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사원에서 발견한 것
고병갑이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씹었다. 한 5초 정도는 선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튀어나온 탓이다.
“야, 이… 뭔 놈의 관이 있고 지랄이야?”
관이 있다면 시체도 있기 마련.
설마하니 저 속이 식자재 따위로 채워져 있지는 않을 테니까.
어쩐지 을씨년스럽더라니. 고병갑은 괜히 찝찝한 마음에 인상을 구겼다.
그냥 나갈까? 그 고민을 세 번 정도 하다가 마음을 다잡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헌터가 시체를 겁내선 안 될 일이다.
지하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마저도 얼음이 자리 대부분을 차지해서 더욱 협소하게 느껴졌다.
“여긴 대체 뭐야?”
이곳에 있는 거라곤 사각 얼음과 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혹여 뭔가 다른 게 있을까 싶어 열심히 랜턴을 돌려봐도 헛수고였다.
그는 관을 앞에 두고 한참을 뜸 들였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이든 간에 오늘 밤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고병갑은 랜턴을 입에 물고 관 뚜껑을 밀기 시작했다.
그그극!
‘무게가 꽤 되네.’
돌로 만든 관은 상당히 무거웠다. 고병갑이나 되니 큰 힘 들이지 않고 밀었지 평범한 아녀자였다면 택도 없었으리라.
서서히 관 안쪽이 드러났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10개의 발가락과 구릿빛 다리였다.
그그극! 그그극!
돌 긁히는 소리가 날수록 더 많은 육체가 드러났다.
무릎과 허벅지를 지나니 사타구니가 나왔다. 그것을 보자 심장이 미친 고양이처럼 발작해댔다. 오해하지 마라. 어떤 변태 같은 까닭으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여자? 여자라고?’
다리 골격을 보고 짐작하긴 했다만… 정말로 여인이었다.
“흡!”
그가 내력까지 동원하여 관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잠시 후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운 여성이 온전히 드러났다.
“허…….”
고병갑은 세 가지 이유로 몹시 놀랐다.
첫째. 이 시체는 여인, 그것도 고블린 여인의 것이었다.
둘째. 여인은 신기할 정도로 상태가 온전했다. 도저히 주검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지막. 여인의 상체엔 어떤 그림, 다시 말해 문신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었다.
“뭘 그려 놓은 거야?”
여인의 골반 위부터 목 아래. 그리고 팔꿈치 직전에 이르는 영역은 본래 피부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문신으로 가득했다.
단순한 문양이었다면 고대 타투 마니아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으리라. 한데 그게 아니었다.
“이거 설마… 지도인가?”
번뜩 그런 의심이 스쳤다. 그녀의 배에서 젖무덤으로 이어진 기다란 줄. 저건 분명 강을 나타낸 것 같았다. 그 옆으론 산맥이 보였고, 드문드문 성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려면 등짝을 봐야 했다.
고병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랜턴을 입에 물었다. 그러곤 여인의 몸을 뒤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여인의 양어깨에 닿았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왠지 소름이 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 일이 벌어졌다.
우웅!
“뭐야!?”
손끝을 타고 은은한 주황빛 기운이 여인에게 스며들었다. 그건 내력이었다. 상당한 양의 내력이 여인의 몸으로 흡수된 것이다.
“젠장!”
허겁지겁 물러나 봐도 자신과 여인 사이 이어진 선은 끊어질 줄 몰랐다.
고병갑은 본능적으로 경계 자세를 취했다. 이 세상에 힘 빨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행히 내력의 끈은 차츰 희미해졌다. 고병갑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시신을 주시했다.
지하실에 정적이 가득했다. 그렇게 1초, 2초, 3초… 덧없이 시간이 흘렀다.
“방금 뭔―”
「허어억! 컥!」
“!?”
여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허리는 활처럼 휘고 팔과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숨을 트더니 필사적으로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하악!」
“야, 야야, 야야야…….”
고병갑은 검을 뽑아 들고 여인을 겨누었다. 그는 결코 담력이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제껏 살며 온갖 이상한 일은 다 겪었지만 이건 정말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가만, 내가 왜 쫄아야 하지? 난 고블린 로드잖아?’
그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자신은 고블린 로드였다.
눈앞의 존재가 귀신인지 좀비인지 제3의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본질이 고블린이라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고병갑은 오두방정을 관두고 근엄한 자세를 유지했다. 물론 칼은 여전히 쥔 상태였다.
여인네의 가슴팍이 오르내리길 수십 번. 그제야 차츰 호흡이 안정되어 갔다.
얼마 뒤. 그녀가 마침내 두 눈을 떴다.
「…….」
고병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여인을 응시했다. 여인은 불안한 눈초리로 눈알을 몇 바퀴 굴리더니 반 박자 늦게 고병갑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흐힉! 아으윽!」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다가 곧장 자지러졌다. 보아하니 몸이 말을 안 듣는 듯했다.
당연하지. 이 냉골에서 줄곧 있었는데 활어처럼 움직이면 그게 이상한 거다.
「너…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
고병갑이 선수 쳐서 물었다. 여인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불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간신히 상반신만 일으킨 그녀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찾는 듯했으나,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반 박자 늦게 본인이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인이 황급히 민망한 부위를 가렸다.
뭐, 이미 볼 장 다 봤지만.
「무어아!」
별안간 꽥 소리를 지른다. 에아나 도란 만큼이나 미성이었다.
다만 혀라도 꼬인 건지, 아니면 입이 굳어서 그런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였다.
「뭐라고? 무어냐고?」
「무… 물러라!」
「아아, 물러나라고.」
고병갑은 순순히 몇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저게 지금 장난치나?’라는 눈초리로 이쪽을 쏘아보았다.
이윽고 미친 여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인간이 나를 깨웠단 말인가? 인간이 왜? 어떻게?」
그녀가 허망한 눈으로 고병갑을 올려 보았다. 그러더니 불쑥 몸을 감싸며 와들와들 떨어 댔다.
「추워, 너무 추워. 아으…….」
‘별 미친…….’
여인의 행태가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추위에 떠는 모습은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가 걸치고 있던 남방을 벗어 여인에게 던져 주었다.
「일단 그거라도 걸쳐라.」
「…….」
여인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남방을 둘렀다. 그녀가 버벅대는 몸을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꽤 장신의 여인이었다. 고병갑은 그녀의 자태를 보고 솔직히 좀 감탄했다.
거의 180센티는 될 길쭉한 허우대,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진 몸매는 조각 같다. 허리춤까지 오는 은발은 윤기가 줄줄 흘렀고, 크고 뾰족한 귀는 아래 방향으로 쳐졌다.
전체적으로 도란과 몹시 흡사했다.
남방이 그녀의 아랫도리까지 가려 주지는 못했다. 여인은 그게 몹시도 불만인지 늘어나지 않는 옷자락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고병갑은 더는 못 봐줄 것 같아 몸을 획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라. 일단 위로 올라가자.」
그러고선 지상으로 올라갔다. 여인은 불신 가득한 태도였지만 얼어 죽기는 싫었는지 얼른 따라붙었다.
「캄캄하니 조심해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여편네, 성질 더럽네. 그나저나 왜 나한테 반말 찍찍하는 거야?’
일반적인 고블린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타인에게 매몰찬 도란마저도 자신에게는 깍듯이 구는데 말이다.
존댓말을 듣지 못해 기분이 상한 건 아니었다. 단지 좀 당황스러울 뿐.
고병갑은 흘끔흘끔 뒤를 흘겨보았다. 여인은 뭘 잃어버린 사람처럼 끊임없이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마침내 지상에 닿았다. 그 순간 여인이 고병갑을 앞서 나가며 사방에 외쳤다.
「제왕이시여! 어디 계신 겁니까? 제왕이시여! 모습을 보이십시오, 제왕이시여!」
처절할 정도로 애달픈 음성이다. 하나 아무리 구슬프게 부르짖은들 텅 빈 사원에 메아리만 울릴 뿐이었다.
그녀가 별안간 고병갑을 째려보았다.
「네놈은 적군의 사자인가? 제왕께서는 어디 계시지?」
「뭔 헛소리야? 제왕이 누군데?」
「뭐라?」
여인이 난데없이 내달렸다. 깊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사원의 중앙 홀까지 다다랐다. 그녀가 무너진 사원을 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제왕이시여! 제왕이시여!」
애타는 목소리로 제왕인지 뭔지를 부르짖는다. 고병갑은 기막힌 눈빛으로 그녀의 뒤태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서 숨어계시는 겁니까? 제왕이시여, 부디 용안을 비추십시오, 제왕이시여!」
「아서라. 여기 네가 찾는 제왕인지 뭔지는 없으니까. 내가 한 바퀴 둘러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헛소리!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제왕의 기개가 느껴지는…….」
고병갑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이 커졌다. 입도 저절로 벌어졌다. 그녀가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아아…….」
「또 왜 그래?」
「어째서… 어째서 네놈에게서 제왕의 기개가 느껴진단 말이냐? 무슨 연유로!」
고블린들은 본능적으로 로드를 알아본다. ‘나 고블린 로드요’라고 이마빡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경우인 듯했다.
저 괴팍한 여인네가 이제야 내 정체를 알아봤구나.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보는 대로 내가 너의 로드다.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여길 나가자.」
「이이… 으아아아!」
「음!?」
그때였다. 별안간 여인네가 덤벼들었다. 그녀는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고병갑이 찬 검을 노렸다.
속도도 몸놀림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게 진짜 돌았나.」
그러나 아직도 몸이 뻣뻣했다. 고병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몸을 피했다. 그 뒤 반사적으로 주먹을 날려 여인의 복부에 꽂았다.
「커헉!」
여인이 위액을 왈칵 토하더니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아, 젠장. 힘 조절 못했네. …그러니까 왜 대뜸 덤벼들어?”
그가 오만상을 구기며 여인을 어깨에 짊어졌다. 또 귀찮은 게 튀어나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로드, 로드! 그 여자 일어났어.」
밤하늘 올려 보며 담배 한 대 피우려니 쪼꼬미가 달려와 보고했다.
막 불붙이려던 참이었는데……. 고병갑은 입맛을 다시며 연초를 담뱃갑에 밀어 넣었다.
「오냐, 가 보자.」
「로드, 빨리 가야 해. 그 여자 성질 더러워.」
「뭐? 왜?」
「몰라, 마구 소리 질러.」
고병갑은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여인을 안치해 둔 집 앞에 이르자 벌써 고성이 들려왔다.
「이거 당장 풀지 못하겠는가!」
「지, 진정하세요!」
‘괜히 건져 왔나.’
그가 집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는 몇몇 고블린과 에아, 그리고 포박된 채 침대에 누운 여인이 있었다.
에아는 여인을 진정시키려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분명 말썽을 피울 것 같아 단단히 묶어 놨는데 아니나 다르랴, 지랄이 풍년이다.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로드시여.」
고병갑이 들어서자 고블린들이 인사부터 올렸다. 여인은 그 모습을 보더니 기막혀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 왔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고생했어. 다들 물러나.」
고병갑은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앉았다.
「꽤 오래 자더군. 피곤했나 보지?」
「어떻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제왕의 계보를 계승한 거! …것입니까.」
여인이 다짜고짜 질문했다.
고병갑은 ‘인간 따위’라는 구절이 심히 거슬렸지만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건 설명하려면 좀 길다. 그리고 그걸 듣고 싶거든 네 소개부터 하지 그래?」
「묶인 채로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걸 당장 풀! 아니… 풀어 주십시오.」
「풀어 달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앞의 일은… 실수였습니다. 풀어 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고병갑은 팔짱을 낀 채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가 뒤쪽 고블린에게 눈짓하며 명령했다.
「풀어 줘.」
「옙!」
작업 반장 사붕이가 다가와 컨베이어 벨트를 풀었다.
순순히 풀어 준 이유는 별거 없었다. 여인네의 고집이 세 보였고, 혹 발작하더라도 자신이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미간을 잔뜩 구기며 홉 고블린을 노려보았다.
「이 추악한 것들은 대체 뭡니까?」
「뭐? 추악?」
「그래요, 추악. 난 살아생전 이렇게 추악한 괴인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론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얘들은 고블린이다. 너와 같은.」
「고블린? 나와 같다고?」
컨베이어 벨트가 완전히 풀렸다. 다행히 그녀는 딱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보다 통성명도 안 했군. 나는 고병갑이다. 그냥 로드라고 부르면 돼. 네 이름은?」
「…메리린입니다.」
「그래, 메리린. 상호 피곤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너는 누구고 왜 사원 지하에 있던 거지?」
「그 전에 먼저 들어야겠습니다. 이 고블린이란 것들이 나와 같다는 게 무슨 뜻이죠? 내 동족들은 어디 있습니까? 동족이 보고 싶어요. 동족을 불러 주세요.」
「여기 있잖아?」
고병갑이 심각한 얼굴로 뒤쪽 고블린을 가리켰다.
메리린의 표정은 그보다 더욱 심각해졌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얘들이 다 고블린이라고. 네 동족이란 말이야.」
「아,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콜록! 콜록!」
메리린이 느닷없이 기침해댔다. 사례라도 들린 모양. 그때 노멀 고블린 하나가 물 담긴 바가지를 들고 다가왔다.
「이, 이거 마셔라.」
「저리 치워!」
「으악!」
메리린이 쪼꼬미를 거칠게 밀쳤다. 쪼꼬미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을 뒤집어썼다.
고병갑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올랐다.
「가까이 오지 마! 저런 추악―컥!」
그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고병갑이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메리린의 목을 잡아챈 것이다.
쾅!
「꺼… 꺼흑!」
「꺄악! 다, 당신. 그러지 말아요!」
그가 메리린을 벽에 밀쳤다. 목이 졸린 메리린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병갑의 팔을 벅벅 긁었다.
고병갑이 그득하게 살기를 뿜으며 읊조렸다.
「한 번만 더 아이들에게 손을 대 봐라. 그때는 하늘에 맹세코 너를 죽여 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