 관찰했다.

저렇게 놔두면 익어 버리겠는걸? 죽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그런 걱정 아닌 걱정도 잠시. 제2의 괴한이 나타나선 늘어진 녀석을 안아 들었다.

“뭐야? 어디서―읔!”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제3의 괴한이 나타나 고병갑을 걷어찼다. 고병갑은 차인 방향으로 곤두박질쳤다.

‘제길. 검이…….’

날아가던 도중 검을 놓쳤다. 그가 얼른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괴한이 팔과 가슴을 밟았다.

‘크흑! 이놈도 애새끼 같은데 무슨 힘이…!’

민망한 말이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산에 짓눌린 기분이었다.

놈이 검을 들어 올렸다. 칼끝이 고병갑의 목을 정확히 노렸다. 거대한 대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졌다.

‘주, 죽는―!’

“죽이면 안 돼!”

별안간 앙칼진 고함이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처음 맞붙었던 계집애였다.

칼날이 고병갑의 목젖에 닿을락 말락 하게 멈추었다. 놈이 못마땅한 태도로 검을 거두더니 가차 없이 주먹을 쏘았다.

쾅! 쾅! 쾅!

“크헉!”

주먹이 아니라 무슨 쇠몽둥이 같다. 연신 주먹을 얻어맞던 고병갑이 눈을 까뒤집었다. 그제야 무차별 폭격이 멈추었다.

“…….”

고병갑이 기절한 것을 확인한 괴한들은 지체 않고 몸을 돌렸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데는 아주 잠깐이면 족했다.

홀로 남겨진 고병갑.

기절한 줄 알았던 그가 몸을 움직였다. 그가 덜덜 떨리는 팔로 허공을 휘저으며 웅얼거렸다.

“…고… 고대의… 상점.”

* * *

복면 차림의 세 사람이 날쌔게 다리를 놀렸다. 그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며 발전 단지에서 멀어졌다.

“으윽…….”

“조금만 참아, 알파. 곧 마스터가 오실 거야.”

알파를 업고 있는 오메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파는 통증 때문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래서 망토 자락을 입에 물고 신음만 삼켰다.

마주 달리던 베타는 수심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까 그 남자, 죽였어야 했어.”

“지정되지 않은 사람을 죽이면 큰일 나는 거 몰라? 마스터가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알파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알파는 원래 크게 다쳤었어. 함정에 걸렸잖아.”

베타가 끙 앓다가 던지듯 물었다.

“그나저나 그 남자, 어딘가 낯이 익지 않았어? 분명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관심 없어. 마스터랑 너희 외의 사람을 기억해 봤자… 어!?”

“헉!?”

오메가와 베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신들을 뒤쫓고 있었다.

마스터인가? 아니, 그녀는 이런 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나기로 했던 포인트도 아니었다.

“뭐야! 분명 꼬리를 다 자르고 왔는데? 혹시 그 남자인가?”

“웃기지 마. 분명 기절하는 거 확인했다고.”

“빨라. 이러다 따라잡히겠어.”

베타가 등의 검집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알파를 데리고 먼저 가. 내가 처리할게.”

“서둘러야 해.”

“알겠―”

베타는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둠 속에서 뭔가 날아들었다.

그건 거대한 에너지의 응집체였다.

“윽!”

베타가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받아쳤다. 검 손잡이를 타고 가공할 충격이 전해졌다.

애석하게도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섬광을 번쩍이며 날아오고 있었다.

“사람 퍽치기해 놓고 그냥 내빼려고? 갈 때 가더라도 깽값은 주고 가야지!”

“크흑!”

“45억 내놔!”

정말로 아까 그 사내였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접근하더니 무지막지한 검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상단, 중단, 하단.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었다. 사내가 한 번 검을 휘두르면 모든 방위에서 칼날이 뻗어 나왔다.

“앗!”

한순간, 베타가 무방비하게 허점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지만 사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베타의 몸으로 무지막지한 참격이 다섯 발이나 쇄도했다.

“커학!”

마무리로 발차기까지 꽂아 넣는 사내.

베타는 차인 방향으로 서른 걸음도 넘게 날아갔다. 온 사방이 혈흔으로 낭자했다.

오메가는 가던 걸음도 멈추고 허망한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베… 베타가 저리 무력하게?’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마스터를 제외하고 이렇게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는 본 적도 없었다.

‘정말로 아까 그 남자가 맞기는 한 거야?’

이상했다. 생김새는 그대로인데 분위기는 완전 딴판이었다.

“귀… 귀신…….”

사내가 내뿜는 정체불명의 아우라는 더할 나위 없이 섬뜩했다. 만약 귀신이란 게 실존한다면 딱 저런 모습이리라.

그때 사내가 금안을 번뜩이며 이쪽을 쏘아보았다.

“이 콩알만 한 놈들. 너희 때문에 70만 수정이나 썼으니 곱게 돌아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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