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안에 고블린 작업장-75화 (75/151)

75. 큰 전투

중급 교본의 요점이 내력의 내부 운용이었다면 상급 교본은 내력의 방출에 요점을 두었다. 위력적인 중거리 공격 수단을 얻은 셈이다.

초승달 모양 검기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썩은 살점만 나뒹굴었다. 널브러진 살점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으며 바닥을 적셨다.

“아우아아!”

점토 뭉치처럼 생긴 점액 괴물이 뾰족한 촉수를 쏘았다. 그러글은 기척이 없는지라 사각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피하기 까다로웠다. 고병갑은 즉시 내력을 운용해 몸을 경화시켰다.

등을 노린 촉수가 맥없이 으스러졌다.

“아… 아욱!?”

“이놈이 어딜!”

그가 세차게 몸을 돌리며 검기 폭풍을 발산했다. 점액 괴물이 물풍선마냥 펑! 하고 터져 버렸다.

후두두둑!

“염병!”

점액 괴물의 육신이 소낙비처럼 내렸다. 코를 찌르는 악취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힘 조절이 잘 안 돼. …그래도 이젠 감을 잡았다.’

그가 내력을 방출해 검에 둘렀다. 전에 트로바틴의 영혼을 몸에 들였을 때 사용했던 기술을 흉내 낼 심산이었다.

내력이 실체화하며 형태를 잡는다. 이윽고 검신만 1.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만들어졌다. 물론 원본에 비하면 초라했지만 그래도 처음치곤 훌륭했다.

검을 두 손으로 잡고 넓게 휘두른다. 근방에 있던 그러글은 손도 쓰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아우아아!”

“크흑!”

난데없이 거대한 주먹이 뚝 떨어졌다. 어깨높이가 5미터쯤 되는 뼈 괴물이었다.

고병갑은 즉시 검을 올려 방어했다. 직접 타격은 피했지만 땅이 움푹 꺼질 만큼 큰 질량이 느껴졌다.

‘이놈도 그러글인 건가? 그것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게감이라니!?’

뼈 괴물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렸다. 그러자 아가리에서 제3의 손이 튀어나와 고병갑을 노렸다.

파지직!

“우어어!”

그 순간, 전격의 창이 뼈 괴물의 면상을 때려 맞추었다. 부서진 파편이 온 사방으로 튀며 놈의 몸이 휘청였다.

「하아아압!」

도란이 훌쩍 날아올랐다. 일순 섬광이 번쩍이더니 뼈 괴물의 목이 절단됐다. 고병갑은 자신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키리얀! 도란! 잘했다!」

「하핫! 네!」

「보조하겠습니다, 로드시여!」

「좋아, 붙어라!」

정예 전투병들이 가세했다. 그들의 전투력은 의심할 구석이 없다. 사방에서 그러글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어어어!」

「케르륵!」

투르카가 방패와 주먹을 번갈아 가며 휘두른다. 그 거대한 흉기에 맞은 그러글은 꼼짝없이 곤죽이 되었다.

한편에선 도르마가 끝없이 주술을 부렸다. 거뭇한 폭풍이 때때로 전장을 휩쓸면 남는 거라곤 그러글의 수급뿐이었다.

노련한 검사들은 고병갑과 함께 종횡무진 전장을 누볐다. 칼날 몇 개가 동시에 휘몰아치니 적의 대형이 꼼짝없이 붕괴했다.

「케르르륵!」

「저것들을 죽이자!」

「찔러라!」

그리고 무너진 대열을 비집으며 고블린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기다란 장창을 찌르거나 철퇴를 휘둘렀다.

“아우으…….”

“아악!”

수십 자루의 창이 일제히 쏘아졌다. 창끝이 그러글의 몸체를 마구 헤집는다. 그러면 아주 넝마가 된 그러글들이 맥없이 자지러졌다. 그 광경은 참혹하기까지 했다.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둔기병과 방패병은 창병들을 호위해!」

「옙!」

어쩌다 그러글이 침투하면 곧바로 철퇴가 날아들어 머리를 깨 버렸다. 고블린 병사들은 물처럼 매끄럽게 움직였고, 잘 짜인 방진은 발타드렌의 성벽처럼 굳건했다.

‘좋아, 승기가 잡힌다!’

비록 수적으로 밀리지만 각 개체의 기개만큼은 이쪽이 우세했다. 사기 또한 드높아서 전장은 열기로 그득했다.

고병갑은 그러글들의 후위로 이동했다. 목을 길게 뻗으며 강해 보이는 놈들을 찾는다. 그때 한쪽에서 고블린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께엑!」

「케르륵!」

“아우어아아아!”

거구의 그러글이 땅을 기며 팔을 휘저었다. 팔뚝이 무슨 기둥만 해서 고블린들이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놈이 주먹을 말아 쥐며 땅을 내치려고 했다. 고병갑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몸을 날렸다.

“이 새끼가!”

망치처럼 떨어져 내리는 주먹을 검으로 받는다. 발치에는 고블린들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서 일어나! 뭣들 하냐! 부상자들을 옮겨!」

「예!」

「부상자를 옮겨라!」

「하압!」

고병갑이 검을 튕겼다. 그러자 거구의 그러글이 뒤로 넘어갔다. 그는 멈추지 않고 검기를 내질렀다.

“아욱!”

그러글이 여섯 죽지로 찢어지며 썩은 살점을 떨어뜨렸다.

‘확실히 숲에 있던 놈들보다 강하다. 어디서 이런 것들이 몰려왔지?’

바위산 숲에서 봤던 그러글은 약했다. 귀신같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긴 했다만 노멀 고블린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을 만큼 나약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적어도 D, E급 몬스터에 비견되는 힘을 가졌다. 강한 놈은 B급도 노려볼 수 있을 정도였고.

다행인 것은, 그래도 고병갑이 가장 강했다. 그러글 중에 고병갑과 두 번 이상 합을 겨룰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급 교본을 습득하지 못했으면 위험할 뻔했어.’

「바몬드! 바몬드 어디 있냐?」

「예… 예, 로드시여! 저 여기 있습니다!」

「죽는 녀석이 없도록 해라! 명심해! 절대 죽는 녀석이 나와선 안 돼!」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몬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치유의 권능을 펼쳤다. 다친 고블린들이 흰빛에 둘러싸이며 상처를 회복했다.

“아으아아……!”

“아우욱! 으어어어!”

‘염병!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은 건가.’

그러글은 정말이지 봇물 터진 듯 밀려왔다. 징글징글하단 소리다. 고병갑은 승기를 확실히 가져올 필요성을 느꼈다.

‘해 보자.’

그가 호흡을 가다듬더니 번뜩 내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바뀔 만큼 폭발적인 분출이었다.

터진 수도꼭지에서 물이 솟구치듯,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뻗치는 내력. 고병갑은 우격다짐으로 그것들을 끌어모았다.

주황빛으로 번쩍이는 칼날에 내력이 한가득 모였다. 그것들을 잡아 두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잠시라도 긴장을 놓으면 애써 모아 둔 내력이 뿔뿔이 흩어질 게 자명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리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었다. 일순 칼날에 모인 내력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고병갑이 이마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흩어져라!」

「예! 로드!」

「흩어라!」

전방위에 있던 고블린들이 재빨리 몸을 피신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세차게 다리를 놀린다. 그는 한 줄기의 섬광이 되어 황야를 갈랐다.

‘만다라 기사단의 비술, 여덟 형식 중 세 번째!’

발록을 끝장냈던 바로 그 기술. 고병갑은 그것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분쇄!」

고병갑이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검에 서린 내력의 회오리가 한순간 방출되며 전방위를 집어삼켰다.

쏴아아!

“컥!”

“아욱!”

그러글 입장에서 그 공격은 재해나 다름없었다. 검기 폭풍은 그러글들을 흔적도 없이 지워 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의 공격은 물감처럼 번져 나가며 공격 범위 밖의 그러글까지 가루로 만들었다.

분쇄. 말 그대로 분쇄였다.

‘성공했다. …드디어 성공했어!’

수없이 시도했지만 빈번히 실패하지 않았던가? 역시 해답은 상급 교본에 있었다. 고병갑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병갑은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균열을 잡는다.

‘염병. 실전에서 두 번은 못 쓰겠네.’

큰 기술답게 준비 시간이 길고, 후유증도 있다.

그래도 그만큼의 값어치는 했다.

「우와아아! 로드께서 길을 여셨다!」

「잔당을 소탕하자!」

「케르륵!」

사기 충만한 고블린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러글들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고블린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느덧 머릿수가 동등해졌다. 조금 더 지나자 물량마저 이쪽이 압도하게 됐다. 오후 느지막하게 시작된 큰 전투는 석양이 내리기 전 끝을 맺을 수 있었다.

* * *

「가서 들것을 가지고 와!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은 부상자를 옮겨!」

전투는 고병갑 진영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투는 언제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황야에 번진 핏자국은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고블린들은 로드의 지시에 따라 부상병을 옮겼다.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중상을 입은 녀석이 드문드문 보였다. 고병갑은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정신을 몇 번이나 다잡았다.

「약재 창고에서 경단이랑 포션을 가지고 와라!」

「알겠습니다!」

팔다리가 떨어져도 된다. 하지만 사망자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그게 고병갑의 신념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사망자는 없었다.

‘아니, 하늘 따위가 도와준 게 아니야.’

그렇다. 이 기적은 탈진한 채 축 늘어진 순백의 고블린이 만든 것이었다. 고병갑은 고블린 프리스트 바몬드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열띤 치료 덕분에 중상자들은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자잘한 상처를 입은 녀석들은 운기조식을 통해 자가 회복했다.

「에아, 저녁밥은 꿀떡꿀떡 잘 넘어가는 죽 같은 거로 만들어 줘. 양은 평소의 두 배쯤으로 늘리고. 애들이 힘을 많이 썼으니 배불리 먹여야겠어.」

「알겠어요! 맡겨만 둬요!」

에아는 의욕이 충만해서 밥을 지었다. 고병갑의 지시대로 곡물과 고기를 잔뜩 넣은 스튜가 주메뉴였다.

소금이 많이 들어갔는지 짭짤한 스튜. 다행히 고블린들은 걸신들린 듯 잘 먹었다.

「오늘 다들 고생 많았다! 금일의 승리는 모두 너희가 이룩한 것이다!」

고병갑은 고블린들 사이에 서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아닙니다! 모두 로드의 은혜 덕분입니다!」

「로드께서도 몹시 고생하셨습니다.」

「하하! 됐다, 이놈들아! 아무튼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야 회복도 빠르게 되고 힘이 붙으니까! 그리고 오늘 전투를 치렀던 녀석들은 내일 꼼짝도 하지 말고 휴식을 취해라. 알겠나?」

「옙! 알겠습니다!」

고블린들이 일제히 대답하니 발타드렌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고병갑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옮겼다.

식당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 그곳에서 바몬드가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녀석은 별다른 부상은 없었지만 안색이 파랬다. 무리일 정도로 권능을 끌어 쓴 탓이었다.

「아… 앗! 로드시여, 오셨습니까.」

「됐어, 됐어. 앉아서 밥 먹어라.」

「예에…….」

고병갑은 바몬드 옆에 털썩 앉았다. 이 수줍은 많은 고블린은 로드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밥을 먹었다.

「고맙다.」

「…예?」

「큰 전투가 있었는데도 한 녀석도 죽지 않았어. 모두 네 덕분이다, 바몬드.」

「아… 아닙니다. 로드께서 죽게 두지 말라고 하셔서… 그래서 그냥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짜식, 겸양 떨기는. 아무튼 네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다.」

「하하… 제 존재에 의의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음? 당신, 여기 있었군요.」

「로드, 식사하셨어요? 같이 먹어요!」

에아와 도란이 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그들은 배식하느라 남들보다 식사가 느렸다.

「밖에서 먹으려고?」

「맞아요, 바깥 공기 쐬면서 먹으려고요. 안쪽이 좀 시끄럽기도 하고요.」

「그러냐? 그것보다 도란, 몸은 좀 어때?」

「멀쩡해요! 아시잖아요. 그따위 것들에 당할 제가 아니라는 거.」

「하긴,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너라면 걱정 없지.」

「헤헤.」

「아 참, 실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었어요.」

에아가 고병갑 옆에 앉으며 말했다.

「바보야, 한 칸 옆으로 가.」

「아… 알겠어요.」

바로 도란이 비집고 들어오긴 했지만.

「나한테 할 말? 그게 뭔데?」

그러거나 말거나 고병갑이 되물었다.

에아가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뭔가 좋지 않은 말이 들려올 거란 예감이 강렬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어서 말해 봐.」

「그러글에 관한 거예요. 사실 진즉 말해야 했는데…….」

에아는 숟가락으로 스튜를 휘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 그러글이 점점 더 많이 몰려올 거라는 거예요.」

「뭐라고? 왜?」

「그러글은요… 뭐든 먹어 치우는 식탐의 괴물이에요. 살아 있는 거라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죠. 심지어 자기들끼리 잡아먹기도 하고요. 그래서 놈들은 항상 먹이를 찾아 떠돌아다녀요.」

「알아, 네가 전에 말해 줬잖아.」

그녀가 성을 쓱 훑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러글이 거의 보이지 않았죠?」

「어. 분명 그랬지.」

「그건 여기에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놈들조차 살지 못할 정도로 척박했던 거죠.」

분명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 근방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으니.

뭐… 지금이라고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발타드렌 성 내부를 제외하면 여전히 황무지였으니까.

「그런데 이젠 아니에요.」

「뭐?」

「이젠 이곳에도 그러글이 먹을 것이 많아요. 그리고 그 사실을 놈들이 알아차리고 말았죠.」

「…놈들이 발타드렌, 아니 우리를 노리고 계속해서 몰려들 거란 말이야?」

「맞아요, 그러글들의 식탐은 광적일 정도라서 한 번 점찍은 사냥감은 포기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정령 부락에 있을 때 유랑 생활한 것은 그 때문이죠. 수명을 깎아 가며 안개 너머로 들어간 것도 그런 까닭에서고요.」

「흠.」

「일찍 말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난… 당신들의 흥을 깨고 싶지가 않아서…….」

「쩝, 됐다. 그런 거로 사과할 필요 없어.」

고병갑이 몸을 일으키며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그 후 그녀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솜니움을 나온 순간부터 그 개자식들이랑 맞붙을 각오쯤은 하고 있었어. 그리고.」

탁탁. 라이터가 불꽃을 튀기길 두어 번. 곧 기다란 장초에 불이 옮겨붙었다.

「놈들이랑 공존할 생각도 없고.」

「네? 그 말은?」

「난 이 땅의 모든 그러글을 없애 버릴 거다. 이건 허풍이 아니야.」

「그, 그치만 그러글은 무수히 많아요.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야! 너 지금 로드를 못 믿는다는 거야? 왜 재수 없는 소릴 해?」

「아, 아니요, 도란. 못 믿는 게 아니라 걱정이 돼서…….」

「쓸데없는 걱정 할 거면 밥이나 먹어, 바보야! 그딴 생기다 만 것들 따위 수천이 몰려와도 로드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까! 그렇죠, 로드?」

「…….」

‘야, 수천은 좀…….’

솔직히 수천은 좀 부담됐지만 왕이 백성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이다. 고병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그래. 설령 수만이 몰려와도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그러니까 다신 걱정 같은 거 하지 마.」

「들었지? 들었지? 에아 넌 평소에도 바보 같은데 가끔 진짜 바보 같아. 머리를 뗐다 붙이면 나아지려나?」

「…머리를 떼면 죽어요, 도란. 아무튼 알겠어요. 앞으론 걱정 안 할게요.」

에아가 애써 웃었다. 곁에 있던 도란과 바몬드도 따라 웃는다. 식당 안에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병갑은 이 웃음을 지키고 싶었다. 아니, 이젠 그래야만 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으니.

떠들썩했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 * *

「로드시여, 로드시여.」

「으으…….」

비스트 고블린이 고병갑을 흔들어 깨웠다. 차림새를 보니 경계병이다. 고병갑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또 그러글이 몰려온 거냐?」

전날 그러글과 큰 전투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스빌람에서 잠을 청했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조치할 수 있도록.

심각한 고병갑과 달리 경계병의 반응은 미묘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데?」

「제가 어리석어 말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로드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가 보자.」

경계병은 고병갑을 북문으로 데려갔다.

계단을 타고 성벽을 오르는 중 슬쩍 하늘을 보니 이제야 동이 트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꼭두새벽부터 자신을 깨운 것일까?

그 의문은 얼마 뒤 바로 해소됐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경계병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도대체 뭐길… 뭣!?’

잠시 후. 고병갑도 그들과 똑같은 표정이 되었다.

「야… 야! 저거 뭐야!?」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황무지였던 곳이 넓은 숲으로 변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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