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80화 (80/151)

80. A랭크에 도전하다

석양 진 발타드렌. 고블린들이 슬슬 일과를 마무리 지을 즈음 메리린이 늘어놓은 놀라운 이야기도 종장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네.」

「우리는 결단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평화를 바란 것이 어찌 죄가 된단 말입니까?」

메리린이 분노로 두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억울하긴 억울한 모양이다.

하나 고병갑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그녀의 심경에도 공감하는 바이나, 반대쪽 입장도 충분히 이해됐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을 사칭했으니…….’

절대신 마드무트가 지목한 사라온의 죄목은 신의 사칭, 한 단어로 오만이었다.

고병갑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등받이에 한껏 기댔다. 그러곤 메리린이 들려준 구담(口談)을 천천히 곱씹었다.

한 종족이 쇠락하기까지의 대서사시는 족히 수백 년, 어쩌면 천몇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작됐다.

* * *

지금은 연호가 완전히 스러졌기에 구체적으로 ‘몇 년 전이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아주 먼 옛날인 것은 자명했다.

그런 먼 옛날에는 이곳 대륙에 수많은 종족이 모여 살았다. 특히 ‘아인’이라 일컬어지는 지성체는 각자의 문명을 세우고 번영을 이루었다.

메리린의 이르길 사라온, 인간, 수인, 요정, 드워프, 깐프. 이 여섯 아인이 대륙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개중에선 당연히 사라온이 으뜸이었다.

하지만 대륙이 평화로웠냐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여섯 아인은 한 뿌리에서 나왔음에도 단합하지 못하고 허구한 날 싸워 댔다.

영토, 식량, 이념의 차이 등등. 서로에게 날붙이를 겨눌 구실은 차고 넘쳤다.

초대 사라온 로드가 아스빌람을 세운 이후 아스빌람력으로 1,014년이 지날 때까지도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었으니 지상엔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리고 아스빌람력 1,015년.

역대 최강의 로드라 일컬어지는 군주가 탄생했다. 그가 바로 8대 로드, 제왕 랜드리올이다.

집권했을 당시 그는 고작 12살이었다. 하나 그때 이미 아스빌람을 통틀어 그를 검술로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검술뿐만이 아니다. 랜드리올은 주술에도 능통했고 손재주나 의술 역시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호기심도 왕성했는데, 집권 2년 차엔 전권을 대리자에게 위임한 뒤 불쑥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무려 5년간이나 말이다.

그 5년 동안 그가 어디서 뭘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랜드리올이 처음 꺼낸 말은 이러했다.

-내 넓게 대륙을 둘러보니 지상의 만물이 서로를 미워하는 데 이유가 없더라. 그들의 증오는 허울뿐인 가짜이기에 이 땅에 뿌려진 피가 야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품었다고 욕하겠는가? 약함과 아둔함은 죄가 아니다. 초원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 사자의 몫이다.

-하여 나 랜드리올은 이 자리에서 선포한다. 천상의 성령들이 지상의 세태를 방관하고만 있으니 내가 지상의 신이 되어 질서를 다잡겠노라.

그전까지 사라온은 아인 간의 전쟁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다.

그들은 이미 대륙에서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어떤 종족도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랜드리올은 선대 로드들과 가치관이 달랐다.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닌 지상 만물의 평화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벌였다.

무려 26년에 걸친 대규모 전쟁이었다.

사라온의 군대는 백전 무패의 신화를 써 내려갔다. 제왕도 제왕이었지만 그를 보좌하던 장수들 역시 역대 최강이라 평가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랜드리올이 45세를 맞이했을 때 전쟁은 완전히 끝났다.

-전쟁이 끝났다. 지상의 만 종족이 사라온의 품 안에 들어왔으니 이제 전쟁도, 투쟁도 없다. 우리는 본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다시 한 뿌리로 돌아가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

전쟁의 혼란으로 시끌벅적했던 대륙은 랜드리올의 지휘 아래 빠른 안정을 찾아갔다.

그의 말대로 이제 아인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진실로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후 30년 넘게 평화가 이어졌다. 메리린은 그 ‘평화의 시대’에서 살던 세대였다.

랜드리올은 일흔을 넘겨도 청춘 때처럼 정정했고, 평화의 시대는 영원토록 이어질 줄 알았다.

천공을 가르며 신성 전사와 그들의 군대가 지상계에 강림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 * *

‘신성 전사라는 것들이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사라온을 쥐잡듯이 잡아 댔고, 다시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다. 사라온은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그놈들은 너무 강했어. 설상가상 손 아래 있던 아인들까지 사라온을 배반하고 신성 전사 쪽에 붙었으니… 메리린이 아인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려나.’

뒷얘기는 알고 있는 대로다.

사라온은 이곳 발타드렌까지 밀려나면서 꾸역꾸역 버텼으나, 끝내는 저주를 받아 풍비박산 났다.

그리고 현재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그럼 아스빌람이 멸망한 이후에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람?’

아스빌람이 멸망한 이후의 일에 관해서는 여전히 무지했다.

대륙을 딛고 살았던 아인들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고.

한때 비옥했다는 대지는 무슨 까닭으로 황무지가 됐으며.

지상을 배회하는 그러글의 정체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것까지 속 시원히 알아내고 싶었지만 현재로선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후우.」

고병갑은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인 뒤 꽁초를 비벼 껐다.

「그래, 얘기하느라 고생 많았다. 뭐… 내 말 몇 마디로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라온의 불행에 관해서는 참 유감이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과하마.」

「아닙니다. 로드께선 이계의 존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로드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말씀을 철회하시지요.」

「됐어. 뭘 또 철회해, 이미 뱉은 말을.」

메리린은 무척이나 공손했다.

그녀는 충성을 맹세한 이후 줄곧 이런 태도였다. 솔직히 말하면 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듣자 하니 나이도 50줄을 넘겼다던데…….

‘저 얼굴이 어떻게 50대냐.’

사라온의 수명은 230년 정도라고 한다. 장수하면 이백칠팔십까지도 산다던데, 하여간 입이 떡 벌어질 노릇이다.

하긴, 그랬으니까 랜드리올도 일흔의 몸으로 전선을 누볐던 거겠지.

「저기, 로드시여.」

잠시 딴생각하려니 메리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고병갑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별안간 입고 있던 상의를 들쳤다. 몸에 새겨진 지도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뭐 하냐?」

「저는 당신을 모시기로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전대 로드의 말씀을 가벼이 여길 순 없습니다. 전대 로드께선 제게 베르보니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팔을 쭉 뻗어 등 한곳을 찍었다. 매번 느끼지만 참 유연한 몸이다.

메리린은 들쳤던 옷을 놓으며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대 로드께서 허투루 그런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로드시여, 부디―」

「어어, 됐어. 나도 알아.」

고병갑은 손을 들어 올리며 메리린의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 볼 생각이었다. 거기에 아스빌람을 부흥시킬 뭔가가 있다고 했지?」

「네, 전대께서는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있는지는 모르고?」

메리린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아쉽네.」

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을 숨겨 놨길래 제 와이프 몸에 지도를 새기고, 지하실에 재워 놓기까지 했을까?

설마하니 재미로 그 난리를 벌이지는 않았을 테고.

‘전설의 검, 뭐 이런 거라도 숨겨 놨나?’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알고 있어?」

「예, 제 기억에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한 몸에 이렇듯 지도까지 있으니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그렇겠네.」

「저… 로드시여, 언제쯤 가실 생각이신지요? 소녀가 생각하기엔 내일 아침이라도 출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뭐?」

「네?」

잠깐 정적이 일었다. 이윽고 고병갑이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사래 쳤다.

「야야, 뭔 소릴 하는 거야? 당장 내일 아침에 어떻게 가?」

「예? 아, 안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보아하니 하루 이틀 거리도 아닌 것 같은데 무작정 떠날 수가 있나? 발타드렌에 체계가 완벽히 잡힌 것도 아니고 말이야. 충분히 준비하고 그 뒤에 나서든가 말든가 해야지.」

「아… 그렇군요. 그럼 언제쯤을 고려하고 계십니까?」

「음…….」

고병갑이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글쎄, 한 석 달 뒤쯤이면 되려나. 잘 모르겠네.」

「서, 석 달 말인가요? …너무 늦는 게 아닌지?」

「거기에 꿀단지 숨겨 놨어? 뭐가 그리 급해?」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하루빨리 아스빌람이 재건됐으면 해서…….」

「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너무 조급하게 굴 거 없다.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가도록 해.」

「편히 쉬십시오.」

메리린을 돌려보낸 후 고병갑도 자리를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의사당이었다. 사실 이름만 거창하지 그저 큰 건물일 뿐이다. 어떤 사안이 생기면 주요 인물들을 모아 논담을 나누는 장소였다.

그곳엔 공격대 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 그래. 다들 앉아.」

둥근 원탁에 둘러앉은 일곱 명의 고블린.

고병갑은 그 중심에 앉아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사담은 길지 않았다. 노닥거리자고 모인 것은 아니니까.

그는 지체 않고 본론을 꺼냈다.

「얘기했다시피 내일 A랭크 균열에 도전할 거다. 위험한 일이니만큼 행동 강령을 일러 줄 테니 새겨듣도록 해.」

「옙!」

그랬다. 고병갑은 내일 A랭크 균열에 도전할 심산이었다. 이제껏 해 온 것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일이었기에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 첫 번째가 정신 무장과 행동 강령 숙지다.

사실 행동 강령이라 봤자 뻔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고들 있고, 오늘은 푹 자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오냐, 내일 보자.」

고병갑은 아스빌람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캄캄하고 싸늘한 거실이 그를 맞이한다.

‘잠깐, 싸늘하다고?’

3월이긴 해도 아직 공기가 차다. 그래서 보일러를 항시 켜 두는데 집안이 춥다니?

‘설마?’

고병갑은 불안감을 느끼며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돌겠네! 또 정전이야?”

정전, 또 정전이다.

3월 초엽부터 시작된 발전 단지 습격 사건. 그 일이 있고부터 심심찮게 정전이 일어났다.

최초 습격 이후 3주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있었다.

괴한들은 한동안 뜸하더니 닷새 전 해남 발전 단지를 습격해 아주 박살을 내놓았다. 방비가 허술해진 틈을 교묘히 노린 것이다.

벌써 네 군데나 털린 탓일까? 어떨 때는 몇 시간씩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도 했다.

그로 인한 피해가 나날이 누적되니 이젠 온 국민의 관심사가 그리로 몰려 있었다.

고병갑으로서는 어머니가 안치된 병원이 제일 걱정이었다. 다행히 그곳은 비상 발전기가 항시 돌아가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어떤 미친놈들인지 몰라도 잡히기만 해 봐라. 사형시켜 달라고 청원 올릴 거야.”

이날은 하는 수 없이 냉수 샤워를 하였다. 그의 증오가 한층 더 커졌다.

* * *

결전의 날.

고병갑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토벌을 준비했다. 무기와 상비 포션을 챙기고 몸 상태를 확인한다. 다행히 아무 이상 없었다.

출발하기 전 아스빌람에 들러 공격대 인원들의 상태도 점검했다. 역시나 이상 무.

“좋아, 가 보자.”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오늘 그가 향할 곳은 강원도 영월군. 서울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다.

사실 서울 근교에도 A랭크 균열이 몇 있기는 했다. 하나 모두 걸렀다. 대형 길드에서 선점했을 확률이 99% 이상이기 때문이다.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생성된 게 가장 적합하다. 고병갑은 더 늦기 전에 차를 몰았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원주와 제천을 지나 영월 땅을 밟았다. 꼭두새벽에 출발한 덕분에 아직 8시도 되지 않았다.

“보자, 보자… 덕포리가 어디냐.”

아직 목적지인 것은 아니다. 영월군 시내에서 벗어나 시골 마을까지 들어가야 했다.

한적하다 못해 휑한 시골길을 내달린다.

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가드레일 너머로 드문드문 무장을 갖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저 인간들은 뭔데 저기서 무게를 잡고 서 있을까? 고병갑은 속도를 낮추며 슬쩍 흘겨보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가드레일 너머 넓게 펼쳐진 분지, 그곳에 마석 발전 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은 발전 단지를 지키기 위해 고용된 헌터일 것이다.

“살벌하다, 살벌해.”

정신 이상자 몇 놈 때문에 무슨 개고생인지, 원. 고병갑은 혀를 차며 제 갈 길을 갔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발전 단지로부터 15분 정도 더 들어가자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시골 마을. 인적은커녕 버려진 집과 논밭만이 즐비했다.

고병갑은 균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차가 삭는다. 헌터들이 자가용을 금방금방 갈아 치우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균열 한 번 더럽게 크구먼. 땅이 벌써 다 죽었네.”

꽤 커다란 균열. 저 안에는 최소 B랭크의 몬스터가 300마리 정도 우글거리고 있다.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는 뜻이다.

딱히 겁나지는 않았다. A랭크 균열이라면 이미 한 번 경험해 본 적도 있고.

“자, 한번 해 보자!”

그가 호기롭게 외치며 균열에 몸을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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