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발전소 습격 사건
“아니, 대체 어떤 또라이들이야?”
고병갑은 핸드폰을 들여보며 지난밤을 회상했다.
아스빌람에서 용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길이었다.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한껏 끼얹으며 하루의 노곤함을 씻어 내는데, 별안간 전등이 나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욕실등의 문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로 뒤에 온수가 끊겼고, 거실의 모든 가전이 작동을 중지했다. 정전이 일어난 것이다.
비단 자신의 집뿐만이 아니었다.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밤은 온통 새카맸다.
다행히 정전 사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도로 전기가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살면서 종종 겪는 가벼운 해프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본 뉴스 기사는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간밤에 나주 발전 단지가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한다. 20기의 발전소가 단 한 채도 남지 않고 전복했다니. 어중이떠중이의 소행은 분명 아니었다.
어제의 정전도 위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국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지만 여러 난항을 겪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목격자들의 증언을 빼면 이렇다 할 단서가 전혀 없었다. 괴한들이 아주 작정하고 흔적을 지운 탓이다. 철두철미하게 계획된 범행이란 말이다.
설상가상 증언이라고 나오는 것도 ‘까만 복면을 쓰고 있었다.’, ‘칼을 지니고 있었다.’ 따위의 두루뭉술한 것뿐이었다.
모든 걸 다 떠나서, 고병갑은 발전 단지를 습격했다는 대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하여간 세상엔 할 짓 없는 새끼들이 참 많단 말이야.”
누구는 헌터 일하랴, 로드 일하랴 바빠 죽겠는데……. 남아도는 시간 있으면 자신에게 좀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일이나 하자, 일.”
고병갑은 오늘도 부지런히 과업을 완수해 나갔다.
3월이라고 거센 추위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꽃샘추위니 뭐니 기승을 부렸다.
반면 3월의 아스빌람은 많은 부분에서 2월보다 진보했다.
제2의 거점 발타드렌에 풍년이 찾아왔다. 이곳이야 뭐 사시사철 온난하니 한겨울에 옥수수를 수확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내성 동쪽에 여러 작물이 심겨 있다. 옥수수, 콩, 감자 고구마, 순무 등등. 그 종류도 다채롭다.
지금은 내성에서만 농사를 짓는 실정이나 더욱 체계가 잡히면 성벽 밖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볼 생각이었다.
사실 욕심 같아서는 향 채소나 과일에도 손을 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재배하기 위해선 더 많은 공부와 경험이 필요했다.
괜히 문어발 뻗다가 망신살 당하는 것보단 안전한 게 제일이다.
“꾸익! 꾸이익!”
“오냐, 밥이다. 많이들 먹어라.”
옥수수와 콩을 죽처럼 개어 만든 돼지 밥. 한 김 식혀 사료통에 부어 주니 잘 먹는다.
참고로 돼지들에겐 성장의 묘약을 주지 않았다. 지금 먹성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감당하는 수준. 묘약까지 먹였다간 고블린들 밥까지 뺏어 줘야 할지도 몰랐다.
돼지우리 한 편에서 고블린들이 배설물을 퍼담고 있었다. 저걸 잘 삭히면 훌륭한 거름이 된다.
돼지들 밥 먹는 걸 얼마간 지켜보다가 자리를 옮긴다. 그는 향한 곳은 주택가의 한 집이었다.
「어? 로드 왔네.」
노멀 고블린이 한 명이 고병갑을 맞이했다. 녀석은 침대 옆에 붙어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었냐?」
「기저귀 갈았어. 얘 만날 똥 싸.」
그가 침대로 다가갔다. 거기엔 더 이상 신생아라 부를 수 없는 아기 한 명이 젖병을 빨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제 ‘인간’이라 칭할 수도 없었다.
‘얘는 볼 때마다 섬뜩하네.’
약 한 달 전. 고병갑은 몬스터 하피의 배에서 나온 인간 아기를 아스빌람에 데리고 왔다.
몬스터 속에서 인간이 나왔으니 호기심 때문이라도 길러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아기는 범상치 않았다.
첫째로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를 보였다. 온종일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기 때문일까? 아직 만 1살도 안 된 녀석이 덩치로는 3살쯤은 됐다.
둘째로 이 계집아이는 점점 제 어미를 닮아 가고 있었다. 팔과 다리의 피부가 경질화하더니 조류의 것처럼 변모했다. 이목구비 역시 더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사람에서 몬스터로. 그 변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조만간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 계집아이가 본성까지 제 어미와 같다면, 그래서 통제할 수 없다면 죽이는 수밖에 없다. 늑대를 길들여 개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잖은가.
‘내가 하피 로드인 것도 아니고.’
솔직한 말로 고블린 로드라는 권능이 아니었다면 고블린들과 살 맞대고 사는 일도 없었으리라.
그들과 첫 대면을 생각해 보라. 서로 죽이려고 벼르지 않았던가?
몬스터의 흉포함은 야생 동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다는 말이다.
「야, 쪼꼬미. 너 나가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와.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 테니까.」
「응? 로드가? 아니야. 나 괜찮다.」
쪼꼬미가 손사래 치며 호의를 거절했다. 고병갑은 문득 이상함을 감지했다.
「…야, 쪼꼬미.」
「응? 왜?」
「너 말이 좀 늘었다?」
「말?」
녀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모르겠는데.」
「아니야. 너 말 늘었어.」
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었다. 전날만 하더라도 한 어절씩 띄엄띄엄 말했다. 조사의 사용이나 문장의 구성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지금도 완벽히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전과 비교하면 한층 매끄러워졌다. 그의 머리로 한 단어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계몽의 씨앗!’
고병갑은 별안간 달려들어 쪼꼬미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등짝, 등짝을 보자!」
「어어? 로, 로드. 왜 그래?」
「가만있어 봐, 인마!」
‘외형적인 변화는 없는데?’
생김새는 그대로였다. 이렇다 하게 달라진 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병갑은 스읍 숨을 들이켜며 입맛을 다셨다.
「내가 누구야?」
「로드.」
「그렇지. 그럼 나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돼?」
쪼꼬미는 눈을 몇 바퀴 굴리더니 대답했다.
「로드, 안녕.」
「아니지! 로드시여, 안녕하십니까, 라고 해야지. 따라 해 봐. 로드시여, 안녕하십니까.」
「로드시여, 안녕하십니까.」
「옳지! 앞으로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응응.」
쪼꼬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병갑은 ‘응’이라는 대답이 맞나 고민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생해라. 간다.」
「알겠어, 로드 잘 가.」
건물 밖으로 나온 그가 사위를 훑었다. 홉 고블린과 노멀 고블린 여럿이 수레를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재빨리 부른다.
「야, 너희들! 수레 놓고 이리로 와 봐!」
「아, 옙!」
10명쯤 되는 고블린이 부리나케 몰려왔다. 고병갑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뭐 하는 중이었어?」
「낮에 허물은 건물 잔해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래 뭐, 일하는데 힘들거나 필요한 건 없고?」
「없습니다! 일하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홉 고블린이 대표로 대답했다. 이 녀석도 말하는 게 한층 매끄러워졌다.
「…너희 뭐 이상한 거 느끼지 못하겠냐?」
「이상한 것… 말입니까?」
「이상해? 뭐가 이상해?」
「나도 몰라. 로드한테 물어봐.」
「로드시여, 무슨 말씀이신지?」
고블린들이 웅성거린다. 고병갑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니다. 얼른 가서 일 봐라.」
「옙!」
「로드 안녕.」
고병갑은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본인들 어휘가 늘어난 거에 자각이 없는 건가? …도르마를 찾아가야겠어.’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성벽으로 이동했다. 공격대 인원들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경계병들과 함께 경계 임무를 한다.
도르마라면 남문 쪽에 있을 터. 고병갑은 지체 않고 남문으로 향했다.
성벽 아래쪽 처소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도르마가 있었다. 키리얀도 함께다.
「음? 로드시여,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언제 오셨습니까?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마침 키리얀도 있었네. 잘됐다. 다른 게 아니고 물을 게 좀 있어서.」
「말씀하시지요.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너희 말이야, 이상한 거 못 느끼겠냐?」
「예? 이상한 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키리얀이 모르겠다는 말투로 반문했다.
「쪼꼬미 애들 말하는 거 못 들어 봤어? 말하는 게 좀 늘었던데?」
「어… 글쎄요. 저는 큰 차이를 못 느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아니라니까? 애들 말하는 거 늘었다고!」
키리얀과 도르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잠깐 기다려 봐!」
고병갑이 다시 처소에 나타났을 때는 노멀 고블린 한 명을 대동한 상태였다. 그는 마치 웅변 발표를 시키듯 노멀 고블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키리얀과 도르마도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저… 정말이군요! 분명 말하는 게 늘었습니다.」
「허어,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도르마, 키리얀. 너희는 어때? 뭔가 몸의 변화 같은 게 안 느껴져?」
로드의 물음에 두 고블린이 제 몸을 살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도르마, 너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와 똑같습니다.」
아쉽게도 모두가 변한 건 아닌 모양이다. 고병갑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가 번뜩 외쳤다.
「남문 열어 놔. 솜니움에 갔다 와야겠다.」
「앗! 옙!」
고병갑은 경차를 끌고 길을 나섰다. 길을 뚫어 놓은 덕분에 20~30분이면 솜니움에 닿을 수 있었다.
빠! 빠빵!
「차다! 발타드렌에서 누가 왔다!」
「누구지? 로드신가?」
성문 앞에서 경적을 몇 차례 울리자 문이 열린다. 고병갑은 경계병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 준 뒤 들판으로 질주했다.
끼이익!
계몽의 씨앗을 심어 둔 자리에 견고한 울타리가 세워져 있다. 얼른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갔다.
잠시 후 그의 얼굴로 밝은 미소가 들어찼다.
“와!”
울타리 안쪽엔 눈여겨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새싹, 손톱보다도 작은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 * *
“이야. 이거 골때리는 작자들이네.”
토벌을 끝내고 마석 정산을 위해 협회를 방문한 고병갑. 순번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나주에 이어 창원 발전 단지 습격! 다음 타깃은 어디인가?
어제 창원에 자리 잡은 발전 단지가 습격당했다.
나주 피습 사건이 있고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부에선 비각성자로 이루어진 보안 업체 대신 길드에 협조를 구해 헌터 용병을 고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창원 발전 단지만 하더라도 B급 헌터 스물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복면 차림의 괴한들에게 눈 깜짝할 사이 제압당했다.
괴한의 머릿수가 많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확인된 바로는 고작 네 명 내지 다섯 명 정도였다.
의문인 점은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부분이었다. 괴한은 오로지 발전소만 파괴할 뿐 어떠한 살생도 저지르지 않았다.
“평화주의자 테러리스트라니, 컨셉 한 번 기막히게 잡았네.”
-연쇄 테러임이 확실시되자 당국은 발전소 보안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뉴스를 끝까지 읽은 고병갑이 혀를 찼다. B급 헌터 스물이 손도 못 쓰고 당했다면 괴한의 정체는 최소 S급 각성자란 소리다.
상위 헌터 몇 명으로 세워 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저 지랄을 하는 거야? 한국에 S급 헌터라 해 봤자 450명이 전부인데 왜 금방 들통 날 짓을… 아, 혹시 비등록 각성자의 소행이려나?”
헌터가 아닌 각성자도 많다. 덧붙여 아예 각성 검사조차 받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개중엔 당연히 S급도 있을 터.
정부에서 추론하길, 한국에는 대략 20명 정도의 비등록 S급 각성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번 범행 또한 그들의 소행이라면 수사에 어려움이 있으리라.
“하기야 제정신 박힌 놈이면 인생 말아먹을 짓을 하겠어? …에잉, 커피나 한 잔 마셔야지.”
고병갑은 2층 로비 내에 있는 공짜 커피 머신에 다가갔다. 그는 협회에 들릴 때면 꼭 한두 잔씩 뽑아 마시곤 했다. 왜냐고? 공짜니까.
지이잉!
커피 머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크 커피를 내렸다. 그사이 고병갑은 벽면에 붙은 게시판을 훑어보았다.
나주와 창원에서 난리가 났음에도 별다른 소식지는 붙어 있지 않았다… 고 생각한 순간, 한 여직원이 다가오더니 게시판에 커다란 종이를 부착했다.
고병갑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발전 단지 임시 보안 요원 <특수 경비원> 모집 공고
1. 채용 기간: 2026.03.02. ~
2. 주요 업무: 원주/강릉/울진 발전 단지 시설 보호
3. 임금: 상담 후 결정
4. 별도 포상금 지급 안내: 테러리스트 사살 시 명당 5억, 생포 시 명당 15억 지급.