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사라온
「차, 참으세요! 그러지 말아요! 어머, 어떡해!」
에아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반면 고블린들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지켜볼 뿐이었다.
「커… 커흑!」
메리린이 잡힌 목을 풀어내려 안간힘 썼다. 안타깝게도 고병갑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내 말을 농으로 여기지 마라.」
「아… 알겠… 푸하!」
고병갑이 손을 거두었다. 메리린을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병갑은 바닥에 엎어진 쪼꼬미를 일으켜 세우며 온화하게 물었다.
「괜찮냐?」
「아… 응. 나는 괜찮다. 그냥 넘어진 거다.」
「새끼, 하체가 부실하니까 살짝만 밀어도 자빠지지. 물 뒤집어쓴 꼬라지 좀 봐라. 미역 줄기가 따로 없네.」
「우으…….」
노멀 고블린이 입술을 비쭉 내민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붕아.」
「예, 옙! 로드시여, 말씀하십시오.」
「이리 와 봐. 귀 좀 빌리자.」
그가 사붕이를 지척으로 불러들였다. 녀석이 가까이 다가오자 귀에다 대고 속닥였다.
「가서 도르마랑 도란을 불러와.」
「아, 알겠습니다!」
사붕이가 뛰쳐나갔다. 그가 이번엔 나머지 인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돌아가도록 해. 밤이 늦었다.」
「옙! 로드께서도 편히 주무십시오!」
고블린들은 군말 없이 명령을 따랐다. 다만 에아는 불안한 눈치로 우물쭈물했다.
「당신, 괜찮은 거 맞죠? 나는 좀 걱정이 돼요.」
「됐어.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잠이나 자.」
「정말이죠?」
「그렇대도.」
「…알겠어요. 그럼 믿고 돌아갈게요. 부디 대화로 잘 해결하길 바라요.」
구경꾼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자마자 그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고병갑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메리린은 아직도 주저앉은 자세였다. 퀭한 눈을 한 채로 말이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냐. 가서 앉지?」
「아… 네. 그럴게요.」
목소리도 기세도 한풀 꺾였다. 그녀는 순순히 말을 따랐고, 고병갑도 의자에 도로 앉았다.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그 난리를 벌였으니 분위기가 무거운 것도 당연했다. 어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기분이다.
「아까 일은 사과하마. 내가 좀 흥분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그들의 로드고, 그렇기에 마땅한 대처를 한 것뿐이야.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저도 딱히 옳게 행동한 건 아니니까요. 다만…….」
메리린이 입을 우물거렸다. 그 사소한 행동에서도 심란한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다만 너무 혼란스러워요. 나는…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동족이… 동족이 보고 싶어요.」
콕 찌르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했다.
동족이 보고 싶다는 말. 그 말은 고블린을 동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실 그녀의 심경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메리린과 도란은 확실히 다른 유형이었다.
‘도란은 처음에 백지 같은 상태였으니까.’
도란이 처음 나타났을 때 그녀는 순백의 상태였다. 아는 게 없으니 혼란에 빠질 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메리린은 다르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존의 지식과 새로운 정보 사이에 괴리를 느끼는 것이다.
‘역시 메리린은 고대의 존재인 건가?’
선뜻 받아들이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녀가 잠들어 있던 얼음실만 하더라도 그런 뉘앙스가 풍기지 않았던가.
‘만약 정말로 고대의 존재라면 까무러칠 만해. 인간으로 치면 후손이라고 나타난 족속이 원숭이인 셈이니까.’
고병갑은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지는 않았고, 그저 만지작대기만 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 곧 네가 원하는 녀석이 올 테니까.」
「저, 정말입니까? 동족이 오고 있는 거예요?」
메리린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 부르러 갔으니까 이제 슬슬 올 거야.」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메리린은 잔뜩 들떠서 문을 응시했다.
‘도란이 있어서 다행이야.’
도란을 보면 진정을 좀 되찾으리라. 참고로 도란은 오늘 당직이라 서쪽 성문에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부르는 건데. 고병갑이 쓴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몇 분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메리린이 기대 만발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시무룩해졌다.
「로드시여,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선 게 도르마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리린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호오, 저 여인이 깨어났군요.」
「자… 잠시만요. 저, 저자는 내가 찾던 동족이 아녜요! 저, 저런 건…….」
「로드! 저 왔어요!」
「아!」
도르마에 이어 곧바로 도란이 들어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하고 머리카락이 산발이다. 호출 명령을 듣자마자 뛰어온 모양이었다.
「음? 저 여자, 일어났네요. 그것 때문에 부르신 거예요?」
「뭐, 겸사겸사. 일단 둘 다 이리 와서 앉아.」
「네!」
「알겠습니다.」
도란은 예상과 달리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반면 메리린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그녀가 두 팔을 바들바들 떨며 바람 빠진 소리를 흘렸다.
「아… 아아…….」
「왜 저런대요?」
「흐엉헝!」
「으잉!?」
메리린이 불쑥 달려들더니 도란을 얼싸안았다. 그녀는 아이처럼 울며 눈물 콧물 범벅인 얼굴을 도란에게 비벼댔다.
당연히 도란은 질겁했다.
「이, 이게 미쳤나! 더러운 거 묻잖아! 떨어져!」
「흐아아앙! 도란! 도라아안!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흐헝어엉!」
「뭔 헛소리야? 그럼 살아 있지 죽어 있냐? 아, 비비지 말라고!」
‘뭐야!?’
메리린이 도란의 이름을 부르짖자 고병갑은 깜짝 놀랐다. 아직 소개해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름을 아는 것인가? 살아 있다는 건 또 무엇이고?
「너 진짜 죽을래? 저리 가라고, 멍청아!」
「아얏!」
도란은 질색팔색하더니 메리린을 거칠게 밀쳐 냈다. 떠밀린 메리린은 그 어떤 때보다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다.
「도… 도란? 어째서? 어째서 나를 거부하는 거니?」
「아, 짜증 나! 다 묻었잖아! 너 나 알아?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이야? 순 멀대 같은 게!」
도란이 옷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로드! 쟤 미쳤나 봐요! 솜니움으로 보내 버리면 안 돼요?」
‘솜니움이 무슨 짬 처리장이냐…….’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과열된 열기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고병갑은 노련하게 두 고블린을 진정시켰다.
「둘 다 진정해.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도란? 나를 못 알아보는 거니? 아냐, 그건 말도 안 돼. 네가 나를 모를 수는 없어!」
「무슨 헛소리야? 난 너 같은 거 처음 보거든?」
「메리린! 도란! 둘 다 조용히 해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입 열지 마.」
「…….」
고병갑이 으름장 놓자 두 여인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천신만고 끝에 모두 자리에 앉았다.
도르마는 이 상황 자체가 이해 안 되는 듯했고, 도란은 뾰로통하다. 메리린은 절인 시금치처럼 늘어졌다.
고병갑은 그 중심에서 서두를 텄다.
「자, 그래. 메리린, 네가 누구인지부터 시작해 보자.」
* * *
「저는 89대 만다라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제왕 랜드리올의 일곱 번째 첩입니다.」
메리린이 구슬픈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은 본인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대 아스빌람엔 ‘만다라’라 이름 붙은 무력 집단이 있었다. 왕후를 호위하는 최정예 요원들이며 그들의 전투력은 일반 병사와 궤를 달리했다.
메리린은 그들 중에서도 무려 부단장이었다. 그녀는 우수한 실력과 빼어난 미모 덕분에 제왕의 아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첩이었지만.
그녀의 내력(來歷)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내용이 뒤로 이어졌다.
「도란은 나의 애제자였습니다. 정식 기사는 아니었지만 전도유망한 기대주였지요. …도란, 정말로 나를 못 알아보겠니?」
그녀가 아련한 눈으로 도란을 바라보았다. 듣고 있던 셋은 합이라도 맞춘 듯 동시에 경악했다.
「내, 내가 네 애제자였다고? 무슨 헛소리야? 난 너 같은 거 몰라. 오늘 처음 봤다고!」
「도란, 가만있어 봐. 이봐, 메리린. 확실해? 착각한 게 아니고?」
「절대 아니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도란을 못 알아볼 리가 없어요!」
그녀가 강고하게 부정했다.
「네 부모, 엘리와 헤르타는 내 부하였단다. 하지만 거듭된 전쟁 속에서 끝내 명을 달리했지.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말했어. 자신들이 죽으면 너를 부탁한다고.」
「부모라니? 나, 나는…….」
「나는 네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봐 왔어. 도란이란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나야. 알리와 헤르타의 유지에 따라 너를 기사로 키운 것도 나고.」
도란의 표정이 몹시 혼란했다. 당연하지. 자신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속속들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너는 나를 대모님이라 부르며 잘 따랐단다. 난 너를 친딸이라 생각했어. 언제든 양자로 들이고 싶었지만… 난 제왕의 첩이 될 몸이었기에 그러지 못했단다. 그게…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웃기지 마! 나는 너 같은 거 몰라! 모른단 말이야!」
「도란, 앉아.」
도란이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섰다. 고병갑은 나직하게 그녀를 타일렀다.
「메리린, 도란은 지금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니요? 기억을 잃기라도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 아아…….」
메리린이 낙담했다.
매정하게도 고병갑은 그녀의 슬픔에 공감해 줄 여유가 없었다. 다른 것들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도란이 메리린과 동시대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고대의 상점에 있는 다른 고블린들도?’
돌이켜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대의 상점에서 여성 고블린을 사들일 때만 해도 그랬다.
수많은 이름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당시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저 상품명 비슷한 거겠거니 여겼을 뿐.
그런데 만약 그들이 고대의 상점에 ‘박제’된 과거의 영령이라면?
「메리린.」
「네.」
「너 고대의 상점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고대의… 상점이요?」
그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런 건 처음 들어 봤어요.」
「흠… 그래. 일단 이 건은 넘어가고, 계속 얘기해 봐.」
「알겠습니다.」
그녀는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석판에서 읽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일곱 번째 신성 전사 알샤론을 쓰러뜨리고 석 달쯤 흘렀을 때였어요. 하늘을 가르며―」
「그만! 그 얘긴 그만해도 돼.」
고병갑은 얼른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면서 도르마의 눈치를 살폈다.
도르마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메리린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 폭주의 조짐은 없었다. 그래도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전쟁 얘기는 됐으니까 네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나 말해 봐.」
「…알겠습니다. 전쟁은 어찌어찌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큰 저주가 내렸죠.」
「여인들이 없어진 걸 말하는가 보군.」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여인들이 사라졌죠.」
「듣고 보니 이상하군. 내가 알기론 여인들이 싹 자취를 감췄는데 너는 어떻게 사라지지 않았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왕비께서 사라지신 후 제왕께선 심신이 불안정하셨습니다. 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셨고, 그 누구와도 말씀을 나누지 않으셨죠.」
「너, 랜드리올의 아내라고 하지 않았나? 너와도 대화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저는 일곱 첩 중 한 명일 뿐이니까요. 제왕께선 왕비 이외의 아내들에겐 그다지 정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서글펐겠군.」
「아뇨… 저 같은 게 서글프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글펐다는 게 분위기로 드러났다.
「계속 말해 봐.」
「예.」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왕비가 사라진 후 식음을 전폐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돼 버린 랜드리올.
몇 달간 햇빛조차 보지 않던 그가 어느 날 궁을 뛰쳐나왔다.
「당시 제왕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분은 저를 불러 제 몸에 이런 것을 새기셨죠.」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웃옷을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육감적인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정욕 같은 것은 전혀 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것은 섬뜩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도란과 도르마는 눈이 동그래져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허어… 저건 당최…….」
「징그러워.」
상체 빼곡히 채워진 문신. 그건 확실히 지도였다.
「제왕께선 제게 이르셨습니다. 훗날 본인과 같은 기지, 다시 말해 제왕의 기개를 갖춘 자가 저를 깨울 거라고요. 그러면.」
그녀가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등의 정중앙을 가리켰다.
「그를 인도하여 이곳을 찾아가라 하셨습니다. 아스빌람의 수도, 성지 베르보니아에 말입니다.」
「베르보니아!」
「아우, 깜짝이야! 왜 그래, 도르마?」
「죄, 죄송합니다. 굉장히 익숙한 이름인지라 저도 모르게.」
도르마가 머쓱하게 대답했다.
메리린이 잠깐 뜸을 들였다가 이어 말했다.
「…아무튼 그때는 그분의 의중을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한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신 거셨군요.」
그녀가 체념한 어투로 말하더니 다시 옷을 걸쳤다. 고병갑은 한참 턱을 쓰다듬으며 고뇌하다가 물었다.
「베르보니아인가 하는 곳에 가면 뭐가 있는데?」
「저도 모릅니다. 제왕께선 그저 그곳에 가야지만 아스빌람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흠, 아스빌람의 부흥이라.」
「그분은 성내 모든 주술사를 불러들여 제게 어떤 주술을 거셨습니다. 그 뒤로 기억이 끊겼지요. 잘은 몰라도 제가 사라지지 않은 건 그 때문인 듯합니다.」
‘아무리 첩이라지만 제 아내를 생체 지도 겸 길잡이로 쓴다니, 랜드리올이란 작자도 제정신은 아니구먼.’
고병갑이 끌끌 혀를 찼다. 그때 옷매무새를 다듬은 메리린이 불쑥 질문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말했습니다. 이제 저도 들어야겠습니다.」
「음? 뭐를?」
「아스빌람에, 그리고 우리 사라온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